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보다 중대한 사건을 뒤늦게 알아차린 주인공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 순간, 화면 가득 타이틀 <지금 불륜이 문제가 아닙니다>가 떠오른다. 절로 격하게 공감이 되는 오프닝이다. 뻔한 통속극일 거라는 예상을 산뜻하게 배반하는 이 작품은, 치밀한 구성 사이사이로 유머가 비집고 나온다. 탄탄한 관계도를 빚어낸 이는 신인 정은경, 박수린 작가다.
- 두 작가의 공동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정은경 오래전 영화 시나리오로 써둔 작품이 있었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서 서로 친하지 않았던 두 가족이 얽히는 내용이었다. 묵혀두었던 작품을 시리즈로 다시 작업했고 제작사에 제안을 했다. 박수린 작가와는 내가 웹드라마 연출을 할 때 스크립터와 감독으로 만났다. 드라마 취향이 비슷해서 <킬링 이브> 얘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내가 드라마 작업은 안 해봤기 때문에 공동집필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작사 김지연 대표의 제안에 박수린 작가가 생각났다. 때마침 수린 작가도 자기 글을 쓰려고 준비할 때라 시기가 잘 맞아서 공동으로 하게 되었다. 신 리스트는 함께 쓰고 여기서 누가 이런 대사를 한다 정도까지 정해둔 상태에서 각자 초고를 쓴 후 온라인으로 만나서 회의하는 식이었다. 구글독스를 켜놓고 서로 써온 것을 샅샅이 분해하는 작업이었다.
박수린 같이 집필하면서 수다를 굉장히 많이 떨었다. 캐릭터에 대한 아이템이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서 끝없이 대화를 했다. 대화 속에서 합일점을 찾아갔다.
- 제목을 잘 지었다. 불륜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등장해 시청자를 놀래킨 후 타이틀이 뜨는데, ‘아, 그래 지금 불륜이 문제가 아니네 정말’ 싶더라.
정은경 처음 제목은 정말 재미없는 거였다. 김지연 대표가 어느 날 이 제목을 던져줬는데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대본 쓰는 시간이 좀 길었는데 김혜수 선배님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티셔츠를 입에 물고 막 날뛰었다. 누가 안 봐서 다행이지. 정말. (웃음) 경희가 일하는 장면이 극 중 길지 않다. 리서치를 많이 해서 대사를 썼지만 이게 잘 구현이 될까 했는데 김혜수 선배가 대사를 하는 순간 바로 이 여자가 얼마나 프로페셔널한지 보이더라. 이게 배우의 힘이구나 싶었다.
박수린 캐스팅이 우리가 원했던 일순위 배우들이 돼서 감사했다. 수정은 경희와 반대의 매력이 있었으면 했다. 한쪽이 카리스마 있는 비즈니스 우먼이라면 한쪽은 단아하면서 귀여웠으면 했다. 수정이 미움받으면 큰일 난다 싶었는데 조여정 배우가 그 사랑스러움을 연기로 채워주었다.
정은경 예전에 예능프로 <나 혼자 산다>에 김지훈 배우가 나온 것을 보고 재홍 캐릭터를 쓸 때 참고를 많이 했다. 김지훈 배우가 뭐든지 진심을 다해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크지 않아서 웃긴 느낌이 있었다. 오랫동안 노래를 배우고 농구도 엄청 열심히 하는데 여전히 서툰…. (웃음) 재홍을 쓰면서 예능 속 김지훈 배우를 떠올렸는데, 제작사에는 그런 얘길 한 적이 없었다. 근데 딱 김지훈 배우가 섭외돼서 텔레파시가 통했나 했다.
- 불륜, 범죄극이 등장함에도 이걸 경쾌하게 풀어나간다. 결국은 블랙코미디 장르인 셈인데 톤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겠다.
