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마>는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운 영화는 아니다. 첫 장면부터 아비가 자식에게 총을 겨누지만, 그 원인이 부모의 근본주의적 신앙인지 아이의 ‘나쁜 씨앗’인지를 오래 헷갈리게 하지는 않는다. 그 힘을 신이 주었든 악마가 주었든(아마 둘 다 아닐 확률이 크지만), 델마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마녀’라는 점은 꽤 명확하다. 나를 흥미롭게 하는 사실은 <델마>에 ‘기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해 이 영화엔 요아킴 트리에르 특유의 ‘작은 기적’이 없다. 이 작은 기적은 대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만든 교차점에서 벌어진다. <라우더 댄 밤즈>에서 콘래드가 짝사랑하던 상대는 그의 이상한 생각이 담긴 노트를 읽는다. 비웃음당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상대는 노트의 내용을 좋게 평가하고, 둘은 새벽녘에 즐거이 대화를 나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와 <센티멘탈 밸류>에서도 어둑한 새벽 남녀가 교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만남이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어스름히 밝아오는 동안 나눈 대화 자체는 등장인물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왜 자꾸 새벽녘인가? 으레 밤에는 평소 하지 않던 말을 하고 상대도 평소와 다르게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밤새 이어진 만남은 졸음에 겨워질 즈음 끝나고 각자 자기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같은 사람과 다시 만난다고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델마>에는 이런 장면이 없다. 물론 <델마>에도 밤에 두 여성이 만나는 장면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연출상 델마가 초능력으로 상대를 불러낸 장면이다. 처음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아냐가 가로등 너머 그림자 속에 얼굴을 감춘 연출만 봐도 로맨틱하기보다는 공포스럽다. 델마는 아냐의 삶을 자기쪽으로 틀어 없던 교차점을 만들어낸다. 관객은 후에 아냐가 델마에게 호감을 보일 때도 그것이 델마의 힘과 무관한 것이라 믿기 어려워진다.
연애란 간단해 보이지만 세상이 걸린 일이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려면 실패할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 델마가 지닌 능력은 그 절차를 생략한다. 초보 작가가 자기 소망을 쓱쓱 써내려간 소설처럼, 한 사람의 깨달음으로 두 사람의 문제를 푼다. 트리에르의 다른 인물도 이런 편리함을 바랐다. 초기 단편 <스틸>의 주인공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무언가를 영원히 있는 그대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센티멘탈 밸류>의 구스타브는 딸을 위한 각본을 쓰고 영화로 화해를 도모한다.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거나 애초에 떠나지 않고 딸을 키우는 대신, 긴 공백을 예술로 뛰어넘으려는 야심이다. 의 달리기 장면도 이런 욕망을 보여준다. 율리에는 온 세상이 멈춘 사이 연인에게 달려간다. 교차점에서는 때로 교착상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환상 속에서 사랑은 얼마나 간단해지는가. 그런 환상에는 끝이 있다. 세상은 다시 움직이고 율리에는 에이빈드와 헤어진다. 구스타브의 야심 찬 원숏 장면은 노골적인 소격효과를 드러내며, 부녀는 촬영이 끝나자 겸연쩍게 미소 짓는다. 영화와 삶은 별개고, 영화로 삶까지 말끔히 치유되지는 않는다. 반면 델마에게는 찰나의 환상을 영원히 늘릴 능력이 있다. 보통 연애가 자기 마음을 알아차린 다음부터 시작된다면 델마에게는 반대로 마음을 아는 순간 연애가 끝난다.
이쯤에서 이상한 점이 있다. 왜 <델마>의 세계는 관객이 아는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가? 할머니도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것이 혈연으로 한성유전된 능력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오랜 세월, 델마가 속한 가문 여자들은 대대로 모두 착했는가? 아니면 능력에 한계가 있거나, 상상력이 부족했나? 물리법칙을 뒤틀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복권에 당첨되거나 세계를 정복하거나 모든 병자를 치유하는 대신, 고작 가까운 사람 몇을 사라지게 하는 일에 매달린다니. 델마 가문 사람들과 비교하면 ‘캐리’가 염력을 각성하고 벌인 일이 조금 더 사교적인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어쩌면 요양원에 있는 델마 할머니에게서 힌트를 찾을 수 있겠다. 간호사는 할머니가 자신이 모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심한 망상에 빠졌다고 설명한다. 남편이 사라진 것이 자기 짓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때 델마는 자기 능력의 내력을 알게 된다. 할머니가 모든 일을 자신이 했다고 믿고 있다는 설명 뒤에는, 전능함이 자유뿐 아니라 끝없는 죄책감을 낳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 괄호 친 채 숨어 있다. 델마가 이를 깨달았단 사실은 대사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움직임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할머니를 찾아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앞뒤로 움직이는 트래킹숏은, 진실을 향해 델마를 내모는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그 뒤 도서관을 나서는 장면은 더 의문스럽다. 아냐의 어머니가 “딸과 연락이 안되는데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문자를 보낸다. 카메라는 자리를 뜨는 델마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유려하게 흐른다. 델마가 향한 복도는 소실점을 향해 좁아지고, 그는 그 소실점을 향해 걸어간다. 밖으로 나가는 사람을 오히려 안으로 가둬놓는 듯한 구도다. 지금까지 언급한 트래킹숏을 찍기 위해 트리에르는 구태여 레일을 깔고, 장면을 나눠 찍는 등의 수고를 거쳤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능력의 유래를 깨달은 장면 앞뒤에 놓았다. 감독이 카메라의 움직임에 강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어지는 수영장 장면에서 델마는 물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번에 카메라는 좌우나 앞뒤가 아닌 위아래로 수직이동하며, 이로써 델마를 향한 카메라의 압박이 전방위로 완성된다. 수직이동 숏은 조명이 깜박이고 델마가 발작을 일으키며 시작됐다. 작중 깜박이는 조명과 발작은 델마가 능력을 사용하는 트리거처럼 작용한다. 그렇다면 여태껏 그를 압박하고 가두는 방식으로 움직인 카메라는 그 자체로 능동성을 갖고 델마를 괴롭혔다기보다는 델마의 감정 상태를 곧이곧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가짜 대마초를 피운 뒤 환각에 빠지는 장면에 나타난 돌리숏과 비슷하게 이 모든 트래킹과 페데스탈은 델마 자신에게서 비롯된 움직임이다. 실제로 델마는 후반부 아버지가 보트에서 ‘사라진’ 후 호수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는데, 여기서 앞서 죽을 뻔했던 수영장을 다시 한번 방문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아까처럼 바닥에 누워 헐떡이는 대신 벌떡 일어나 아냐와 달콤한 키스를 나누지만, 여전히 그 뒤에서는 창문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불길한 새 떼가 존재한다. 이는 환상이 깨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움직임으로, 델마가 심리적 압박을 극복하고 ‘각성’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면에 불안정한 충동을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결말에 이르러 이런 자살 충동이 없어졌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영화 초반 타이틀이 뜨고 원거리 부감숏으로 시작한 카메라는 서서히 델마에게 다가갔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반대로 델마와 아냐에게서 멀어져 다시 원거리 부감숏으로 두 사람을 찍는다.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영화 속 세계에는 신도 악마도 없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 여기엔 오직 마녀만 있다. 그러니 마지막 장면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덧없는 새벽녘에 붙잡힌 것은 아냐가 아니라 델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봤듯, 트리에르 영화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