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에 대한 양극의 평은 영화가 제시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감동하거나 서사의 도식성과 단순함을 비판하는 두 부류로 거칠게 나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아직 미처 접하지 못한 다른 분석들도 존재할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감흥은 양가적이다. 지금으로서는 두 감흥을 모두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한 사랑>이라는 구체적 몸체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사랑>의 취약함과 결기, 흔들림과 완고함, 한계와 성취를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장면들을 하나의 방향성이나 결로 성급히 단언하기에 앞서 세부의 운동성을 보다 면밀히 되물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난 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하는 거야. 난 다큐를 만드는 사람이잖아.” 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예지(조여정)는 상우(조인성)를 향해 말한다. “저 사람들”, 예지가 찍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호석(설경구)과 미옥(전도연)의 차가 이들을 따라오고 있다. 이 발언은 호석과 미옥을 대하는 예지의 태도를 상우가 평가한 뒤에 나온 것이다. 상우는 계급적 조건이 명백히 다른 이들의 처지에 애써 동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예지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메소드 연기”라고 요약한다. 다만, 그것을 속임수라고 비난하지 않고 훌륭한 것이라고 칭찬한다. 이 말을 듣는 예지의 표정은 어딘지 어리둥절한데, 짧은 정적 뒤 그가 동원하는 단어는 무려 ‘사랑’이다. 둘의 대화는 어색한 공기 속에서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예지가 갑자기 불러들인 ‘사랑’은 상우가 지적하는 ‘연기’에 반발하기 위한 개념일까. 상반되게 들리는 두 사람의 말은 결국 한길로 통하는 것일까. 영화의 날 선 시선은 둘 중 어느 쪽을 좀더 겨냥하고 있을까. 이창동은 둘 사이 어디쯤에서 이들을 쳐다보고 있을까. 최상층 남성 자본가의 오만하나 냉철한 인식을 마치 초자아의 음성처럼 경유해 여성감독의 단선적인 예술관에 닿는 이 장면의 목적은 무엇일까. 두 사람을 오가는 말들은 직설적이고 규정적이지만, 이 대목의 진의는 실은 생각보다 애매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큐멘터리스트의 정체성과 짝을 이뤄 출현한다는 점이다. 예지는 양자의 필연적인 관계를 망설임 없이 주장한다.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그 말에는 다소 무서운 천진함이 감도는데, 이 순간 영화는 예지의 믿음이 상류층의 한갓 철없고 성긴 감상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상우처럼 그것을 말끔하게 냉소하지 못한다. 이창동은 이 카메라로 타인을 ‘얼마만큼 사랑할 수 있는지’의 질문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여러 번 밝혀왔다. 말하자면 그는 이 대목에서 예지에게 해고 노동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그 위치의 계급적 정당성을 묻는 것이지, 대상을 향한 사랑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윤리적 기반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별반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계급적 뿌리가 다른 타인의 처지에 온전히 동화될 수 있다는 예지의 얕은 믿음보다 ‘사랑’을 다큐멘터리의, 영화의 전제로 두는 이창동의 강고한 믿음을 어쩌면 더 문제 삼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나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자신의 카메라에 담긴 타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경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에게 그 물음을 던질 역량이나 책임감이 부족해서일 리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개념 혹은 질문의 추상성과 원대함, 거기 결부된 감상주의와 자기기만이 카메라에 개입해 감독의 의도와 타인의 초상 모두를 왜곡할 위험성을 그들은 의식하고 경계하는 것이라고, 지금에 와서 나는 생각한다.
예지가 쉽게 발화한 ‘사랑’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는 듯한 차 안 장면은 그가 카메라를 든 앞선 장면들을 다시 돌이키게 한다. 예지가 믿는 사랑의 양상은 어떠했던가. 카메라를 켠 예지가 미옥과 인터뷰하는 몇몇 장면에서 영화는 미옥의 말과 표정에 감화된 예지의 얼굴에 접속하길 꺼리지 않는다. 그런 예지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곧바로 미옥의 플래시백으로 이행함으로써 예지에게도 미옥의 과거로 진입할 수 있는 문, 아련하고 찬란하고 절박한 타인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는 통로를 개방해주기도 한다. <가능한 사랑>은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가 자신이 찍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꿈꾸는 ‘수평적 사랑’의 순간을 비난하지 않고 용인한다. 타인의 내밀한 고백과 마주했다고 확신하는 예지의 희열에 찬 얼굴 역시 <가능한 사랑>을 이루는 일부임을 영화는 공들여 담아낸다. 예지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미옥의 눈물과 떨림을 포착하며 “내가 찍고 싶은 건 바로 이런 거야”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할 때, 그 모습은 너무도 해맑고 화사하게 빛나서 저의를 의심할 새가 없다. 그런 순간을 어설픈 논평으로 폄훼하려 들지 않는 건 이 영화의 솔직함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대상과의 ‘수평적 사랑’이 예지의 자기중심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임을 직시하는 장면들은 이보다 많이 나열할 수 있다. 명품 셔츠 대신 평범한 티셔츠로 바꿔 입는다고 해서 예지가 미옥의 자리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20년 전 미국 유학생 예지를 비추던 달은 봉제공장 노동자 미옥이 월미도에서 올려다보던 달과 같을 수 없다. 첫 술자리에서 예지와 미옥이 욕설을 섞어가며 흥에 취해 말을 틀 때, 영화는 가장된 친밀함의 공간에 우리의 시선을 붙박아둔다. 이 장면은 <가능한 사랑>에서 가장 잔인한 순간 중 하나로 다가온다. 상우의 말대로 미옥의 태도가 메소드 연기와 다를 바 없다면, 그것은 요컨대 <밀양>에서 신애를 불투명한 존재로 만들어주던 “과장”과 “위장”의 연기(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와 달리, 예지의 계급적 기반과 한계를 그의 의지와 반대로 더없이 투명하게 비추는 연기일 것이다.
