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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열의 촬영미학] 크리스토퍼 놀런의 아이맥스, 극장의 마법이 사라지는 시대에 - 박홍열 촬영감독의 <오디세이>

<오디세이>

영화 전체를 가로 방향 15개의 퍼포레이션(필름 구멍) 65mm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만이 풀 아이맥스 영화라는 칭호를 받는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덩케르크>부터 <테넷> <오펜하이머>까지 영화 전체를 65mm 필름으로 촬영했다. <오디세이>의 촬영 네거티브필름 역시 65mm다. 극장에서 필름으로 상영할 때는 사운드트랙 영역이 포함된 70mm 프린트 필름을 사용한다. <오펜하이머>의 아이맥스 상영용 프린트도 70mm다. 즉 70mm는 상영용 필름 규격을 가리키고, 아이맥스는 촬영과 상영 시스템을 뜻한다.

필름 카메라의 촬영 방식에는 필름이 세로로 이송되며 촬영되는 방식과 가로로 이송되며 촬영되는 방식이 있다. 같은 규격의 필름이라도 이송 방향에 따라 상이 맺히는 이미지의 크기가 달라진다. 세로로 이송하는 65mm 필름은 퍼포레이션 5개에 한 프레임의 이미지 영역을 가지며, 35mm 필름 아카데미 규격보다 대략 네배 큰 면적에 2.20:1 화면비를 만든다. 반면 가로로 이송하며 촬영되는 65mm 필름은 한 프레임이 퍼포레이션 15개를 차지하며, 아카데미 규격보다 대략 열배 큰 이미지 영역에 1.43:1 화면비를 갖는다.

놀런은 앞선 영화들에서 세로 방향으로 이송되는 65mm 필름 카메라와 가로 방향으로 이송되는 65mm 아이맥스 카메라를 섞어 사용했다. 65mm 필름으로 촬영된 장면도 70mm 상영용 프린트로 출력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맥스 규격은 아니다.

