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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사진의 얼굴> 구와바라 시세이 포토저널리스트×고희영 감독 대담

셔터를 여러 번 누르는 사치가 허용되지 않던 필름 카메라 시절. 현장은 급박했고, 위험했으며, 때로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겹겹의 난관 앞에서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었다. 진실된 태도와 꾸밈없는 시선,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품고, ‘온리 원컷’의 태도로. 1962년 미나마타병 취재를 시작으로 세상이 외면하고 싶어 했던 현장들이 그의 필름에 하나둘 새겨졌다. 격동하는 한국사의 현장도 쉼 없이 누볐다. 자비를 털고 빚까지 내 베트남으로 향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을 기록했으며, 개발 이전 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1936년생, 90살의 일본 포토저널리스트 구와바라 시세이. 그의 오래된 필름이 고희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을 통해 다시 숨을 얻었다. 제주 해녀들의 숭고한 노동을 담은 <물숨>, 완벽한 그릇을 빚기 위해 평생 불과 싸워온 도예가 부녀의 이야기를 그린 <불숨>을 만든 고희영 감독이 구와바라 시세이의 삶에 접속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사진이 전부였던 한 남자에게서 저널리스트의 냉철한 소명의식과 예술가의 숭고한 집착을 발견했다. 사진으로 순간을 붙잡은 사진작가와 영화로 사진 속에 담긴 사연을 현상한 감독을 8월25일 서울에서 만났다. 이 자리엔 구와바라 시세이의 한국인 아내 최화자씨가 동행해 통역과 증언(!)을 맡아주었다. 한평생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 일인지,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그 답이 드러났다.

구와바라 시세이, 고희영(왼쪽부터).

-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을 통해 한국 관객들과 만나게 됐습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저는 미나마타병 사진 작업으로 일본 보도 사진계에 데뷔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한국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격동하는 시대를 찍은 것이었습니다. 자그마한 일이었을지는 몰라도 격동하는 한국의 사반세기를 기록했다는 것은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한국 관객들이 고희영 감독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지 저도 조마조마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진이라는 겁니다.

- <물숨> <불숨> 등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장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사진에 모든 것을 바친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가 주인공입니다.

고희영 일을 하다 보면 점과 점들이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불숨>에서 도공 천한봉 장인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이 점이 되어 구와바라 선생님을 알게 됐습니다. 우연히 선생님이 찍은 천한봉 장인의 사진을 봤어요. ‘일본인 사진가가 1970년대에 경북 문경까지 가서 한국 도예가의 사진을 찍었다고?’ 너무 놀라웠죠. 처음에는 사진 사용 허락을 구하려고 연락을 드렸는데, 우리 영화의 촬영감독 두분(김형선, 김성미)이 너무 존경하는 사진작가라며 흥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에 가서 직접 뵙게 되었죠. 도쿄의 선생님 댁에서 또 한번 놀랐어요. 크지 않은 아파트 전체가 사진으로 가득했거든요. 사진의 바다였죠. 벽이며 천장까지 사진으로 빼곡했는데, 그 공간 자체가 완벽한 미장센이었어요. ‘사진이 전부인 한 남자의 삶이 여기 있구나’ 싶었죠. 그런데 첫 촬영 날 그 기대가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사모님이 방을 깨끗이, 아주 깨끗이 치워버린 거예요. (웃음) 어쨌든 그 방을 보고 선생님이 찍은 10만컷의 사진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이 귀중한 사진을 알려야겠다’는 마음과 ‘이런 분은 한국에서 훈장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 사모님과 두달가량 자료를 모아 문화훈장 수여 추진까지 했어요.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고, 결국 영화를 찍게 됐습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처음 고 감독으로부터 영화 촬영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마치 내 친척 ‘언니’가 나를 찍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만큼 친근함을 느꼈습니다.

고희영 선생님은 사실 까다롭고 어려운 주인공이에요. 사진은 순간의 예술이잖아요. 영화는 그렇지 않죠. 중요한 순간을 놓치거나 실수했을 때 ‘한번만 더’를 부탁할 때가 있는데, 선생님은 그걸 싫어하셨어요. 다큐멘터리에 ‘한번 더’는 없다고. (웃음)

공백의 기록

1965년 서울 청계천변 동네의 골목 풍경.

- 1964년 첫 한국 방문 이후 60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한국의 역사적 순간을 담았습니다. 무엇에 그렇게 매료되셨나요.