예지가 타인의 고통에 내적 동요를 겪는 장면은 의아할 정도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내보이는 쾌활함과 천진함, 오백만원이 넘는 핸드백을 들고 해고 노동자를 취재하러 가는 무심함은 무지의 다른 말이다. 혹자는 예지의 무지를 두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설정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무지 자체가 아닌 것 같다. 예지의 카메라가 동석한 심리 상담실에서 호석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뛰쳐나간 뒤, 영화는 쌍용차 옥쇄 파업 당시,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 작전을 기록한 자료 화면을 펼쳐내고, 집에서 그 영상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예지의 얼굴로 이동한다. 이내 그는 한 노동자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당하는 지점으로 되돌아가 화면을 키워보는데,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의 주인공은 호석이다. 이 대목의 장면 구성, 이를테면 실제 영상을 삽입한 의도나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호석의 트라우마를 급작스럽게 봉인 해제하는 방식, 자료 화면과 재현 장면의 거친 결합에도 반문을 제기해야겠지만, 가장 걸리는 건 무지의 주체인 예지만이 아니라 서사 외부자인 우리에게도 앎의 자리를 너무 수월하게 부여하고 허락한다는 점이다. 화면 속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이미지를 확대해 타인의 트라우마에 단숨에 닿는 예지의 손길, 그걸 통해 서사를 메우는 영화의 손길은 지나치게 쉬워 보인다.
왜 다큐멘터리 감독의 서사가 필요했을까. 이창동은 대기업 집단 해고 이야기를 고심하던 중, 그들의 사연을 다루는 영화감독 부부를 떠올리며 자신과의 접점을 찾게 되었다는 설명으로 이 두겹의 층위로 구성된 계기를 들려주었다. 영화가 극 중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의 카메라를 불러들인 이유에 대해서라면 좀더 생각을 확장해볼 수도 있다. 이창동의 카메라가 해고 노동자 가족을 찍는 예지의 카메라를 지켜볼 때, <가능한 사랑>은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동선, 앵글, 피사체와의 관계성 등에 관한 다층적인 질문이 된다. 이창동의 카메라는, 예지의 카메라가 인물들의 거부로 작동을 정지하는 순간이나 별장의 인터뷰 장면에서처럼 급박한 상태에서도 끝내 가동을 지속하려드는 순간 모두를 응시한다. 미옥이 숲속에서 포효하는 호석을 한참 동안 훔쳐보다 결국 발길을 돌리는 대목에서는 미옥처럼 호석에게 감히 접근하지 않고 부부를 후려치는 고통과 두려움을 담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미옥을 몰래 촬영하는 예지의 엉거주춤한 카메라와 자신을 분리한다. 이때 이창동에게 예지의 카메라는 카메라의 윤리를 비평하는 요긴한 장치다. 한편 그것은 이창동의 카메라가 취할 수 없는 직접적이고 즉흥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본능적인 지대에 접촉할 수 있게 한다. 이창동의 카메라 시선이 예지의 카메라가 놓인 자리를 경계 없이 점하는 순간이 그러할 것이다.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시점숏을 빌려 이창동은 미옥과 호석의 얼굴과 감정을 뚫어지게 주시할 기회를 얻고, 인터뷰의 틀을 빌려 그들에게 노골적인 물음을 던지며, 간편하고 가벼운 핸드헬드의 자유도 누린다. 예지의 카메라는 이 영화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기도 한 셈이다.