<덩케르크>는 놀런의 아이맥스 작품 중 65mm 세로 방향 촬영과 가로 방향 아이맥스 촬영을 섞어 영화 전체를 65mm 필름으로 촬영한 첫 번째 영화다. 이 작품에는 인물의 클로즈업이 거의 없다. 대사도 많지 않다. 상황 안에 놓인 여러 인물을 한 프레임에 담거나, 한 인물보다는 공간 안의 인물을 담는 풀숏과 롱숏이 많다. 인간보다 사물과 물질의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이미지를 구축해나간다. 대사가 상대적으로 적은 인물들과 사물들은 가로 방향 65mm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물의 대사가 긴 장면들은 65mm 세로 방향 카메라로 촬영한다. 아이맥스 카메라는 필름이 돌아가는 모터 소리가 크기 때문에, 대사가 많은 장면에서는 동시녹음을 위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5 퍼포레이션 65mm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놀런은 이 기술적 제약을 영화의 물질성으로 그대로 드러낸다. 화면비를 통일하지 않고 인물의 대사 장면은 2.20:1로, 대사가 중심이 아닌 이미지는 1.43:1로 나누어 보여준다. 그래서 한 장면 안에서도, 동일한 상황과 동일한 공간에서 화면비가 바뀐다. 그 결과 <덩케르크>에서 아이맥스 촬영은 자연스럽게 인간 중심이 아닌 공간과 물질들로 향한다. 영화 속 인간만이 가진 특권인 대사가 뒤로 물러나고, 인간도 하나의 물질로, 다른 비인간적 존재들과 함께 동등한 존재로 영화 안에 자리 잡는다. <덩케르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은 비행기 날개에 아이맥스 카메라를 장착해 촬영한 날개의 시점숏, 꼬리날개와 프로펠러, 조종석 시점으로 보이는 과녁 표시와 비행기 시점숏, 됭케르크 해변에서 배를 기다리는 영국 군인들의 군중숏이다. 아이맥스의 큰 네거티브필름이 만들어내는 높은 해상도와 뛰어난 세부 묘사 능력을 활용해 해변을 와이드숏으로 포착하고, 깊은 심도로 그 안의 인물들이 모두 드러나도록 특정 인물에게 포커스를 주지 않는다. 수많은 군인과 버려진 장비와 부서진 배가 모두 선명하게 드러나며, 해변과 군중이 동일한 밀도로 보이도록 아이맥스 이미지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오펜하이머>는 청문회가 서사의 중심에 놓이며 인물들의 대사가 많고 인물 단독숏이 자주 등장한다. 놀런은 아이맥스 카메라를 활용해 물질을 전면에 내세운다. 말이 없는 모든 것들은 아이맥스 이미지다. 우주를 담아낸 <인터스텔라>가 거대한 우주 안의 너무도 작은 인간을 스크린에 표현했다면, <오펜하이머>는 반대로 거대한 인간이 볼 수 없는 미시 세계의 우주를 담아낸다. <오펜하이머>의 오프닝 시퀀스는 바닥에 고인 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작은 동심원이 생기면서 시작한다. 그 물결의 파동으로 카메라가 천천히 들어가고, 오펜하이머의 얼굴로 연결되며 그에게도 카메라가 천천히 들어간다. 이어지는 컷은 거대한 폭발의 화염, 그리고 그 화염을 만드는 작은 입자의 세계다. 화염 밖으로 솟아오르는 작은 불씨들의 화면은 리버스로 플레이되며 스크린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배우 킬리언 머피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채운 킬리언 머피, 즉 오펜하이머의 얼굴은 지금까지 한번도 아이맥스영화에서 보지 못한 인물의 클로즈업이다. 또한 스크린에서 한번도 만나지 못한 킬리언 머피의 다른 클로즈업이다. 70mm 아이맥스라는 거대한 스크린에 아주 작은 양자의 미시 세계를 펼치는 이 장면은, 가장 작은 입자를 가장 넓은 화면 위에 올려둔다. 넓은 우주를 그보다 훨씬 작은 스크린에 표현하면서, 가장 거시적인 것과 가장 미시적인 것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지구 밖 우주는 너무 커서, 입자들의 우주는 너무 작아서, 둘 다 인간의 눈으로 전체를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 두 세계를 보여줄 수 있고, 우리는 그 세계가 펼쳐지는 스크린 앞에서 경험한 적 없는 이미지들을 만난다. 놀런은 <인터스텔라>와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멀리 있는 두 우주를 연결한다. 하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의 우주다. 놀런은 이 두 세계를 편집의 컷처럼 영화와 영화를 이어 몽타주한다.

