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들과 나는 공존할 수 있을까? 민주사회 속을 살아가는, 아니 그냥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의견을 가진 동물’로서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질문이다. 물론 정답은 알고 있다. 공존할 수 있고, 공존해야 하고, 공존하려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는 게 힘’인 것 같지 않은 순간이 바로 이때다. 알지만 그 앎이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 걸까 아니면 애초에 앎이 힘일 수는 없는 걸까.
알아야 하는 게 그것만이 아니어서 그럴 테다. 공존해야 한다는 ‘당위’를 안다. 역사적으로 공존해왔고 지금도 어쨌든 공존하고 있으니 ‘현실’에 대해서도 안다. 당위와 현실을 모두 알고 있다면 다 아는 게 아닌가 싶지만, 본래의 질문에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이 그것이다. 당위도 알고 현실도 알지만 그런 당위와 현실을 ‘나’에게 묶어주는 해법과 방법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다. ‘어떻게 하면’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잘’ 공존할 수 있을까?
굳이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같은 제도와 정치철학이 제시하는 당위론과 방법론을 들이밀지는 않겠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지혜, 역사적 경험에 토대를 둔 제언은 충분히 새겨둘 만한 가치가 있다. 그건 교육의 영역이자 시민으로서의 훈련이 필요한 내용인 동시에 결국은 참여를 통해 배우고 체험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잘된다면 위 질문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히 해결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필요한 훈련 기회를 얻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쩐지 지금의 참여에는 왜곡되거나 굴절되어 있는 구석이 자주 보인다.
공존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그러나 ‘어떤 공존’이냐에 의해 그 본질과 선택이 갈린다. 물리적으로는 공존하되 굳이 마주쳐 섞이지는 않아도 되는 공존이라면 딱히 어려울 게 없다. 공존의 한 형식으로서의 긴밀한 관계를 끊거나 적당히 완화시키면 된다. 하지만 자주 마주쳐서 ‘의견의 같음’을 공유하고 확인할 수 있는 관계였던 것이 앞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면 슬프고 괴로울 수도 있다. 후자는 사실상 의미 있는 관계라고 부를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은 자신의 상실감을 수용할 수 없기에 그것이 부당한 이유로 발생했다는 생각을 흔히 품는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다른 의견 자체를 바꾸려고 하거나, 그들의 다른 의견이 표출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시한다. 나와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거나, 최소한 나와 다른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그 의견이나 그것이 표출되는 방식이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셈이다. 그리고 틀렸다고 말할 근거를 찾자면 한도 끝도 없이 나온다. 그러니 나는 정당하고 저들은 부당하다, 게다가 저들이 부당하게 행동하도록 방치하는 어떤 음모, 검은손, 그릇된 권력이 작동한다는 확신까지 품게 된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저 자기순환적 증폭 논리에 빠져드는 것이다.
여전히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자 한다면, 한때 같아 보였으나 어느 순간 달라진 그 ‘의견’에만 의존했던 관계인지 아니면 다른 지향과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관계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의견의 같거나 다름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걸 더 중시하면 된다. 만약 의견의 같거나 다름이 가장 중요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 안에서 서로 같거나 다른 의견을 나누는 것의 가치가 우리를 잡아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하고 성숙한 공존의 형식을 이룰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 관계를 약화시키는 게 최선이다. 어차피 ‘같은 의견 몇 가지’로 인해 맺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관계는 결국 부서질 운명에 있다. 중요한 몇 가지가 시종일관 같은 의견으로 모아지는 관계? 그런 게 있다면 정말로 운이 좋거나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운 때문이건 어떤 심각한 착각 때문이건 그걸 진정한 관계로 부르는 게 맞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