정은경 원래 블랙코미디 장르를 좋아한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가 퍼즐 맞추기처럼 등장하고, 관객들이 주인공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격차에서 나오는 코미디가 재밌다고 느낀다. 우리 드라마에서도 시청자는 다 아는 것을 주인공들만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코미디가 많다. 그런 재미를 주려고 사건을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수도 없이 수정했다. 나는 웃겨도 수린 작가가 웃지 않으면 뺀 장면도 많다. 내가 쓴 대사를 수린 작가가 칭찬하면 그날 일기장에 썼다. ‘오늘 박수린을 드디어 웃겼다’ 하면서. 협박범에게 줄 현금을 가방에 담아야 하는데 재홍이 루이뷔통 가방을 가져오자, 경희가 “그건 그 새끼들한테 주는 사은품이니?”라고 한다. 그 대사를 수린 작가가 칭찬했다.
박수린 이게 왜 웃긴지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바로 수정이었다. 웃음을 설명하는 것부터가 안 웃기니까.
정은경 어찌됐든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다. 불륜이 밝혀지거나 아이들이 사고친 걸 알게 되거나 하는 심각한 장면에서조차 진지함을 오래 가져가지 말자, 끝까지 웃음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처음엔 불륜이 충격이었지만 아이들 사건 등 더 큰 것들이 연속적으로 밝혀진다. 인물간 관계나 사건이 매회 새로 등장하는데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더라.
정은경 드라마에서 불륜이 등장하면 블랙홀처럼 불륜이 모든 사건을 빨아들이고 사람들은 그것만 본다. 또, 인물이 성정체성을 밝히면 모두 그 생각만 한다. 그런데 현실 세계는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 격한 일이 벌어져도 살아야 하면 자기가 하던 일들을 계속 하는 게 현실 세계의 삶이다.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퀴어영화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게 길게 나오는데, 우리까지 그걸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봤다. 경희가 딸에게 “너희 둘이 더 단단해야 해. 너희 둘이 헤어지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는 그녀가 하루를 꼬박 고민했다고 생각했다. 경희는 무슨 일이든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를 판단했을 거다. 그렇게 사건이 있을 때 이 캐릭터라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슨 선택을 할지를 정하는 게 필요했다. 경희는 다 망해도 그 불행을 이용해 <이혼숙려캠프>에 나가서라도 다시 일어설 사람이다. 그만큼 강인하다. 처음엔 경희의 감정을 따라가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시청자 입장에선 수정이 미울 수도 있다. 재홍과 수정은 불륜 당사자이기 때문에 너무 미움받지 않도록 사랑스럽고 허술한 장치들을 해두었다.
- 모든 인물들이 경희 집에 모여 몸싸움하는 7회가 클라이맥스다. 동선도 복잡하고 대사 리듬도 빨라서 대본으로도 여러 가지를 명시해야 했을 것 같다.
정은경 일단 우리가 상상한 로케이션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대본에선 마당에서 싸우다가 집으로 들어가고 최상철이 돌아다니는 게 통창으로 보이는 식이었다. 집 구조가 바뀌면서 디테일한 부분은 감독님이 짠 건데 그 안에서도 배우들의 애드리브가 좋은 대사들이 많았다. 내가 썼다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배우들이 진짜 많이 살려준 장면이다. 7, 8화 대본이 배우들에게 전해진 후 현장에 갔는데 배우들이 그 신이 연극적이라 찍는 게 너무 신난다고 해서 뿌듯했다.
- 경희와 수정이 협력하는 장면의 대사에도 캐릭터가 잘 반영돼 있더라.
