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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끝내 보여주지 않는 것, 조현나 기자의 <가능한 사랑>

<버닝>

<가능한 사랑>을 보며 <버닝>의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벤(스티븐 연)과 대화를 나누던 중 종수(유아인)는 어릴 때 아버지의 협박으로 집을 나간 어머니의 옷을 태워야만 했던 사실을 고백한다. 잠자코 듣던 벤이 건넨 대답은 자신이 재미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이었다. 불을 지른다는 행위에만 공통점이 있을 뿐 시작의 의도도, 넓게는 둘의 살아온 배경까지도 다름을 짐작게 한다. 그 뒤로 종수는 꿈을 꾼다. 7살 종수가 타오르는 무언가 앞에 서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옷더미가 아닌 비닐하우스다. 종수의 기억에 벤의 경험이 이식된 꿈인 것이다.

종수는 소설을 집필하길 원하고, 예지(조여정)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어 한다. 그런 종수와 예지를 대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창작욕은 동일하지만 두 인물이 소재를 얻는 방식엔 일말의 차이가 있다. 글을 쓴다는 종수에게 벤은 언젠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말하고, 결과적으로 벤과 나눈 대화를 재료 삼아 종수는 꿈 형태의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 예지는 종수보다 적극적이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선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 감독답게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에게 호의를 표하고 이들의 삶에 파고들려 한다. 예지가 미옥과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미옥의 과거 플래시백이 틈입한다. 어릴 때 세차장에서 호스를 갖고 놀던 때와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호석을 처음 만난 순간들. 이 플래시백은 예지가 미옥 앞에 카메라를 설치한 이후에야 등장하는 신이다. 카메라 앞에서 조금은 머쓱해진 미옥의 두 번째 내레이션과 겹쳐진 플래시백은 아마도 예지가 옛일을 회상하며 한 미옥의 말을 들으며 떠올린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다. 미옥이 말을 마치자 예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촬영감독에게 속삭인다. 바로 이게 내가 찍고 싶었던 것이라고.

종석과 예지, 두 창작자가 떠올린 이미지에는 각자의 욕망이 반영돼 있다. 종수는 벤의 재력을 내심 부러워하고, 자신에겐 트라우마인 방화를 유희로 소비하는 그의 입장에 꿈에서나마 서본다. 예지 역시 겪어본 적은 없지만 반드시 포착하길 원했던 해고 노동자의 경험담을 경유해 당시를 연상해본다. 창작에 관한 이창동 감독의 문제의식은 <버닝>의 종수에서 <가능한 사랑>의 예지에게로 느슨하게 이어진다. 다만 창작자의 주체성이 도드라지면서 욕망에 관한 묘사 또한 궤를 달리한다.

감독이 컷을 외치기 전

<가능한 사랑>

미옥과 호석, 상우와 예지의 욕망은 복잡하게 교차하다 상우(조인성)의 별장에서 강하게 발휘된다. 상주하는 관리인, 요리사가 있는 이곳은 현실과 괴리됐다는 인상을 안긴다. 과장하면 상우의 왕국이고 호석과 미옥이라는 주인공을 밀착 촬영할 예지의 사적 세트장과 다름없다. 실제로 이곳에서 예지는 마침내 호석의 증언을 얻어내기에 이른다.

앞서 등장한 미옥의 과거 플래시백이 별장에서의 상황과 중첩된다. 철이(정섶)가 별장 관리인과 물을 뿌리며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옥은 과거 자신이 혼났던 이유를 비로소 깨닫는다. 호석이 사과를 건네던 숲길의 추억엔 미옥을 향한 상우의 은근한 호의가 덧대어진다. 사유지를 누린 상우의 유복함과 파업과 진압 사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호석의 몸부림, 대척점에 선 사건들이 반복해 발생한다.