오프닝에 이어지는 오펜하이머의 얼굴 클로즈업은 아이맥스 카메라가 가장 근접해 찍은 최초의 얼굴이자 새로운 아이맥스 이미지의 발견이다. 거대한 풍경이나 우주 왕복선에 실려 지구 밖의 광활한 우주를 찍던 아이맥스 카메라가 인간의 얼굴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순간이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미세한 표정의 변화가 펼쳐진다. 얼굴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확대되어 드러나는 순간, 오펜하이머의 얼굴은 하나의 우주가 된다. 아이맥스 65mm는 이미지의 면적이 크기 때문에, 피사체에 카메라가 아주 가까이 다가서면 물리적 한계에 부딪혀 상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 놀런은 <덩케르크>에서 군함을 침몰시키고 <테넷>에서 비행기를 실제로 폭파시키며 거시 세계의 현상을 CG 없이 직접 촬영했듯, <오펜하이머>에서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 세계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거시 세계의 아이맥스 촬영이 미술과 물리적 규모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미시 세계의 아이맥스 촬영은 불가능에 가까운 기술에 대한 도전이다. 입자의 세계를 담아내듯, 놀런은 아이맥스 카메라가 더이상 다가설 수 없는 지점까지 카메라를 밀어붙여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담아낸다. 상이 맺힐 수 있는 최단의 지점 앞에 오펜하이머가 놓인다. 그 결과 오펜하이머의 얼굴 전체가 하나의 심도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눈에 포커스가 맞으면 귀와 코끝은 초점의 경계를 벗어나 흐려진다. 인물에게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선택한 광각렌즈는 아이맥스의 큰 네거티브필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특성마저 변화시킨다. 거대한 아이맥스 화면 위에 인간의 얼굴을 이처럼 가까이 밀어붙여, 관객 바로 눈앞에 인간 얼굴의 여러 평면을 동시에 펼쳐놓으면서도 그중 하나의 면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것은 기존의 아이맥스 이미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클로즈업이었다.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도 <덩케르크>처럼 한 시퀀스 안에서 화면비가 달라진다. 대사가 많을 때는 세로 이송 5 퍼포레이션 65mm의 2.20:1 화면비로, 말이 사라지고 얼굴과 물질의 이미지가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에는 15 퍼포레이션 아이맥스 65mm의 1.43:1 화면비로 확장된다. 오펜하이머의 연인 진 태트록은 그에게 산스크리트어로 된 신화를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한다. “난 이제 죽음이오.” 오펜하이머가 읽는다. 책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덮는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문장을 다 읽고 그가 눕자, 그제야 그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사라진다. 세상의 진실은 가려져 있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지 알아가는 순간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미래를 예언하는 빛을 그림자로 표현한 이 장면은 5 퍼포레이션 65mm 필름으로 촬영됐다. 2.20:1 화면비 탓에 아이맥스 스크린에서는 위아래에 검은 마스킹이 생긴다.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덮은 책의 그림자와 함께, 화면비의 차이가 만들어낸 위아래의 검은 마스킹이 오펜하이머를 압박해 들어온다. 이어지는 장면은 아이맥스로 촬영된, 친구들과 말을 타고 자연을 달리는 1.43:1 화면이다.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앞서 책의 문장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불안은 오히려 더 넓고 거대한 이미지로 확장되어 다가온다.

<오펜하이머>는 시점에 관한 영화로, 객관적 3인칭 시점을 거부하고 인물의 주관적 시점에 밀착한다. 아이맥스 카메라가 인물들의 얼굴로 다가선 것은 1인칭 시점을 강조하기 위한 클로즈업이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양자물리의 세계를 극장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 하려는 놀런의 야심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스트로스의 시점으로 보여줬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대화 장면이다. 오펜하이머의 1인칭으로 다시 보이는 이 장면에서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파멸은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멀리서 스트로스가 걸어온다. 아이맥스 카메라가 오펜하이머의 클로즈업된 얼굴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미사일이 발사되어 올라가고,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아이맥스 스크린 위의 한쪽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다시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나타나 불타는 지구와 겹친다. 영화가 시작했을 때와 같은 오펜하이머의 아이맥스 클로즈업으로 영화는 끝난다.

<오디세이>는 앞선 영화들보다 대화 장면과 얼굴 클로즈업이 많다.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인간 한명 한명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카메라가 집중한다. 자연과 풍광보다 인물의 대사에 집중하지만, 영화 전체가 아이맥스 포맷으로 촬영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화면비의 변화가 없다. <오펜하이머>에서 양자의 미시 세계를 담았던 아이맥스 카메라가 인간의 얼굴에 처음으로 극단적으로 다가갔다면, <오디세이>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거대한 아이맥스 화면 안에 인간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정착시킨다. <오디세이>는 카메라의 소음을 이전보다 해결한 새 카메라 장비로 촬영했다. 기존 아이맥스 카메라의 소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포맷으로 촬영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인간과 물질의 배치가 되었고, 놀런은 그것을 통일하는 대신 영화 안에 그대로 드러냈다. 에서는 <오펜하이머>와 같은 클로즈업은 없지만, 아이맥스 클로즈업이 갖는 고유한 얕은 심도는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화면비의 변화가 있던 자리에, 같은 클로즈업 안에서 동일한 사이즈의 다른 클로즈업을 구현한다.