구와바라 시세이 그때 제겐 카메라와 프레스 카드가 있었고, 중요한 현장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 덕분에 격동의 시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제 위 세대 대부분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옆집에 간 것 같고 친척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인 아내를 만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제 친척이 되었죠. 한국인의 다정함과 친절함을 많이 느꼈어요. 무엇보다 한국은 취재의 보고, 보물 창고였어요. 취재하고 싶은 테마가 무궁무진했습니다.

고희영 제가 해석하기로는 1960년대 일본은 이미 경제성장을 이뤄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한국은 격동의 시대였어요. 비유하자면 당시 한국의 풍경은 재래시장처럼 삶의 모습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고, 일본은 마트처럼 삶의 풍경이 안으로 들어가버린 거죠. 저도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들기 전 중국에서 10년을 살면서 농민군과 시장 사람들을 많이 찍었어요. 1960년대 한국의 거리에는 진짜 삶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고, 선생님은 아마 그런 것에 끌리셨던 것 같아요.

- 1960~80년대 한국은 언론탄압과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대였고, 이방인의 시선은 때로 현지인이 놓치는 진실을 보게 합니다. 외국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작업, 시선은 무엇이었나요.

고희영 우리가 찍지 않았거나 찍지 못했던 사진의 공백을 선생님이 메워주신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도 선생님은 진영이 아니라 사람을 봤어요. 더불어 당시 카메라는 고가의 물건이었잖아요. 비싼 카메라로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을 찍는 사람이 없었죠. 대부분은 근대화와 성장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국에 올 때마다 청계천의 생생한 삶을 기록했어요. 제가 선생님에게 반했던 최고의 인터뷰 중 하나가 청계천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건물이 가난한 거지, 사람들의 얼굴이 가난한 것은 아니다.” 이 한마디가 선생님이 사진을 찍을 때 무엇을 보는지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시위 현장에서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주로 광각렌즈를 사용했지만, 저는 인물의 미세한 표정까지 담을 수 있는 망원렌즈를 썼어요. 미국 잡지 <라이프>에 실리는 사진들처럼요. 단순한 뉴스 사진이 아니라 사진 자체가 이야기를 담는 포토저널리즘을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문제의식이 중요합니다. 저널리스트로서 사진에 어떤 문제의식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죠.

- 그런 작업들 때문에 한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재 비자 발급이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촬영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으셨을 텐데요.

구와바라 시세이 “일본 사람은 이거 찍으면 안돼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죠. 그래서 망원렌즈로 멀리서 찍었어요. 한장만 찍고 카메라를 내려놨습니다. 그러면 다들 모른 채 넘어갔어요. 사람들이 농담으로 “구와바라씨는 한장만 찍고 도망간다”고 했죠. (웃음)

고희영 영화를 촬영하면서 꾸준히 관찰한 게 있어요. 선생님은 언제 카메라를 드는가, 어떤 순간을 찍고 싶어 하는가. 그러다 선생님의 방법론을 알게 됐어요. 바로 ‘온리 원컷’이었죠. 선생님은 “한장만 찍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정말 딱 한장만 찍고 카메라를 내려놓아요. 오히려 상대방이 놀라죠. “정말 다 찍은 거예요?” 이건 관계를 쌓기 위한 선생님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미나마타병 작업을 보세요. 미나마타를 60년 동안 찾아가셨잖아요. ‘온리 원컷’이지만 어쩌면 한평생에 한컷을 찍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찰나의 사진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감독님은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선별하셨나요.

고희영 대여섯 가지 굵직한 테마가 보였어요.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대학생들의 시위, 베트남 파병, 기지촌 여성, 청계천, 북한 등이었죠. 저희가 대표작 1천컷 정도를 골랐고, 암실에서의 인화부터 디지털 작업까지 여러 과정을 거쳤습니다. 사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고민하다 기막힌 아이디어도 떠올랐어요. 보통 연속촬영을 하잖아요. 선생님의 대표작인 ‘침묵의 시위’ 앞뒤 컷을 이어 붙이면 사진 속 인물들이 움직일 것 같았어요. 포토 플레이를 해보자는 거였죠. 그런데 사진가들이 사진을 가로로도 찍고 세로로도 찍고 삐딱하게도 찍는다는 걸 간과했어요. 사진이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고생만 실컷하고 실현하지 못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웃음)

다정과 냉정 사이의 카메라

1965년 서울 청계천변.

