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여름의 저녁이었다. 2시간 강연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지하철역을 찾아 터덜터덜 걸었다. 기차 시간이 남아서인지, 나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스마트폰까지 보고 있었으니 누가 보면 스몸비(스마트폰+좀비)였으리라. 폰 화면에 더 몰입하며 주변 집중력이 사라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밀쳤다. 예상을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충격이 컸다. 0.1초 정도 암전 상태처럼 기억이 사라졌고,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는 느낌도 없이 철퍼덕 넘어졌다.
다행히 상대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많아야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러닝 크루임을 복장만으로도 단번에 알았다. 본인이 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변명 없이 사과했다. 최근 러닝 크루들이 무례한 경우가 많다는 기사들을 접하곤 했지만 그는 왜 그렇게 굼뜨냐 따위의 표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거다.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날 걱정한답시고 서성거렸다.
나는 괜찮다며 상황을 종료하려고 했다. 큰 외상도 없었고 무엇보다 7, 8명의 사람이 나를 일으켜 세우며 부산을 떠는 게 부끄러웠다. 서로 가던 길 가자고 하려는데, 폰이 안 보였다. 넘어지면서 전방으로 미끄러져갔음을 그제야 알았다. 청년이 번개처럼 움직여 가져다준다. 동료들은 혹시 액정 깨지지 않았냐면서 빨리 화면을 확인해보라고 재촉한다. 그 순간 나는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 알아서 하겠다며 휴대폰을 차갑게 낚아채고 누가 봐도 짜증이 난 사람처럼 등을 돌렸다. 찜찜한 공기가 흘렀지만 나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나는 절대로, 절대로 내가 보고 있었던 휴대폰 화면을 그들에게 들키기 싫었다.
치킨이었다. 그날따라 너무나 교촌치킨이 먹고 싶었다. 간장콤보와 허니콤보 중 무엇을 고를까 하다가 화면을 확대해 닭 껍질의 윤기를 확인하며 하루의 피곤을 달랠 상상에 가득 차 있을 때 나는 0.1초 기절했다. 치킨 사진이 뱅글뱅글 돌면서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어렴풋이 보면서 말이다.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누가 보면 안되는데. 특히나 이 밤중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보면 안되는데. 군살도 없는 이들이 내 몸매와 치킨 사진을 결합해서 무엇을 상상하면 안되는데. 부끄러운데. 쪽팔리는데. 차라리 액정이 깨졌으면.
이게 체면인가? 나이 오십이 가까워지니 별것이 다 신경 쓰인다. 야식으로 치킨을 떠올리는 건, 유혹 따위는 없다는 사십에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사실,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 살다 보면 그런 문화적 기운을 상시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치킨 먹는 게 죄는 아닌데, 중년이 치킨 먹는 것도 죄는 아닌데 늦은 밤에 의욕 없이 걷는 내 모습이 치킨과 조합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옷 갖춰입고 줄 맞춰 달리는 무리 옆이라면 더 안될 것 같다. 세상에, 이 시간에 야식이라니. 하늘에서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 사진이 공개되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저 나이에 저러고 싶냐. 저 몸매에 저러고 싶냐. 저 뱃살에 저러고 싶냐.
사생활인데 뭘 그리 신경 쓰냐고도 하겠지만, 요즘처럼 자신의 사생활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시대가 있었던가. 회사 생활 정도를 공개하는 게 아니고 출근 전 루틴을 자랑하고 퇴근 후에는 운동하는 어쩌고의 해시태그를 달며 자신의 사생활이 관리의 표본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제때 잔다는 사실도 엄청 강조한다. 자는 건 좋은데, 그걸 다 큰 성인이 부각하니 조금은 낯설다. 제때 자기 위해, 오후 7시 이후에는 일절 먹지 않는다는 부연 설명은 흔하다. 우리는 외친다. 내 사생활은 자기 관리 끝판왕이라고.
여기서 이야기가 멈추면 다행이지만, 그럴 리 없다. 성취와 통찰을 올리기 바쁜 SNS에서는 사생활도 경쟁이다. 다들 열심히 사니, 그보다 더 열심히 사는 걸 보여주려는 건지 스스로가 얼마나 얼마나 독한지를 보여준다. 자기 전에 먹지 않는 것들을 말하다가, 평소에 절대로 먹지 않는 것들을 나열한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라면은 한달에 한번만 먹는다는 둥 콜라는 쳐다도 안 본다는 둥의 본인의 세밀한 사생활을 말하기 바쁘다. 그저 살찔까 봐 못 먹겠다고 하면 겸손한 사람이다. 본인 태도의 윤리성을 입증하기 위해 온갖 의학적 가설을 과하게 동반해 세상 음식을 선과 악으로 간단히 분류한다. 의사, 약사는 한술 더 뜬다. 그거 먹으면, 대장암 걸려요. 그거 마시면, 췌장암 걸려요. 너무 간결한 진단이지만, 표정은 단호하다. 의사라면 절대 안 먹는 음식 어쩌고의 영상은 왜 그리 많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치킨 하나면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다. 그것도 야식이라면, 더 대충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치킨은 오늘의 나를 설명하는 수백개의 퍼즐 중 하나지만, 다른 퍼즐이 어떠했는지 세상은 관심이 없다. 나는 늦잠이란 걸 자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새벽을 독서로 시작한 지가 20년이 넘었고 심지어 글도 매일 쓰고 집안일도 다 하는 사람인데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모르겠고, 어쨌든 저 나이에 야식으로 치킨 먹은 건 사실이잖아. 아, 훗날 내가 암에 걸리면 그 치킨이 또 소환되겠지. 밤에 치킨 먹더니 암 걸렸다 따위의 무례한 분석으로.
나는 넘어진 것보다, 혹시나 밤에 배고픔도 못 참는 중년으로 보이는 게 더 아프다. 나는 치킨을 좋아하면서, 치킨을 좋아하는 나를 미워한다. 미워하라고 배웠다. 사회라는 스승에게 말이다. 그런데 치킨 딱 하나만 미워하겠는가. 나는 종일 열심히 살지만,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자기 관리와 어울리지 않는 몇 조각만 자꾸 생각난다. 이를 절제력 부족으로 해석하고 자연스레 나도 내가 싫다며 중얼거린다. 그 스트레스에, 난 집에 오자마자 치킨을 뜯는다. 간장치킨은 역시 교촌치킨이라면서. 이 맛있는 게 왜 의사들은 절대로 안 먹는 음식인지 모르겠다며. 다음날 아침에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