<가능한 사랑>은 카메라의 윤리를 물으면서도 그것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예지의 촬영팀이 미옥의 집을 처음 방문하는 장면에서 촬영감독의 카메라를 발견한 미옥의 아들 철이가 거실 벽장으로 숨어버릴 때, 영화는 철이를 따라 벽장 안으로 이동해 문틈으로 들이밀어진 카메라 렌즈를 바라본다. 이 장면은 철이가 벽장 문을 완전히 닫으며 끝난다. 이창동의 카메라는 벽장 속 철이를 찍으려는 촬영감독의 모습을 벽장 바깥에 서서 관찰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사적인 영역을 탐색하는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집요한 렌즈를 주시하는 동시에 아이의 은밀한 공간도 공유할 수 있는 위치에 속하길 원한다.
호석이 딸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들른 가게에서 우연히 ‘산 자’와 마주쳐 그의 가족이 모인 레스토랑으로 쫓아가는 장면도 유사한 맥락에서 논할 수 있다. 그가 유령에 홀린 듯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산 자’의 가족 옆 테이블에 앉았다가 나오는 짧지 않은 시간을 영화는 내내 통유리 바깥에서 지켜볼 따름이다. 의중은 알 수 없으나 우울감과 무력감의 무게를 겨우 버티는 호석의 시간 안으로 카메라가 함부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별장 안,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호석은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날의 상황과 지독히 병든 마음에 대한 처참한 자각을 쏟아낸다. 식당에 진입하지 않고 호석의 심중과 거리를 두던 카메라와 호석의 고백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카메라는 다르다는 것일까, 같은 것일 따름일까. 윤리와 욕망 사이의 균열, 혹은 분열이라고 하기에 이 영화는 둘을 너무도 매끄럽고 편의적으로 오간다. 윤리와 욕망이 교차하는 곳, 둘을 모두 거머쥘 수 있는 곳이 의 근거지다.
분명한 건 <가능한 사랑>의 형식이 노동이나 계급의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한 설계로서는 미흡하지만, 영화의 허구성과 시선의 작동 방식을 고찰하는 길로서 더 유용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 가해지는 비판 중에는 해고 노동자의 사연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정작 노동문제는 안이하게 대한다는 견해가 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예가 예지가 미옥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찍는 대목이다. 이들이 반복하는 노동 장면만으로는 다큐의 재미가 떨어진다는 예지의 말에 미옥은 아이디어를 낸다. “재밌는 거? 노조 만드는 거 같은 거?” 이 말을 기점으로 미옥은 사장을 찾아가고 노조 가입 서류를 만들고 내친김에 총회까지 연다. 현실성을 모조리 무시한 채 농담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이 과정이 실제 노조 탄압 사건을 모욕한다거나 호석의 서사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달리 이해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장면이 희화화하는 건 노동운동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이다. 이 장면은 그간 이창동 세계의 속성으로 일컬어지던 ‘리얼리즘’을 향한 일종의 자조로 느낄 수도 있다. 신진 조합원들의 우스꽝스러운 총회에 눈길을 던지며 지나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 엉성한 노조에서조차 배제된 존재들이기보다는 이 장면의 허구적 희극성을 관람하는 영화의 자기 반영적인 시선처럼 감지되기도 한다.
<가능한 사랑>의 서사를 촉발했을 노조 진압 영상, 그 현실의 폭력성, 그것이 남긴 상흔에 영화라는 ‘이야기’가 온전히 접속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역설적이게도 실제 기록 영상을 영화 안에 들일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두번의 인터뷰에서 호석이 토해낸 것들은 이 영상의 실재성에 근접하려는 허구의 반응이자 그것과 겨루려는 안간힘이지만 결국은 실패의 흔적이다. 호석은 예지와의 첫 인터뷰에서 도저히 망각할 수 없는 한 장면을 상기한다. 그것은 경찰들의 구타가 아니라, 자신을 남겨두고 도망치던 동생들의 뒷모습이다. 영화는 지붕 위에서 피투성이가 된 호석의 시점숏으로 그 장면을 제시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플래시백을 지탱하는 호석의 시점숏은 실제 현장 한가운데서 폭력에 노출되며 찍은 영상에서라면 성립 불가능한 것이다. 이 플래시백은 정돈된 시야에서 정리된 언어로 해명할 수 없는 현실의 폭력적 실재성을 개별화된 기억의 정념으로 과도하게 폭발시키는 방식 이외의 해법을 찾지 못한다.