- 긴박하거나 비극적인 현장에서 피사체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신뢰를 형성하는 작가님만의 방법도 궁금합니다.

고희영 미나마타 주민들에 따르면 선생님은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지 않았어요. 먼저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발 한발 더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밀도 높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겁니다. 저 역시 <물숨>을 찍을 때 2년 동안 카메라를 놓고 해녀 공동체에 들어가 살았어요. 그랬더니 ‘너는 찍어도 좋아’라는 허락이 떨어졌죠. 선생님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작업을 탄탄히 하시는 것 같아요. 성정 자체가 그런 분이세요.

구와바라 시세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다정해야 해요. 한편 시위처럼 역동적인 현장에서는 까만 옷을 입고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닌자처럼 멀리서 딱 한장 찍고 사라지는 방법을 썼습니다. 소련이 붕괴하던 시기 구소련에 갔을 때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담배에 불을 붙이는 척하면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몰래 릴리즈를 눌렀어요. 포토저널리스트는 조금 스파이 같은 짓도 해야 됩니다. (웃음)

- “포토저널리스트의 일은 잔혹하다, 때로 사진을 찍는 일은 전투나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록자로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는 순간과 보통의 인간으로서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사이에서 갈등한 적은 없으셨나요.

구와바라 시세이 포토저널리스트의 마음에는 다정함과 냉혹함이 존재합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할 때는 다정하게, 조용히 찍어야 할 때는 잔혹한 마음으로 찍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전달하고 기록한다는 저널리스트의 마음으로 찍는 겁니다.

1965년 서울 종로. 4·19혁명으로 희생된 선배들을 위로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침묵 시위.

-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한국에 오신 구와바라 작가님과 청계천, 동두천, 부산, 문경 등을 다시 둘러보셨습니다. 동행하며 가장 가슴 뭉클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고희영 2023년 9월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선생님이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을 중심으로 촬영지를 정했습니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동두천 기지촌의 묘지를 둘러볼 때였어요. 선생님은 그곳을 두번이나 찾아가 이름 없고 주인 없는 묘지를 한참 둘러보셨어요. 선생님의 사진에 담긴 기지촌 여성들이 100명쯤 되는데, 그중 누군가는 이곳에 묻혔을 수도 있겠다며 무덤에 소주도 뿌리셨어요. 기록하는 것도 참 어려운데 기억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기록하는 것을 넘어 기억까지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죠.

- 평생 사진에 전념했기에 가족의 일원으로서는 결함투성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겠어요.

구와바라 시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내 문제입니다. (일동 폭소)

고희영 역시, 사진과는 타협하지 않으셔. 사모님 실망하셨네. (웃음)

최화자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니까요! 집에 가족사진은 참 많아요. 어디서 취재하고 집에 오면 필름이 남잖아요. 필름이 36장이면 끝에 한두장이 남아요. 그럼 남은 것들을 얼른 찍고 현상을 해야 하는 거죠. 내 입장에서는 앨범에 붙일 만한 예쁜 사진을 찍어주면 좋은데, 그냥 움직이는 모습, 엉망인 모습을 막 찍어요. 필름을 빼려고요.

고희영 사실 사모님이 무심히 하신 말씀 하나가 이 영화를 찍는 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구와바라 선생님이 한국인 아내를 만나서 사진을 못 찍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제 마음을 울렸죠. 선생님의 사진에는 사모님의 눈물 한 방울도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싶었어요.

-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시대를 보는 눈은 어떻게 길러지는 건가요.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 전문학교에서는 이론과 방법론을 배웠어요. 사진 기술은 중학생 때 이미 스스로 터득했고요. 포토저널리스트는 기술에 더해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사에서는 기자가 문제의식을 글로 쓰고 사진기자가 사진으로 표현하지만, 저는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기자와 사진기자의 능력을 모두 갖춰야 했습니다. 문제의식은 태어나서 자라온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져 몸에 배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몸에서 우러나오는 겁니다. 스포츠 선수도, 영화감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영화감독도 이야기를 발상하고 장면을 구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고희영 저도 타고났나봐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웃음)

구와바라 시세이 자, 인터뷰가 끝났으면 이제 제 카메라로 여러분을 한번 찍겠습니다. 라이트 하나 켜주세요.

사진제공 영화사 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