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보내고 돌아왔더니 세상이 시끄럽다. 아니, 늘 시끄러웠는데 며칠 몰랐을 따름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3일간 휴대폰을 끄고 디지털 디톡스라는 걸 해봤다. 문제는 돌아온 뒤였다. 고작 사흘 떠나 있었는데 읽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누군가 분노하고 누군가는 반박한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말이 필요했던가. 말은 넘쳐나는데 듣는 사람은 없다. 귀를 막고 결론을 낸 뒤에 서로 악다구니를 쓰다 보니, 어느새 목적은 잊고 그저 상대를 상처 입힐 궁리만 하는 공격으로 넘쳐난다.
추석 극장가의 결과도 얼추 윤곽을 드러냈다. 기대에 못 미친 성적보다 심란한 건 영화를 둘러싼 험악한 반응들이다. 지난해부터 부쩍 실감한다. 영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이 어쩌다 이토록 화를 내고 조롱하고 폄하하는 데 몰두하게 됐을까. 가령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을 둘러싼 호평과 혹평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버닝> 때 경험한 일에 비하면 이번엔 온건한 수준이다. 실은 의견이 갈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모두가 상찬하는 영화보다 논쟁이 붙는 영화가 흥미로운 법이다. 이유가 충분하다면 혹평도 재미있다. 때로 설득당하고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너무 당연해서 자꾸 잊어버리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구태여 같은 영화를 보는 건지도 모른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다. 차이를 확인할 의지조차 없는 태도에 어느새 길들었다는 게 두렵다. 모두가 비평을 쓰지만 아무도 평론을 읽지 않는 시대, 상대의 주장을 듣기 전에 이미 반론이 완성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쓰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특별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자신만의 성벽으로 높고 고고하게 쌓아 올리는 자기애적 나르시시즘은 차라리 귀엽다. 2026년 5월 하버드대학교 제375회 졸업식에서 유명 코미디언 코넌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바야흐로 세계는 나르시시즘의 시대로 치닫고 있고, 알고리즘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당신이 중심’이라고 속삭인다”라고. 그렇게 나를 중심에 놓기 위해 타인을 배경으로 만드는 짓에 길들면, 타인의 말은 이해해야 할 견해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옳은지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보며 바로 그 연설이 떠올랐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비난에는 정작 <암살자(들)>이 없다. 단정은 위험하니 ‘거의 없음’에 수렴한다고 해두자. <호프>나 을 둘러싼 호불호가 비판과 논쟁에 가까웠다면(물론 이쪽도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암살자(들)>을 둘러싼 최근 상황은 철저히 비난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견해를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부딪치고 싸워도 좋다. 다만 싸우기 위해서라도 먼저 상대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올바로 반대할 수도 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란 일치하는 것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부디 영화를 둘러싼 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꼭 좋아하거나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대로 본 뒤 무엇이 다른지 확인하고, 상대의 말을 한번쯤 끝까지 들어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번거롭고 느리고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 수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최소한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번 주부터 당분간 <씨네21>은 최근 영화들을 둘러싼 여러 논쟁과 질문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려 한다. 결론을 먼저 정하기보다 사실을 확인한 뒤 서로 다른 말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살필 것이다. 굳이 기한을 정한다면 (영화를 매개로 한) 공동체의 대화가 다시 가능해질 때까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