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초, 서울 은평구의 고즈넉한 주택. 밥상에 둘러앉아 만둣국을 먹고 다들 만족스러워하지만, 이정은 배우는 머리카락 한올을 들고 찬물을 끼얹듯 말한다. “요리의 기본 위생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오늘 만두 요리는 벌점이에요.” 이정은 배우가 연기하는 순애가 남편의 요리를 냉정하게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맞은편에 앉은 변요한 배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두분 뭐 내기라도 하셨어요? 아버지?”라고 묻는다. 그는 첫째 아들 명복 역을 맡았다. 둘째 아들 재황 역의 박세준 배우가 장난스럽게 “돈 내기? 얼마? 엄마 이긴 거야?”라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적당히 좀 해! 어리광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기어코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만둣국을 끓인 주인공 하응 역의 정진영 배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친다. 그가 분한 하응은 주방 일에 일절 손대지 않았지만 아내 순애가 쓰러진 뒤로 요리하는 법을 잊어버리자 직접 요리를 시작한 인물이다. 하응은 나름대로 노력 중이지만 아내 순애는 벌점 10점이 쌓이면 이혼해버리겠다고 선언한 터이다. 젊은 시절 까다롭게 굴며 밥상을 엎던 하응과 묵묵히 참았던 순애의 관계는 이제 역전됐다. “내가 애써 만든 음식이 바닥에 막 뒹굴 때, 나는요. 수치심을 느꼈어요.” 이정은 배우가 순애가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온 울분을 꾹꾹 눌러 담아 대사로 표현하자 “컷 오케이! 너무 좋아!” 무전기 너머로 이준익 감독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정은 배우는 휴지로 눈물을 훔쳤다. 정진영 배우는 기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유 나쁜 놈”이라며 하응을 타박하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1화당 2분 이내, 총 61화로 이뤄진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제작 레진엔터테인먼트, 영화사두둥·연출 이준익)의 44화부터 46화 장면이 완성되는 모습을 근거리에서 바라봤다. 카메라부터 세로로 세팅돼 있고, 수많은 모니터들이 다 세로로 놓여 있는 촬영 현장은 분명 생소했지만 이정은, 정진영, 변요한 등 경험 많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욱 경이로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했던 <아버지의 집밥>은 레진스낵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며, 9월17일 1부가, 9월24일에 2부가 업데이트된다. 순애와 하응 부부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시점은 마침 추석 연휴다.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나누는 추석 연휴, 맛있는 음식 한상을 마주하기까지 누군가가 기울였을 수고와 노력을 돌아보고 감사해야 할 시간이다.
변요한 배우는 <자산어보>에 이어 이준익 감독과 또 한번 호흡을 맞췄다. 변요한 배우와 부부를 연기하는 박지연 배우는 처음 이준익 감독과 함께한다. 안 그래도 빠르게 촬영하기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이 만드는 숏드라마 현장이 어떤가 묻자 변요한 배우는 “세로 앵글이라 투숏과 오버더숄더숏이 타이트하고 촬영 속도가 빠르다”라며 “그만큼 더 많이 연구하고 깊이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응네 대문에 이준익 감독이 직접 붓으로 쓴 문패가 걸려 있다. “스태프들이 평평한 붓을 준비해와서 더 아름답게 쓰지 못했다”라며 이준익 감독은 웃었지만, 글씨에서 완고한 하응의 성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잠시 주어진 쉬는 시간, 손녀 도혜 역의 아역배우 박지윤을 중심으로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에서 똘똘한 아이 막동이를 연기했던 그 배우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연기를 곧잘 하던 박지윤 배우는 쉬는 시간이면 손에서 뜨개질을 놓지 않았다.
세로 화면에 집밥과 감정과 세월을 다 담습니다 - <아버지의 집밥> 이준익 감독, 이정은, 정진영 배우 미니 인터뷰
이준익 감독
“세로 안에 담을 수 있는 드라마가 어디까지인지 도전하는 중이다.” 숏드라마 현장인 만큼 스틸도 세로로 찍어보려는데 쉽지 않다는 사진기자의 말에 이준익 감독이 답했다. 세로 화면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전혀! 첫날부터 바로 적응했다”라고 말한다.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일까. 이준익 감독은 숏드라마조차 “이야기의 승부지 화면비의 승부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의 첫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 속 드라마의 농도, 감정의 농도는 어느 정도일까. 일단 이준익 감독은 이정은, 정진영 배우가 펼치는 리허설을 보고 “이미 눈물을 쏟았다”라고 한다. “오늘 촬영 포인트는 이정은 배우의 독백, 정진영 배우의 하소연이다. 세월이 남긴 가슴 아팠던 순간들을 곱씹고 되새기면서 순애와 하응이 서로를 향한 앙금을 다 쏟아낸다.”
순애 역의 이정은 배우
“남편 하응의 생일인데도 불구하고 기존처럼 벌점을 매긴다. 하응이 들으면 마음 상하겠지만 그동안 쌓였던 것들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장면이다.” 컷 사인과 함께 다정한 얼굴로 돌아온 이정은 배우를 붙잡고 대화를 청했다. 같은 대사를 소화하지만 카메라앵글에 따라 클로즈업숏, 리액션숏 등 테이크가 늘어날수록 그가 점점 울컥하는 게 보였다. 이에 대해 묻자 이정은 배우는 “울컥했다. 하응이 오히려 세게 나오니까 그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을 내더라도,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만의 연기 디테일이 있었다. “나를 담는 클로즈업숏을 찍을 때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다. 정확하게 하응의 잘못을 짚어줘야 하니까.” 이정은 배우는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정확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노년의 여성을 그렇게 세공하고 있었다.
하응 역의 정진영 배우
정진영 배우는 영화 <황산벌>부터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 <평양성> <자산어보>, 그리고 시리즈 <욘더>까지 7편을 이준익 감독과 함께했다. 이번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까지 더하면 두 사람의 협업은 8편으로 늘어난다. 이준익 감독의 빠른 현장을 익히 경험한 그에게 이번 작품은 “최소 5배 빠른 현장”이다. “방금 찍은 신도 영화라면 하루 찍을 분량”이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하지만 급할수록 중요한 걸 놓치지 말아야 하는 법. “이준익 감독이 보다 디테일하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주문한다. 낯선 환경이라 더 디테일하다.” 순애와 하응의 긴 싸움이 핵심적인 장면이었다고 설명하던 그는 “드라마 흐름상 오늘 촬영분이 어떤 분기점이 될 것이다. 오늘 이후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라고 귀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