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투게더: 톡투유’에 참여한 봉준호 감독이 선택한 영화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이다.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김초희 감독 역시 이 영화를 자신을 영화의 길로 이끈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영화수집광으로도 알려진 봉준호 감독은 제천에서 관객과 함께 볼 영화 여러 편을 후보로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음악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작품을 택했다고 밝혔다. 고란 브레고비치 음악감독을 무척 아껴 그의 음악에서 <괴물> <옥자>의 레퍼런스를 찾았다고도 한다. 2026년 9월의 어느 날, 제천의 음악영화제에서 큰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본 시간이 자신에게도 두고두고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봉준호 감독은 소회를 전했다.
1988년에 제작된 영화이지만 국내 개봉은 그보다 한참 늦은 1993년이었던 이 영화를, 봉준호 감독과 김초희 감독은 각기 다른 시기에 만났다. 1996년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초희 감독은 비디오로 이 영화를 처음 접했다. "제가 비디오 가게 점원을 무려 6년이나 했어요. 그때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완전히 사로잡혔던 기억이 나요. 왜 영화를 하게 됐나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봉준호 감독은 그보다 이른 시기, 한국 개봉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 영화가 상륙하기 전 정성일 평론가를 비롯한 여러 평론가의 극찬과 유수 해외 영화제 수상 이력 덕분에 <집시의 시간>이 '환상 속의 영화'였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은 특히 이 영화의 음악을 무척 사랑해 이후 <옥자> 제작 당시 정재일 음악감독과 함께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정재일씨랑 고란 음악감독의 <언더그라운드> <집시의 시간> 음악을 레퍼런스 삼아 많이 들었어요. 옥자가 지하 상가에서 다 때려 부수며 돌진하는 추격전 신에서 쿵짝짝 하는 음악이 나오는데 그게 '고란'의 음악과 비슷해요. 정재일 음악감독이 발칸반도에 가서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브라스 밴드와 녹음도 해왔었죠. 잠시 그런 음악적 방황(아니 도전)을 했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음악영화제에서 다 함께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란 브레고비치 음악감독과도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밝혔는데, 몇 개의 연결 고리를 거쳐 겨우 통화가 닿았지만 그와 긴 대화를 나누긴 어려웠다고 전했다. “영화감독과 음악감독이 소통하는 게 아주 복잡 미묘한 과정인데요. 예술가를 앞에 두고 복잡하고 힘든 의사소통을 하고 나니 막막하더라고요. 이분과 일하기는 쉽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인생 영화로 품었던 작품을 세월이 흘러 다시 보면 그때의 감흥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김초희 감독은 <집시의 시간>만큼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새로이 좋은 영화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제가 워낙 사랑하는 영화이지만 다시 봐도 와, 꼼짝없이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김초희) 봉준호 감독은 오늘 다시 보니 이 영화에 눈물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며, 과거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과 함께 심사위원을 하며 나눴던 대화를 회고했다. “2011년에 감독님과 딱 한 번 만나서 얘기 나눈 적이 있어요. 칸 영화제에서 제가 신인감독상 부문 심사위원을, 쿠스트리차 감독님이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 심사를 맡고 계셨어요. 심사위원들이 모이는 식사 자리에서 감독님 사인을 받으려고 DVD 같은 걸 가져갔는데 막상 꺼내질 못해서 사인은 못 받았어요. 마음에는 사심이 가득한데 심사위원 디너에서 같은 심사위원이 사인을 받는 게 너무 창피하잖아요.(웃음) 그래도 대화는 나눴는데 감독님이 '당신이 몇 살이지?' 묻더라고요. 당시 제가 '마흔둘입니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이러시더라고요. '조만간 영화 그만 만들라고. 40대가 넘으면 20~30대 젊을 때의 그게 안 나온다고. 영화를 젊을 때 찍어야지, 나이를 먹을수록 영화가 점점 나빠져. 나도 이제 안 하려고 하잖아.' 라고 얘기하셨어요. 그게 15년 전인데 제가 50대가 되어서도 아직 영화를 찍고 있네요. 근데 쿠스트리차 감독님은 실제로 영화 만든단 소식이 별로 없으셔."(웃음)
김초희 감독은 <집시의 시간>이 주는 비극성 속에 숨겨진 아사리판의 미학을 짚으며, 봉준호 감독 영화의 삑사리 속 비극성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물었다. 봉준호 감독은 음악적으로도 <옥자>와 <괴물>이 <집시의 시간>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다. "<옥자>를 할 때 정재일 음악감독에게 고란 음악감독을 레퍼런스로 얘기하면서 깡통 얘기를 했어요. 깡통을 발로 밟아서 뽀그작뽀그작 찌그러지는 느낌, 쇳소리를 내면서 계단에서 막 구르는 음악적 느낌이 나면 좋겠다고 괴이한 주문을 했었는데, 왁자지껄하면서 모든 게 망가지고 일그러지는 느낌이 굉장히 구슬프지 않나요. <괴물>에서도 이병우 음악감독에게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그런 애잔한 정서에서 영감을 받은 게 있죠." 이에 김초희 감독은 "이 영화 아니었으면 사실 영화를 안 했을 것 같아요."라며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나오는 아코디언 연주가 <집시의 시간>의 페란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전했다. 김초희, 봉준호 두 감독은 이 영화의 마술적이며 유머러스하고 판타지적인 장면들을 언급하며 "내 속에 있는 어떤 비극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기분"(김초희)이라고 압축했다.
<마더>의 여러 장면을 제천에서 찍은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해당 장면을 자세히 기억하는 봉준호 감독은 당시 맛있게 먹었던 제천의 생선구이 식당을 애타게 찾기도 했다.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찾아가는 변호사 사무실은 제천 원형 로터리에 있는 거리의 사무실에서 찍었어요. 그리고 제천역 근처 변두리 논밭에서 고물상 장면을 찍었어요. 엄마가 고물상에 가서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지르잖아요. 거기가 제천이었어요. 그 장면을 찍고 김혜자 선생님을 모시고 시내에 와서 생선구이집에서 맛있게 먹었던 좋은 추억이 있네요. 이번에 또 가고 싶은데 식당 이름이 생각이 안 나요."(봉준호) 김초희 감독도 제작실장으로 일했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제천의 청풍리조트에서 촬영했다. "그 영화는 심지어 영화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거기서 엄지원 배우가 리조트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지르는 장면을 찍었어요. 그때 투숙객들의 항의가 많아서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시의 시간>은 이제 다시 보고 싶어도 찾기 어려운 영화다. OTT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DVD 역시 구하기 어렵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도 이렇게 큰 스크린으로 본 게 처음이라며, 이런 기회로 다시 관객들과 함께 보게 되어 제천에서의 좋은 추억이 하나 더 늘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