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발 디딜 틈 없는 극장과 사라지는 극장

요즘 업계 바깥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영화가 잘돼서 좋겠다”는 축하 인사를 받는다. 얼버무리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왜 나한테 이러지 싶은 것도 있지만 호황을 한 꺼풀 벗긴 실상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치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올해 상반기 극장 매출은 4할 넘게 뛰었고 연일 매진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 성적표의 대부분은 손에 꼽을 몇편이 쓸어 담은 것이다. 잔치의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상에 둘러앉은 이는 많지 않다.

<오디세이>를 둘러싼 풍경만 봐도 그렇다. 개봉 27일 만에 900만 관객을 넘어선 이 영화는 열명 중 한명이 아이맥스관에서 관람했다. 2만원짜리 표가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촌극을 넘어 국내에선 제대로 볼 수 있는 극장이 없다는 이른바 ‘진짜 아이맥스’ 논쟁까지 불붙었다. 여기에 제도적인 문제도 불거진다. 연간 상영일의 5분의 1을 한국영화로 채워야 하는 스크린쿼터는 특별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기에 관객이 미어터져도 특정 영화는 두달 남짓밖에 걸 수 없는 형편이다. 산정 기준을 스크린 단위에서 극장 단위로 바꾸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동시에 그러면 특별관에서 한국영화가 더 밀려날 거라는 반론도 무시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관점에 관한 문제라서 더 어렵다.

북적이는 극장 반대편의 풍경은 서늘하기만 하다. 지난 1년 사이 4대 멀티플렉스 체인의 지점 26곳이 문을 닫았다. 서울과 수도권, 광역시라고 예외가 아니다. 주요 체인들이 많게는 수백억원대 적자를 감당하는 동안 고정비가 무거운 지점부터 하나씩 지워졌다. 휠체어로 접근할 수 있는 상영관 수도 함께 줄었다. 사소할수록 쉽게 지워선 안된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특별관 앞에서 예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동네 극장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중이다. 호황과 위기가 한 계절에 뒤섞인 이 양극화의 풍경이 지금 극장가의 민낯이다. 극장이 줄면 선택지가 줄고 끝내 관객이라는 지도의 면적 자체가 줄어든다.

마냥 어두운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연희동의 39석짜리 극장은 한편의 영화를 일년 동안 걸어두는 뚝심으로 제 관객을 길러냈다. 주민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며 극장을 마을의 사랑방으로 바꾼 조치원의 11석짜리 상영관도 있다. 규모의 논리 바깥에서 극장의 다른 쓸모를 증명해가는 사례들이 점차 늘어난다. 크고 화려한 상영관만이 극장의 미래는 아닐 것이다. 이들이 파는 것은 좌석이 아니라 관계이고, 이는 상영을 체류로 바꾸려는 시도다.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방식이 하나일 이유는 없다.

인지과학에는 ‘멘털 타임 트래블’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재료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이 능력이 지금 영화산업에 절실하다. 텅 빈 상영관에서 보낸 몇해를 우리는 어떻게 통과해 여기까지 왔을까. 이 북적임에서 어떤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기억을 정확히 복기해야 시나리오도 정확해진다. 이를테면 홀드백 문제는 단순히 누가 얼마를 가져가느냐의 이권 다툼이 아니다. 극장과 플랫폼과 창작자가 맞물려 도는 생태계의 순환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구조의 문제다. 달리 말하면 상상력의 문제, 눈앞의 성적표에 취하지도 겁먹지도 않고 우리가 선 자리를 가늠하는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배부른 소리 한다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괜히 초치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볼멘소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렇기에 지금 꺼내야 할 의제들이 있다. 박수 소리가 큰 지금이야말로 그 소리에 묻히기 쉬운 문제들을 논의할 적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