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록 배우의 ‘정화의 순간들’에 이어, 김아중 배우의 새로운 연재 ‘러브, 씨네!’가 시작됩니다.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사랑이란 프리즘으로 경유하는 글입니다. 한달에 한번, 섬세한 시선으로 영화와 사랑의 스펙트럼을 헤아릴 김아중 배우의 러브레터를 독자 여러분께 발송하겠습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 드립니다.- 편집장으로부터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낄까?
배우로 살아오며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를 만났다. 범죄물도 있었고, 스릴러도 있었고, 시대극도 있었다. 어떤 작품은 거대한 사건을 다뤘고, 어떤 작품은 사회를 이야기했으며, 어떤 작품은 인간의 깊은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개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장면들이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는 순간,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순간.아마 인간은 사건보다 감정을 더 오래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느꼈는지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관계를 맺는 방식도,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도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두려워했으며 무엇을 갈망했는지를 오래 붙들어둔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의 영화는 우리 시대를 무엇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최근 극장과 플랫폼에는 범죄물과 스릴러, 좀비, 디스토피아 SF 같은 장르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물론 이것이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뛰어난 장르영화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욕망하는지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다. 불확실성과 위기, 불안과 경쟁이 일상이 된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장르의 확대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말 그것만을 원하고 있을까? 우리는 정말 범죄와 복수, 생존과 파국만을 갈망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상실을 견딘다. 그리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다시 회복하며, 이해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랑 이야기는 종종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수없이 반복되었고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도 듣는다. 하지만 사랑은 인간이 가장 오래 반복해온 감정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는 사랑 때문에 기뻐하고, 후회하고, 상처받는다. 인간은 한번도 사랑을 졸업한 적이 없다.
어쩌면 사랑이 지루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멜로는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멜로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도 좋은 멜로영화가 만들어지고 있고, 사랑은 수많은 영화 속에 존재한다. 멜로가 다른 장르 안으로 숨어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랑을 가장 전면에 내세우고 인간의 감정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영화들은 예전보다 드물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멜로를 잃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장르 자체 때문은 아니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이다. 스릴러에는 사건이 있고, 액션에는 충돌이 있고, SF에는 상상이 있다. 그러나 멜로는 인간의 마음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감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멜로는 그 감정들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나는 멜로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멜로에는 거대한 사건도 없고 세상을 뒤흔드는 음모도 없다. 그 대신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들이 천천히 전개되고 서로 충돌한다. 사랑하면서 망설이고, 기대하면서 두려워하고, 붙잡고 싶으면서도 놓아주어야 하는 순간들이 인물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신기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분명 영화 속 타인의 이야기인데도 어느 순간 관객은 자신의 감정을 들켜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인물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느새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고, 타인의 감정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건드린다. 그러다 보면 인물과 자신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그것이 멜로가 가진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큰 사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내밀한 감정이 전개되고 충돌하는 과정만으로도 관객을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데려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멜로가 가진 마법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 멜로는 단순한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며, 한 시대의 감수성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나 역시 멜로영화 앞에서 여러 번 감정을 들켰다. 스크린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이야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안.
이 연재에서는 내가 사랑해온 영화들, 그리고 그 영화들이 품고 있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때로는 멜로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고, 때로는 멜로가 아닌 영화 속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첫사랑과 그리움. 상실과 희망. 연민과 용서. 사랑과 욕망. 기억과 시간.
어쩌면 이 연재는 사랑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사랑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보려는 시도. 그래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러브, 씨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