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 배우는 임권택 · 배창호 · 이명세 감독 등 여러 창작자의 작품을 통해 선한 인물부터 권위적인 인물, 평범한 소시민까지 폭넓게 소화해왔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제외하고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짚기란 쉽지 않다.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는 2026년 1월 5일 작고한 배우 안성기의 발자취를 다시금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상영작은 <개그맨> <고래사냥> <바람불어 좋은날> <칠수와 만수> <축제> <하얀전쟁> 등 총 6편이며, 생전 안성기 배우가 부산영화제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제안받았을 때 직접 자신의 대표작으로 고른 작품 리스트를 중심으로 선정됐다. 1980~1990년대 한국 현대사의 변화를 통과하는 일상 속 인물들, 노동자와 지식인, 군인 등의 얼굴을 안성기 배우가 다채롭게 구현한다. 과장 없이 인물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들을 통해 안성기는 새롭게 발견됐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영화들을 보다 보면 임권택 감독이 말한 “삶이 연기에 고스란히 투영되는 배우”라는 표현이 과한 상찬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배우 안성기는 떠났지만 그의 영화들은 우리 곁에 남아 여전히 아름다운 그 시절을 상기하게 한다. 특별기획 프로그램 '아름다운 시절, 안성기'를 관람하기 전, 선정된 6편의 가이드가 될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개그맨
이명세 | 1988년 | 125분
종세(안성기)는 스스로를 천재 영화감독이라 믿지만 현실에선 카바레의 개그맨이다. 한 탈영병에게서 종세가 우연히 실제 총과 실탄을 전달받는다. 변두리 이발소 주인이자 배우를 꿈꾸는 도석(배창호), 일상에 권태를 느끼는 선영(황신혜)과 함께 종세는 마치 영화 촬영을 하듯 은행 강도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린다.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콧수염과 몸짓, 진지한 태도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한편 이루지 못한 영화감독의 꿈을 품은 종세의 비애가 짙게 깔린다. 안성기의 희극적인 연기와 페이소스가 동시에 빛나는 작품이다.
고래사냥
배창호 | 1984년 | 112분
소심한 대학생 병태(김수철)가 실연 후 집을 나온 뒤 떠돌이 민우 (안성기)와 예기치 못한 동행을 한다. 둘은 윤락가에서 말을 잃은 춘자(이미숙)와 마주한 뒤 그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 위한 여행을 시작 한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띤 <고래사냥>은 청춘의 방황과 자유, 타인에 대한 연대를 담은 작품으로 서울에서 42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 하며 1984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안성기가 연기한 민우는 정처 없이 떠돌면서도 세상살이에 능하고, 병태와 춘자를 보호하는 자유로운 인물이다.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과 몸짓, 해학을 무기 삼아 민우는 당대의 가난하고 거친 현실을 통과한다.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 1980년 | 119분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덕배(안성기)는 개발 중인 서울 변두리의 중국집에서 배달원으로 일한다. 이발사 춘식(이영호), 여관 종업원 길남(김성찬)과 어울려 살아가는 세 청년의 삶을 통해 <바람불어 좋은날>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이면의 가난과 계층 격차를 포착한 다. 순박하고 낙천적인 덕배는 구로공단 노동자 춘순(임예진)과 부유한 집안의 명희(유지인)를 만나며 도시의 냉혹한 현실을 경험한다. 아역 활동 이후 오랜 공백을 거친 안성기가 성인 배우로 새롭게 자리매 김한 작품으로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과 해학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축제
임권택 | 1996년 | 107분
작가 이준섭(안성기)은 치매를 앓던 노모의 부고를 전해 들은 뒤고향으로 내려간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오랫동안 어머니를 모신 형수와 13년 전 집을 떠났던 이복조카 용순(오정해) 등 가족 구성원 사이에 쌓여 있던 감정과 갈등이 드러난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는 장례라는 의식을 따라가며 죽음과 애도, 가족의 기억과 화해를 들여다 본다. 안성기는 장례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감정을 크게 표출하기보다 주변 인물들의 감정을 받아내는 준섭을 절제된 연기로 그려낸다.
칠수와 만수
박광수 | 1988년 | 108분
칠수(박중훈)는 미국행을 꿈꾸며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고, 간판 장이 만수(안성기)는 장기 복역 중인 아버지로 인해 여러 제약이 뒤따른다. 함께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작업을 마친 옥상에서 답답한 삶에 대한 울분을 쏟아내고, 이들의 행동이 뜻밖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칠수를 챙기는 여유부터 자신이 택하지 않은 조건에 가로막힌 노동자의 좌절까지 안성기 배우는 만수의 다양한 감정을 스크린에 옮긴다. 일상에서 억눌러온 감정이 옥상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후반부는 지친 소시민의 어깨 위로 1980년대의 억압된 현실을 겹쳐낸 안성기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하얀전쟁
정지영 | 1992년 | 124분
소설가 한기주(안성기)는 귀국하여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과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전쟁에 관한 자기 경험을 소설로 쓰던 그에게 옛 전우 변진수(이경영)가 연락해오 고, 전장의 기억이 다시금 기주의 삶을 침범하기 시작한다. 안성기가 연기한 기주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무기력과 죄책감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하지 못한 그의 불안을 표현하며 전쟁이라는 사회적 참사를 통과한 뒤 한 인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 개인의 삶에는 폭력이 지속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