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얼굴>에 관한 가장 곤란한 질문은 환희(정이주)가 누구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설명하게 된다. 직업을 대는 게 가장 쉽지만 이 경우는 예외다. 현재 제주에 사는 환희는 허리를 다쳐 식당 직원 일을 그만뒀고 그래서 새 일자리와 돈이 필요하다. 환희에겐 막막한 상황이 하나 더 있다. 애인 동수(전봉석)가 장기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 결혼은커녕 관계가 지속될지도 묘연해졌다. 아마도 취미는 책 읽기. 가방 속엔 늘 책이 있고, 소설 쓰는 선생님 난영(김시은)을 만나서는 언젠가 글을 쓰고 싶다고 고백한다. 환희는 주인공으로서 앞장서 걸으며 관객을 제주에서 서울까지 곳곳으로 이끈다. 하지만 신기루 같은 안내자는 때때로 꿈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을 동행자에게 안긴다. 그렇지만 어떠리. 정답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2시간 동안 헤매는 건 의외로 자유롭고 가뿐하다.
<환희의 얼굴>을 만든 이제한 감독과 정이주 배우 역시 환희 못지않게 규정하기 어려웠다. 평정심을 잃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이제한 감독은 인터뷰가 시작되자 미완성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창작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정이주 배우는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경청하다가도 신이 난 목소리로 촬영 당시를 회고했다. 사람은 복잡하고 다면적이기에 흥미롭다는 영화 속 깨달음을 현실에서도 느끼며 대화는 깊어졌다.
- 제주에서 서울까지 환희(정이주)의 여정을 연작소설처럼 구성했다. 애초부터 4장 구성(<소설가의 집> <방문자들> <꿈과 희망의 나라로> <환희의 얼굴>)을 염두에 뒀나.
이제한 원래는 6장이었다. 6장 중 4장을 찍었는데, 그중 한장을 버려 3장이 남았다. 마지막 한장은 촬영을 시작한 뒤 새로 써서 붙이면서 총 4장이 됐다. 마지막 4장 <환희의 얼굴>을 쓰는 게 몹시 힘들었다. 긴밀히 엮인 장들을 어떻게 끝에서 수렴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네다섯개 버전을 썼는데 프로듀서도, 아내인 김수민 촬영감독도 마지막 이야기로는 어울리지 않겠다는 의견을 줬다. 결국 반드시 끝내야 하는 디데이에 써지더라. 환희가 소설가 난영(김시은)을 다시 만나는 공간이 제주에서 서울로 바뀐 게 원래와 가장 큰 차이다. 남은 분량을 하루에 다 찍었고. 이제 겨우 두 번째 장편 연출이니 분량 조절을 포함해서 이리저리 헤맸다. 단호하고도 유연한 동료들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다.
정이주 당시에 제주 분량이 더 있었는데 갑자기 올라간다고 해서 놀랐다. 감독님의 고뇌를 전혀 몰랐던 내 입장에서는 제주에서 즐거운 추억만 있다. 스태프들과 한 숙소에서 지내며 같이 헬스장에서 운동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삼양검은모래해변도 잊지 못한다. 여길 매일 같이 걷고 또 걸으며 환희의 대사를 외우고, 환희가 여길 왔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를 상상했다.
이제한 제주를 주된 공간으로 설정한 건 이 영화의 태생과 연관이 있다. 제주에 연출도 하고 글도 쓰는 지인이 사는데, ‘단편을 써서 주고받으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온 거다. 그렇게 환희와 난영을 처음 찾아가는 1장 <소설가의 집>을 시작으로 쭉쭉 썼는데, 어쩐지 장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시에 부단히 연습해서 어떤 형태로든 뭔가를 만들어내겠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게 <환희의 집>이 됐다.