그뿐일까. 영화로 이를 수 없는 현실의 실재성이 있다면, 그 현실이 상상할 수 없는 영화의 모험성도 있을 것이다. 미옥이 그 모험을 현현한다. 그는 비행기 굉음이 마치 노동자들을 위협하던 헬기의 소음처럼 울려 퍼지는 장소 에서도 젊은 날, 어느 새벽의 과수원에서 한 세계가 열리던 풍경을 상기하며 환희에 차오를 수있는 사람이다. 엄마의 고달픈 노동을 떠올리면 서도 세차장 호스의 물줄기가 뿜어내던 빛의 세세한 물결에 감탄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다. 농성장의 길고 힘겨운 투쟁의 시간을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무구한 표정으로 기억할 사람이다. 미옥의 플래시백은 세찬 현실을 지나면서도 그의 마음이 보존해온 아름다움에 영화가 화답하는 방식이다. 미옥이 기꺼이 나눠준 기억의 조각들이 이토록 생생한 플래시백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짐에도 우리가 그것을 오롯이 소유할 수 없다는 기이한 감각이 이 아름다움의 정체이기도 할것이다. 그러나 미옥은 그 아름다움이 언제든 악몽의 얼굴로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세계를 살고 있다. 영화도, 미옥도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미옥을 사로잡았던 세차장 호스의 물줄기를 별장의 일꾼 옆에 선 철이가 넋 놓고 쳐다볼 때, 새벽녘 어린 미옥의 시점에서 바라본 풀숲의 평온한 흔들림이 숲속에서 홀로 고통을 토해 내던 남편을 피해 미옥이 걷던 풀숲의 위태로운 진동으로 반복될 때, 아름다움은 금세 비루한 세속으로 돌변한다. 예지의 카메라는 미옥이 느끼고 감내하는 세상의 양면을 다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별장의 해변에서 미옥이 상우에게 감행한 도발은 그러므로 단순한 유혹의 몸짓이 아니 다. 단순히 성적인 욕망을 내비치는 행동과도 다르다. 앞선 장면에서 상우는 사유지와 다름없 는 해변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던 어린 날을 이야 기하는데, 미옥은 그 곁에서 작게 “자유”라고 중얼거린다. 미옥은 ‘그럴 수 없는’ 조건과 상황에 서도 ‘그럴 수 있는’ 지평을, 아주 작은 틈일지언정 발견하고 열어내는 존재다.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고 맨몸의 상우와 대치하는 미옥은 상류층 부부의 폐쇄적인 영토에서 자신의 감정적이고 신체적인 자율성의 감각을 시험해보는 것 같다. 미약할지라도 그것은 확장의 감각이다. 그힘의 움직임은 해변 장면과 교차하는 별장 장면 에서 카메라의 시선에 갇힌 호석의 형상이 해고 노동자, 배신당한 노동자의 전형을 분노와 원망과 서글픔으로 재생산하며 수축되던 흐름과는 확연히 다르다. 호석은 자신을 정면으로 노려보는 카메라에 굴복하며 호흡곤란마저 겪지만, 미옥은 다르다. 미옥은 이미 도입부 장례식 장면 에서 프레임 안에 불쑥 끼어들어 호석의 술잔을 빼앗아 들며 예지의 카메라를 달리 움직이게 하고 장면의 흐름을 유연하게 전환하고 주도한 적이 있다. 그러니 해변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마지막 CCTV 화면은 그리 염려스럽지 않다. 그것을 보는 주체가 누구인지 영화는 명시하지 않지만, 이 사각의 경직된 화면은 위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미옥의 육체성이 상우의 해변에 일으킨 돌풍, 천연덕스러운 활기는 관음의 화면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그날 밤, 상우가 예지를 상대로 힘을 과장하는 섹스 장면은 한낮 해변에서 미옥의 돌발적인 육체성에 패배 했음을 자인하는 초라한 몸짓일 뿐이다.
해변의 CCTV보다 정확하고 폭넓게, 예지의 카메라보다 정직하게 이 세계를 꿰뚫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철이다. 이 아이가 거의 모든 장면의 ‘눈’임을 영화는 시시각각 표명한다. <가능한 사랑>은 그의 시선에 기대고 그것을 탐한다. 볼 수 없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눈, 그 어떤 카메라에 속하지도 포박되지 않는 눈, ‘안’에서 ‘안’은 물론 ‘바깥’도 보는 눈,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위의 시선이라고 말할 수없는 눈, 본 것을 말하지 않는 눈, 본 것을 삼키고 쌓지만 과시하지 않는 눈, 돌을 던지고 과자 봉지를 날리고 호루라기를 훔쳐도 세계에 아무런 생채기를 내지 않는 무해한 눈, 태권도복을 입고도 싸움의 자세를 취하는 무리 속에서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눈, 그럼으로써 무서워지는 한없이 고요한 눈. 이 영화에 남겨진 아이의 눈은 이창동의 카메라가 이룰 수 없고 도달할 수없는 꿈인 것일까. 예지의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미완으로 닫히고, 술 없이 잠들지 못하는 밤은 여전하며, 환한 보름달도 앞날을 예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이의 눈이 이 밤에도 깨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