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주고(재능) 다른 하나를 주지 않는(결핍) 건 성장드라마에 가장 흔한 공식이다. 한 피아노에 두 사람이 포개 앉아 함께 연주하는 <포핸즈>는 두 소년을 완벽하게 정합하는 퍼즐 조각처럼 설계했다. 정통적 음악 가문에서 태어난 강비오(송강)는 온갖 콩쿠르에서 수상을 휩쓸지만 실력이 기교뿐이라며 할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연주를 들은 모든 이에게 “타고났다”는 말을 듣는 최정요(이준영)는 피아노를 좋아함에도 가난한 형편에 예술성을 양육받지 못한다. 남들보다 더 가진 것과 덜 가진 것이 정확히 불일치하는 둘은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포핸즈팀을 이룬다. 하지만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단순히 두 사람이 안 친해서가 아니다. 바로 최정요를 오랫동안 따라다닌 무대공포증이 네개의 손이 무대 위에 서길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때 비오가 말한다. “언제까지 계속 숨어서 칠 건데? 이제 동굴에서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사람들이 보기 싫으면 연습실이다 생각하고 나만 봐. 관객은 없다고 생각해. 내 소리에만 집중해.” 오직 자기 자신만이 피아노 사랑의 증인이었던 외로운 소년을 또 다른 소년이 꺼내주는 애틋한 장면은 성장담의 미덕을 충실히 수행하며 뭉클함을 전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비오의 말은 다소 묘하다. 애초 피아노 연주라는 게 관객이 있어야만 실질적인 외부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행위인데 강비오는 도대체 왜 관객을, 관객의 시선을 지워버리라는 과감한 조언을 전한 걸까. 여기서 말하는 관객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것일까. 관객을 직시하는 정면돌파가 아닌, 눈을 감아버리는 측면돌파에는 현실 속 우리가 마주한 풍경이 있다.
최근 몇년 사이 청년세대를 진단하는 키워드로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는 (호불호와 별개로) ‘쉬었음 청년’일 것이다. 포털사이트가 정의한 쉬었음 청년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구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비경제활동 사유가 ‘기타’(그냥 쉼)에 해당하는 경우로 분류된다.” 세상은 ‘그냥’으로 뭉뚱그려진 진짜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던 모양인지 이곳저곳에서 쉬었음 청년의 이름을 남발했다. 많은 사람들은 쉬었음 청년에 해당하는 이미지로 미디어에 묘사된 은둔형외톨이를 떠올리곤 한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만 의지해 세상에 간신히 연결되고, 주변에는 담배꽁초와 술병, 과자봉지와 배달음식 쓰레기가 널브러진. <김씨표류기>의 여자 김씨(정려원)나 <피라미드 게임>의 조우리(주보영), <일타 스캔들>의 이희재(김태정)와 같은. 하지만 실제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쉬었음 청년이란 단절의 ‘이미지’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딱 우리만큼 보내는, 그러나 당장 일하거나 구직의 의지가 없는 무기력 단계에 가깝다. 카페도 가고 산책도 하며 지내지만 심정적으로 사회적 무중력에 빠져 부유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도 정요가 그랬던 것처럼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관객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제는 신조어가 아니라 일상어가 된 ‘추구미’ 트렌드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델을 스스로 선별한다. 다만 추구미가 목표, 지향점, 꿈과는 사뭇 다른 이유는 단어 안에 남들에게 ‘보여지길 바라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눈을 통과해 만들어진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과 압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로 인한 게으른 완벽주의는 부정적 평가와 실패를 기피하게 만든다. 실제로 ‘니트족의 사회부과적 완벽주의가 자기불일치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논문(류지현·하창수·이아라, 2026)에 따르면 외부의 기대를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일수록, 그 기준에서 벗어난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객관적인 평가대에 올라서는 것을 극심히 두려워하는 마음이 두드러진다
.콩쿠르장에서 갑작스레 어머니가 사망한 후 트라우마가 생긴 정요는 자동적으로 피아노와 거리를 두어왔다. 속으로는 자신이 피아노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비오의 카덴차가 메마르단 사실을 단번에 캐치하면서도 그는 집이 가난해서, 학교가 학생 유치로 돈을 뜯어내려는 것 같아서, 피아노 하면 굶어 죽으니까 등 온갖 이유를 내세워 피아노를 외면했다. 사실 쉬었음 청년의 관점으로 볼 때 정요를 완전히 같은 단락으로 배치하긴 어렵다. 다만 원인은 달라도,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선뜻 행동하지 못하는 모습, 실제 자신과 보여지는 자신 사이의 단차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모습이 무기력에 빠진 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비오가 특정한 타인(할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선택받길 추구한다면, 정요는 반대로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자신을 없애려 한다. 과잉 혹은 결핍. 둘은 완전히 정반대로 디자인된 듯 보이지만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나를 평가하는 관객석에 내가 자발적으로 앉혀버린 관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강비오도 최정요도 우리 모두도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래서일까. <포핸즈> 첫머리에 등장하는 생성형 AI 활용 고지 문구는 어쩐지 다른 드라마들의 것과 다르게 다가온다. 천재 피아니스트를 묘사하는 과정에 조금의 미스 터치도 허용할 수 없던 제작사는 생성형 AI 활용을 선택했다(하지만 어떤 장면에서 얼마만큼 활용했는지는 아직 밝힌 바 없다). <포핸즈>는 숙명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필요하다. 흔들리다가도 곧바로 자기 페이스를 찾아 완벽하게 연주하고, 넘어지더라도 오늘의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고 마는 천재성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실수는 하지만 그것을 만회하는 것은 극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그렇지 않다. 피아노 연습이 중요하단 걸 알면서도 침대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노는 것도 연습하는 것도 아닌 채로 불편하게 며칠을 보내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 고지는 ‘AI가 활용됐다’는 제작적 측면의 정보 이상으로, ‘알파 인간’이 존재할 거란 믿음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말 쉬었다 가는 게 문제인 걸까. 추구미와 완벽히 일치한 ‘나’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되는 걸까. 어떤 선택이든 그것은 결정자 고유의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정답을 정해둔 유명 지휘자와 자기만의 선을 한창 그어가는 소년의 대화를 기억해야 한다. 지휘자가 말한다. “너 악보대로 안 치는구나? 쇼팽의 생각은 악보에 다 적혀 있잖아. 악보를 무시하는 거니?” 그리고 소년이 발칙하게 답한다. “악보는 음악을 적어놓은 거잖아요. 전 음악을 듣고자 한 것뿐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