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가을, 윤단비 감독은 해운대 바다 앞에서 펑펑 울었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장편 연출작 <남매의 여름밤>(2020) 프리미어를 마친 뒤였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화살을 손에서 놓아버린 기분이었다. 처음 관객을 만나면 벅차오를줄 알았는데 처연해지고 말았다.” 눈물이 무색하게 윤단비 감독은 그해 넷팩상을 비롯해 4관왕을 기록했고, 떠오르는 신예로 각인되었다. 올해는 9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예방 주사를 맞아 다소 의연해진 채로, 그가 <첫세계>를 쥐고 부산에 돌아왔다. ‘세계’의 자리에는 ‘사랑’을 넣어 읽어도 좋다. 이 영화는 섬마을 소녀 진(심수빈)이 도시로 떠나간 소꿉친구 두재(김어진)와 재회하면서부터 달아오른다.
낭만적 데뷔와 그 후의 일상
“<남매의 여름밤>이 크게 사랑받아 차기작도 기대받고 있는데, 부담되지 않느냐는 말. 정말 많이 들었다. 완전히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를 기다리는 관객의 존재를 제대로 체감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다. 그저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사력을 다해첫 영화를 만들었으니, 두 번째 영화도 그래야 했다. 내가 판 거대한 구덩이 옆에 또 하나의 구덩이를 파는 듯했달까. (웃음) 그러니까 무언가를 의식하기보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다. 막상 <남매의 여름밤>과 <첫세계>의 차이가 미미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작을 안전하게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첫사랑과 편견
“인생의 많은 부분이 10대에 결정되었다고 생각해 그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남매의 여름밤>이 그중에서도 가족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다루고 싶었다. 사랑이 후순위로 밀려나 있는 시대이지 않나. 대신 첫사랑이라는 말은 협소해 보였다. 풋풋하고 아기자기한 이미지보다 광범위한 단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제목을 <첫세계>라 지었는데, 너무 거창한가 싶어 고민도 했지만 결국 ‘가제’를 떼어버렸다. 영화의 시작점에는 죽음을 배치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주인공 진과 두재가 재회하는데, 좋은 일이 생기면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또 좋은 일이 생기는 게 삶이라고 믿는다. 진이 문학 수업을 들을 때 두재가 할머니 일기를 읽는 장면을 교차시키기도 했다. 진이 나이를 먹으면 그 일기를 썼던 할머니처럼 될 수도 있겠다고 상상했다.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할머니의 글 내용은 명상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길 바랐다. 로케이션이 된 섬에 20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일기를 쓰셨다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도움받았고, 노인 작가들이 함께 낸 시집도 참고했다.”
전망 좋은 섬
“카메라로 찍는 영화가 AI 이미지와 어떻게 다를 수 있을지 혼자 골몰하곤 했다. 구글 맵에도 안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을 포착하고 싶어 지더라. 날것의 빛과 움직임, 배우가 아닌 사람 들까지 다큐멘터리처럼 프레임에 들이고 싶었다. 도시가 아닌 섬마을을 배경으로 삼은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너무 예쁜 제주도는 피하고 싶었다. 거칠거칠하고, 기암절벽이 보이고, 어업이 잘 되고, 육로가 연결된 섬을 원했다. 학교도 있어야 하니 인구가 1천명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렇게 찾은 게 소안도다. 진과 두재가 헤엄치는 바다는 소안도에서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보길도라는 곳이다. 관광객이 없는, 오직 둘만이 공유하는 바다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 극 중반 외부인이 나타날 때 이상한 기운이 전해질 테니까. 해변은 해가 드나들기를 기다려가며 찍었다. <첫세계>에서 중요한 건 인물의 대사보다 그들의 몸짓과 거리감, 그리고 그들을 스치는 빛과 바람이니 충분히 기다리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눈싸움
“진은 두재를 좋아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더 몰두하게 된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진은 두재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감정에 집중한다. 물론 두 사람이 가진 정보의 양이 다르기도 하지만, 첫사랑이라서 벌어지는 실수이기도 하다. 나도 처음 연애 하거나 짝사랑할 때 내가 좋아하는 걸 그 사람도 좋아할 것이라 착각했고, 내가 그에게 관심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안달했던 기억이 난다. 진이 자꾸만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한 건 그래서다. 심수빈 배우에게는 상징적인 말을 하기보다 ‘팔을 이렇게 쓸어봐라, 몸을 이렇게 만져봐라’하는 식으로 디렉팅했다. 바다 수영 후 진이 옷을 갈아입으며 창밖의 두재를 곁눈질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연기해달라고 했다. (웃음) 그때 둘의 눈이 마주친다면 진에게는 전율이 일지 않을까?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동시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연애에서 조금씩은 그런 이상한 게임을 통과해 왔다.”
그리스, 티셔츠 그리고 막대기들
“돌이켜보면 <첫세계>의 출발점에는 감각을 이미지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주인공이 10대라서 안전선을 고려할 필요는 있었 다. 미국의 10대가 아닌 한국의 10대지 않나. (웃음) 그러나 피부에 닿는 모래가 주는 느낌처럼, 노골적이지 않은 심상을 계속 쌓아가려고 했다. 자전거 바퀴를 윤활하기 위해 그리스를 쓸 때의 소리와 촉감을 전한다거나, 진이 두재가 벗어 둔 티셔츠의 냄새를 맡는다거나,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막대기를 빨아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몰래 술을 마시고 취해버린 진이 ‘엄마한테 미안하다’라며 울어버리는데, 그 대사는 수빈 배우의 아이디어였다. 처음 연애할 때나 성적인 호기심이 생길 때 드는 죄책감을 담은 말이라 단박에 공감 했다. 부산의 관객들에게도 일종의 소속감 같은 걸 느끼는데, 영화를 잘 받아들여 주시길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