정은경 두 사람이 처음엔 불륜으로 얽혀서 싸우지만 엔딩에 가서는 협업했으면 좋겠다는 그림이 있었다. 대본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별장에 가서 경희가 수정이를 담 넘겨주는 장면을 썼는데 로케이션에 담이 없었다. 감독님이 콘티에서 수정이 경희를 브레멘 음악대처럼 업는 신으로 살려주었다. 감독님 의견을 듣고 ‘왜 우리가 이 생각을 못했지!’ 하고 수정한 것도 많았다. 감독님의 전작도 봤기 때문에 세련되게 연출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 결말에서 인물들이 범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정은경 엔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우당탕탕 완전 범죄로 끝내는 것. 윤리적으로 고민하면서 벌을 받는 건 이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이러니’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주 언급한 작품이 <파고>였다. 감독님이나 제작사에 감사한 게 수위 조절에 대해 작가에게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수정과 재홍의 동영상에 대해서도 쓸 때에는 ‘이거 안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뭘 써도 배짱 좋게 다 받아주었다. 우리가 신인 작가인데도 대본을 믿고 밀어붙여준 부분이 고맙다.
- 4회에 불륜 사실이 경희에게 밝혀진다. 분량상 중앙에 배치한 이유가 있나.
박수린 그 장면은 항상 중앙에 배치하자고 처음 쓸 때부터 얘기했었다. 그때부터 인물들이 달리기 시작해야 한다, 이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쭉 달려가는 느낌으로 사건들이 펼쳐지길 바랐다.
- 사건 발생 시 인물의 선택을 시청자가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했을 것 같다.
정은경 처음엔 민서와 예지가 나도를 찾아 다니게 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근데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이 너무 민폐처럼 느껴지더라. 애들이 사고 쳐서 부모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더 들쑤시고 다니면 시청자가 아이들을 민폐처럼 볼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불륜을 본 다음에 그냥 별장으로 떠나게 했고, 거기로 인물들이 모이게 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어떻게든 모든 인물을 최종장에 별장에 모이게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인물의 행동이 이해가 안되는 장면은 뺐다.
- 정은경 작가는 원래 단편영화와 웹드라마 연출을 했었다. 두 사람 다 시리즈 대본 작업은 처음인데.
정은경 드라마가 굉장히 재미있는 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드라마에서 대본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려놓은 밑그림을 많은 스태프들이 컬러풀하게 채워주었다. 감독님과 배우들이 채워준 것도 있고 연출부, 제작부, 미술팀, 소품팀 모두 좋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줘서 대본에 없던 것들이 새롭게 추가된 것도 많다. 예를 들어 대본에 철거촌도 그냥 ‘빈집’이라고 써두었는데 현장에 가보니 철거 전 어린이집으로 세트가 지어져 있었다. 미술감독님의 아이디어였는데, 극으로 보면 단순한 빈집이 아니라 어린이집이었다는 설정이 서사를 더 살려줬다. 시체를 묻는 지하 저장고도 대본에선 연못도 파보고, 땅도 파봤는데 촬영감독님이 ‘강원도에 이런 저장고가 있다’고 알려줘서 지금의 형태가 됐다. 조여정 배우의 소화전 장면도 무술팀의 아이디어였다. 내가 쓴 것이 영상으로 200% 구현되는 걸 보는 쾌감이 있었다.
박수린 같은 생각이다. 말수가 적다보니 인터뷰 전에 정은경 작가랑 어제 또 줌회의를 했다. (웃음) 나 대신 말을 많이 해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은 3화에서 아이들의 관계가 밝혀지고 카메라가 쭉 패닝하면서 경희의 모습이 보이면서 거기 있는 인물들 모습이 다 보이는 거였다. 대본을 쓸 때에는 그렇게 자세히 쓰지 않았고, 아이들부터 인물이 잘 보였으면 좋겠다 정도만 썼는데 이걸 너무 잘 살려주었다.
정은경 불륜을 저지르면서 수정과 재홍이 중고 앱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많다. 두 사람의 문자 신도 좋아한다. 문자 신이 요즘 워낙 많아 새롭게 연출하기가 힘든데 감독님이 센스 있게 새로운 앵글로 잡아주었다. 재홍과 수정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 문자를 주고받는 장면도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