- 정이주 배우가 환희에게 받은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환희는 모호한 캐릭터다. 특정 직업을 붙이기보단 제주를 떠도는 사람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신을 반겨주는 난영을 보며 눈물을 쏟는 모습에선 순수하구나 싶었으나 제 것인 양 남의 통장에 손을 댈 때는 영악해 보였다.
정이주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환희에 관한 무엇도 확정할 수 없었다. 명확한 상이 생기지도 않았고 마치 신기루 같았다. 바로 이 점이 좋았다. 원래도 해석의 여지와 숨 쉴 구멍이 많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어느 쪽으로든 연기할 수 있으니 재밌을 거란 기대가 컸다. 일상에서도 확신이 들어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고. 배우로서 환희 같은 인물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그렇지 않았다. 그저 시나리오의 흐름을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고…. 제가 왜 그랬을까요, 감독님? 제가 환희에 대해 많이 묻지도 않았잖아요.
이제한 글쎄.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런 것뿐이다. 애당초 ‘캐릭터를 잡아서 연기한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편이다. 시나리오에는 개별적인 장면이 있을 뿐이고, 연출자로서는 배우가 그 하나하나에 맞는 연기를 해주길 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에서 환희는 이래야 해’ 하고 구체적인 디렉션을 하지는 않았고, 쓸 때는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다. 다만 장면마다 환희의 마음 정도만 염두에 두고 전체적으로는 비워두려고 했다. 그 공백에 슬픔, 아름다움, 미움, 불쌍함 등 여러 감정이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게 말이다. 결국 개별 사건과 장면을 연결해서 환희라는 한 사람을 완성하고, 한 이야기로 통합하는 건 관객일 텐데, 그들의 의지를 믿고 이 능동적인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고 싶었다.
정이주 듣고 보니 자연스럽게 감독님의 의도에 따라갔던 것 같다. 인물의 아주 먼 과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다른 작품보다 훨씬 적었다. 돌이켜보면 지도를 든 여행자처럼 시나리오를 지도 삼아 이 안에 담긴 정보들을 가지고 길을 찾아갔다. 특히 대화가 많다 보니 대화 신들이 중요한 정보가 됐다. 제주와 서울에서 가진 난영과의 긴 대화, 그만둔 식당에 가서 주인(박인춘)에게 다시 일하고 싶다고 말할 때, 새로 일하게 된 레스토랑에서 친해진 직원 기정(황미영)과 수다를 떨 때처럼 그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환희는 이런 면이 있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환희에게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점이 <환희의 얼굴>을 작업하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었던 점이다.
- 정이주 배우의 절제된 연기가 환희에 관한 단서를 덜 주면서 환희를 단정적으로 보지 않게 하는 데 한몫했다. 주로 두손을 깍지 끼거나 차렷 자세로 경청하는 환희는 신체언어도, 말의 고저도 적고 말줄임표가 붙은 듯한 화법을 쓴다.
정이주 제주에서 머무는 동안 이곳의 속도에 적응하면서 뭔가를 더하는 것보단 덜어내는 쪽으로 움직였다. 상대 배우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가장 많은 신을 함께한 김시은 선배님의 차분한 톤에 환희도 자연스럽게 물들어간 것 같다.
이제한 두 배우가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신들은 차분하지만 영화에는 격한 신들도 몇 있다. 대표적으로 1장에서 돈을 빌리러 한밤중에 다시 찾아온 환희를 돌려보낸 난영이 불편함을 길게 토로하는 신이다. 앞서 환희와 난영의 낮 대화 신들을 일부러 천천히, 좀 눌렀다면 이 밤 신에서는 ‘시은씨,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했다. 그만큼 시원시원하고 감정의 고저도 확실한 신이 나왔다. 전 직원의 등장으로 현 직원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2장은 누른다고 눌렀는데 현 직원을 연기한 미영씨의 에너지가 워낙 세서 잘 안되더라. (웃음) 여기에 실수에 가까운 것들도 들어가 예상과 꽤 달라졌는데, 그래서 재밌었고 편집하면서도 ‘이런 순간이 있어 좋았지’ 하고 웃기도 했다.
