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모두 거의 비슷한 삶의 체험을 하게 된다. 삶이 저주스럽고, 지겹고, 미래가 막막하고, 자신의 인간성이 근본에서 부정당하는 일상이 누적된다. 무거운 짐마차를 질질 끌면서 산길을 올라가는 늙은 노새가 된 느낌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런 “노새”들은 서로를 보면 금방 알아차린다. 그렇다고 바로 친해지거나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서 연대의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렇게 함께 어깨동무가 된 노새들은 짐차에 올라앉은 마부나 객실에서 시가를 피우는 승객을 향해 “우리는 노새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보편적인 평등을 주장하기도 한다. 20세기 중반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서는 익숙하게 발견되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상대적 박탈감에서도 이런 논리가 작동할까. 이러한 박탈감의 체험은 자신의 실재 존재 조건에서 나온다기보다 사회적 기준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보이지 않고 비참하고 허접해 보이는 “나”만 보인다. 나와 비슷한 처지, 나아가 나보다 나쁜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은 그래서 연대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지질해 보이고 같이하거나 손잡기 싫은, 심지어 혐오의 대상까지 되기 일쑤이다. 여기서 나오는 요구와 싸움은 따라서 전체 인류의 평등이나 사회적 연대 같은 보편적 요구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내 집단이 사회적 위계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 혹은 지위를 더 올려달라는 주장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러한 주장도 대부분 뭔가 “존엄”이니 “인정”이니 “인권”이니 하는 거룩한 말을 둘러쓰고 있기 때문에, 고상한 정신적 가치에서 도출된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잘 뜯어보면 어김없이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이게 전부 다일 때가 더 많다.
여기에 옳고 그르고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은 없다. 상대적 박탈감이든 절대적 빈곤이든 당사자는 괴롭고, 그렇게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각자의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단, 후자의 경우에 “연대”니 “평등”이니 하는 전통적인 사회운동이나 사회철학의 틀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은 강하게 든다. 지위와 신분의 상승과 더 나은 대우를 주장하는 개인과 집단이 그런 말들을 내걸기는 하지만, 과연 정말 관심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은 생긴다.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기자는 그 기사의 제목을 “연대 납득할 조합원, 없다”라고 달았다. 기사를 읽어보니 내용에 비추어볼 때 과장 없는 적절한 제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청업체와 수익을 나누는 일에도,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과의 연대에도, 삼성 DX부문 노조와의 연대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당연한 선택이라고 한다. 연대와 평등은 이제 더 이상 보편적 “상식”이 아닌 것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