<오디세이>의 이야기는 대개 플래시백이다. 과거를 묻고 답한다. 인물들은 시인처럼 지나간 시간을 읊조린다. 이때 아이맥스 카메라의 고유한 심도 표현은 말하는 인물의 클로즈업을 담아내고, 그들의 이야기에 관객이 바짝 다가가 듣게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물을 때, 텔레마코스가 페넬로페와 이야기 나눌 때,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에게 트로이성으로 들어간 날을 이야기할 때, 아이맥스 카메라가 그 인물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클로즈업을 만든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한 장면 안에서 대부분 비슷한 심도를 유지하지만, 놀런은 숏과 리버스숏, 다시 숏으로 돌아올 때 서로 다른 초점거리와 심도로 같은 사이즈의 다른 클로즈업을 배치한다. 다음 숏에 무엇이 보일지에 대한 예측은 끊임없이 유보된다. 예측을 벗어난 이미지가 이어지며, <오디세이>는 화면비를 고정한 채 심도와 초점거리의 차이로 다른 화면을 만들어낸다.

작은 화면에서의 클로즈업이 인물을 크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면, <오디세이>의 아이맥스 클로즈업은 거대한 화면 안에서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인물의 얼굴은 선명하게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그 뒤의 흐려진 세계는 이야기가 향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열어둔다. <오디세이>에서 아이맥스는 가장 큰 화면으로 가장 가까운 얼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보이지 않게 한다.

선명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디세우스의 지략과도 연결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성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지략으로 폴리페모스의 외눈을 찌르고 탈출하지만, 그 결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그는 신들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판단과 지략으로 운명을 돌파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볼 수 있기에 세계를 안다고 믿는 순간, 보이는 것은 언제나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친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지략만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결국 작은 뗏목 위에서 포세이돈에게 자기 몸을 맡긴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트로이성이 불타 무너질 때 자신의 집도 함께 무너졌다고 이야기한다. 하나가 파괴될 때 보이지 않는 자신의 다른 한쪽도 함께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오디세이>는 귀환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파멸에 관한 영화다.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을 어기고 트로이의 문명을 파괴한다. 그 순간 자신이 속한 문명의 질서 역시 무너진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승리한 영웅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트로이를 파괴한 행위와 귀환하지 못하는 운명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긴 여정의 시작에는 자신이 선택한 파괴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의 아웃포커스는 배경을 지우고 하나의 인물만을 내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초점이 맞은 얼굴은 인물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즉 현재의 서사를 붙잡는다. 반면 초점 밖으로 밀려난 공간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이야기의 가능성과 경로로 남는다. 세계는 한번에 완전히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시점에서 일부가 드러날 때마다 다른 부분이 다시 모습을 감춘다. 즉 <오디세이>의 아이맥스는 가장 큰 화면을 사용하면서도 최대한 많은 것을 숨긴다. 가장 가까운 얼굴을 보여주고, 그 얼굴 뒤의 세계를 흐림 속에 남겨둔다. 크게 보는 것이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선명하게 보는 것이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놀런은 아이맥스라는 거대한 화면을 사용해 인간보다 작은 입자를 보여주고, 인간보다 큰 우주와 자연을 보여주며, 결국 인간의 얼굴까지 하나의 거대한 물질적 풍경으로 만드는 것일까? 이것이 <오디세이>가 거대한 아이맥스 화면과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만들어내는 역설이다. <오디세이>는 마법이 존재했던 시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놀런은 그 마법을 다시 극장으로 가져온다. 영화가 더이상 마법이 아니게 되는 시대에, 놀런은 작은 화면으로 밀려나는 영화의 이미지를 다시 극장의 물질적 경험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거대한 스크린과 필름의 물질성을 통해 영화가 한때 가지고 있었던 마법을 다시 소환한다. 아이맥스는 더 큰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이미지를 다시 극장의 물질로 만드는 기술이다. 놀런은 아이맥스를 통해 극장이라는, 사라져가는 영화의 장소 자체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결국 놀런의 아이맥스는 ‘더 크게 보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