- <지옥만세>의 임오정 감독이 정이주 배우를 “중전마마처럼 우아해서 캐스팅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한 감독이 정이주 배우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정이주 처음엔 제가 마음에 안 드셨다고 했다!
이제한 그때 내가 뭘 모르고 한 소리다. (웃음) 어떻게 된 거냐면 처음 아내가 이주 배우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마음이 튼튼한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생각한 환희는 물기가 있고 깨지기 직전의 느낌이라 매치가 잘 안됐다. 이후에 <소년심판>에 출연한 장면을 봤는데 연기를 정말 잘하는 거다. 자기만의 호흡과 리듬을 만들 줄 알고, 해석력도 뛰어난 배우라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고, 내가 이주 배우에게 선택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쪽이 됐다.
- 환희의 얼굴을 자세히 볼 기회가 좀처럼 없다. 대화 중인 환희의 옆모습을 한 발짝 뒤에서 담은 롱테이크가 주를 이룬다. 이 역시 환희가 특정되는 걸 피하고 비워두려는 의도의 일환인가.
이제한 숏을 나누지 않는 걸 좋아한다. 비유하자면 늘어놓은 조약돌을 일정 거리에서 한 프레임에 담아 길게 찍으면 조약돌이 누구의 눈에도 비슷하게 보일 확률이 높지만, 어떤 조약돌은 가까이서, 또 어떤 조약돌은 멀리서 찍으면 각각에 의미와 경중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무수한 말들이 되도록 평등하고, 관객이 ‘이 말이 중요하구나’ 하고 알아채는 경우가 적길 바랐다.
정이주 롱테이크라 한번에 소화해야 하는 대사가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감독님 대사는 빠르게 잘 외워지고 찍을 때 어렵다는 느낌도 안 들었다. 혼자 떠드는 것이 아닌, 상대의 앞말에 뒷말을 이으며 주고받는 패턴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다만 한 테이크를 10분 가면 10분 동안 쉬어야 했다. (웃음)
이제한 얼굴이라는 게 인물에 관한 가장 명확한 표식일 텐데, 그럼에도 영화에서 환희는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다. 그 차이가 작업 과정에서 흥미로웠다. 그래서 제목도 주인공 환희의 얼굴을 말하는 건지, 환희에 찬 사람의 얼굴을 말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게 <환희의 얼굴>로 지었다.
- 영화에 이어 오늘 두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은 참 다면적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정이주 맞다.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내가 변한다는 걸 느낀다. 각자가 기억하는 정이주가 다 다르다는 것도.
이제한 그게 사람의 일반적인 특성 아닐까.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는 감독도, 집에서 아내를 절대 이기지 못하는 남편도 모두 나다. (웃음) 아마 이 영화를 좋아할 관객은 오해와 이해 사이, 그 무언가에 호기심이 있거나 규정되지 않음을 좋아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다.
- 정이주 배우가 출연하는 이제한 감독의 다른 작품이 있다고.
정이주 <눈을 감으면>이라는 영화에 2분 정도, 카메오처럼 나온다.
이제한 지난 4, 5월에 아내가 촬영하고 내가 녹음과 연출을 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시나리오도 없었고, 장소와 배우가 정해지면 쓰기로 한 거라 장소 섭외차 소극장에 갔는데 거기에 이주 배우가 있었다.
정이주 마주치자마자 감독님이 “시간 되니?”라고 물으셨다.
이제한 그때 고마웠어. <눈을 감으면>은 후반작업까지 마쳤다.
- 정이주 배우의 다른 차기작도 궁금하다.
정이주 최하나 감독님의 신작에서 마법소녀로 등장한다.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지만 실제로 마법소녀 의상도 입고 변신도 한다.
- 환희처럼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하지는 않겠다.
정이주 거기선 1초 만에 뛰고 말도 빨리빨리 한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