아무도 없어서 옷을 벗은 채 자유로이 수영했다는 상우의 과거는 그가 CCTV와 관리인의 시선에 무감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미옥은 상우의 방식대로 그곳에 균열을 낸다. 똑같이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들며 투우사처럼 그를 유인한다. 상우의 욕망을 끌어낼 의도가 아니라, 상우의 바람대로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 뒤로 별장에 돌아간 예지는 호석 앞의 카메라를 막아선다. 이때 현장의 풀숏과 예지의 버스트숏이 교차한다. 돌이켜보면 예지는 매순간 카메라를 대동하지만 영화에 드러나는 것은 찍는 행위 자체와 예지의 감정이지 그가 무엇을 기록했느냐가 아니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피사체가 걸린 숏은 등장하지 않으며 푸티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는 바다를 비추는 관리실의 CCTV가 유일하다.

<가능한 사랑>은 감독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균등한 주목을 요한다. 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호석과 미옥은 별장에서 상우, 예지와 파티를 벌인다, 물리적 거리감이 가장 좁혀진 때이지만 호석은 돌연 화장실 여기저기 소변을 배설하고 뒤따라온 상우 역시 똑같은 자세를 취한다. 다음날 호석은 트리거라도 눌린 것처럼 고통을 토해낸 뒤 카메라 앞에서 증언한다. 호석은 한때 평상에서 동료들과 술 한잔하길 소망했다. 아마 그것이 미옥, 상우, 예지와 또 다른 상우가 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에 앞서 호석은 미옥, 상우와 먼저 어울린다. 그러나 종수와 벤의 방화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고 상우가 해고 노동자와 예지 사이 선을 긋는 시혜적 태도를 보였듯이, 호석 또한 일련의 일들이 상우를 동료로 여기기보다 자신의 실현 불가한 욕망, 자신이 ‘죽은 자’임을 상기할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카메라 안팎의 위계를 감지했을 때 미옥과 호석이 택한 것은 저항이다. 감독이 컷을 외치기 전 둘은 촬영장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들의 저항은, 이들이 예지 뜻대로 온전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연유는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다. CCTV에 담긴 바닷가 사건은 예지가 관리인의 시선을 대리하지 않는 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욕망의 굴레

<가능한 사랑>

<가능한 사랑>에서 가장 불퉁하게 튀어나온 존재는 철이가 아닐까. 좀처럼 주변과 섞이지 않는 철이의 기원은 이창동 감독의 단편 <심장소리>에 있다. 해고 노동자인 아버지는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이고 철이(김건우)는 자살을 시도했던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자 두려워하며 학교를 나와 집으로 달려간다. 아이의 감각에 초점을 맞춘 단편과 달리 <가능한 사랑>에선 철이의 감정 묘사가 부재하다시피 하다. 부모 곁을 배회하며 철이는 목격자 역 정도를 수행할 뿐이다. 그런 철이의 의지가 읽히는 몇 안되는 순간은 자신에게 줌인해 들어오는 카메라를 거부하고 상우의 호루라기를 가져온 때이다. 철이가 호루라기를 불 때 별장 관리인은 무언가 감지한 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이제 그에겐 부름에 답할 이유가 없다. 권세의 상징을 손에 쥔, 노동자 착취와 갈등의 순간을 전부 목도한 철이는 앞으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심장소리>에선 비교적 명확했던 철이의 방향이 <가능한 사랑>에선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결말부에서 미옥과 호석, 둘 위로 내리쬐는 달빛이 미옥과 호석의 어느 밤을 떠올리게 한다. 예지 부부를 만난 저녁, 해고 노동자를 마주한 호석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폭주하기 직전의 차 앞을 막아서는 건 미옥이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닮은 헤드라이트를 온몸으로 받아선 채 말이다. 잘 도착했냐는 예지의 질문에 미옥은 자신이 찍은 달 사진을 공유하려다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일련의 미옥의 선택들이 호석을 담으려는 예지의 카메라를 막아선 별장에서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피사체를 향한 카메라의 착취, 미약하게나마 감지되는 저항 모두 은 좌시하지 않는다. 해고 노동자로 대변되는 타인의 고통을 목격한 자가 지켜야 할 윤리를 무겁게 받아들이면서도, 목격자를 대리하는 카메라가 전능하지 않음을, 그렇기에 다시 추동되는 무언의 욕망을 인정한다. 그 때문에 카메라라는 노골적인 매개체를 끌어들이면서도 <가능한 사랑>은 교묘히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굴레에서 끝내 프레임에 담기지 않은, 카메라가 담지 못한 것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