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제대로 된 캐시미어 니트를 장만하겠다며 정보를 찾아봤다면 ‘브루넬로 쿠치넬리’라는 브랜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1978년 설립해 최상급 캐시미어 의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현재는 신발과 가방, 가구까지 영역을 넓힌 글로벌 패션 하우스다. 이 브랜드의 창립자이자 디자이너인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10월28일 개봉한다.
<브루넬로: 우아한 선구자>는 브루넬로 쿠치넬리가 작은 농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70대에 들어서도 브랜드를 변함없이 열성적으로 이끄는 현재까지의 삶을 아우른다.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영화에 출연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장소들로 관객을 이끌며 길잡이를 자처한다. 그의 안내를 따라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다 보면 그에 대한 인상은 성공한 기업가에서 점차 철학자이자 예술가로 옮겨간다. 영화에서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렸는지보다 플라톤과 칸트, 자연과 가족, 책과 영화가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이야기한다. 어떤 훌륭한 영화도 한 사람의 인생을 다 담아낼 수는 없기에 그가 더 궁금해졌다.
영화를 계기로 인터뷰를 요청했고 머지않아 긴 답변이 도착했다. “먼저 당신의 멋진 나라와 마음이 따뜻한 한국인들에게 깊은 존경과 우정을 담은 인사를 보낸다.” 첫 답변부터 브루넬로 쿠치넬리 브랜드 특유의 아늑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이 글을 읽고 있나. 당신이 있는 곳의 계절과 분위기가 어떠한지도 궁금하다.
흰색 면바지와 흰색 면셔츠, 아주 부드러운 파란색 캐시미어·실크 재킷을 입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삶의 터전인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작은 마을 솔로메오에 있다. 포도 수확을 막마친 이곳은 무척 즐거운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 자서전과도 같은 영화를 통해 인생을 한발 떨어져 바라본 경험은 어땠나.
내 삶과 일, 사랑하는 사람들,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돌아볼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되짚어보고, 각각의 순간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는 멋진 기회였다. 문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한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평화로운 피난처를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내게 매일 영감을 주는 문장인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 말이 얼마나 옳은지 다시금 확인했다. 내 이야기를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젊은 시절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할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밤이면 별을 바라보던 고향 집과 청년 시절 자주 가던 술집 ‘지지노’ 등 추억이 깃든 장소에서 ‘브루넬로’를 연기하기도 했다. 흔치 않은 경험이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나.
주인공 브루넬로가 될 때면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영화가 지닌 마법 중 하나는 지나간 삶을 다시 경험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당시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이제는 과거가 된 세계에 진입하며, 성장 과정에서 큰 영향을 받았던 익숙한 목소리들을 다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시네마 천국>을 만든 이탈리아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 당신에게 여러모로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그랬다. 먼저 언급했듯 토르나토레 감독은 <시네마 천국>을 만들고이 영화로 아카데미상(1990년 외국어영화상 수상, 현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거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영화를 천번도 넘게 보고 또 보았으며, 볼 때마다 깊이 매료된다. 이탈리아의 창조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그와 삶의 중대한 질문을 두고 끝없이 대화를 나눴다. 다시 떠올려도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시간이었다. 토르나토레 감독과 <인생은 아름다워>로 아카데미상(1999년)을 받은 니콜라 피오바니 음악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건 진정 꿈같은 일이었다.
- 결혼 이후 아내의 고향인 솔로메오로 돌아갔다. 영화에는 마을의 전통적인 행사인 성금요일 행렬에 참여해 예수를 연기한 모습이 짧게 담겼다. 당시 3시간 동안의 공연 경험을 두고 당신은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무아지경의 상태에 대해 좀더 듣고 싶다.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수를 연기하며 깊은 감정을 느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언제나 영성에 강한 매력을 느껴왔다. 젊은 시절에는 신학교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나 그곳을 꽤 일찍 떠났다. 농담 삼아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훌륭한 시간제 수도승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
-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 이전에 캐시미어는 남성복에 주로 쓰였고, 무채색 계열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캐시미어에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을 입히고 여성복으로 확장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나. 기존의 캐시미어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었던 만큼 당시 업계의 반응도 궁금하다.
캐시미어를 선택한 건 귀하면서도 오래 입을수 있는 소재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됐다. 25살 무렵, 이탈리아의 뛰어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당시 취향을 반영한 색을 입힌 여성용 캐시미어 스웨터만을 생산하기로 했다. 사실 무채색 계열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전한 선택이다. 그렇기에 캐시미어에 색을 입히는 건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일이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숙련된 염색 장인 알레시오를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성공을 거뒀고 알레시오 역시 결과에 감명받았다. 거의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둔 데에 나 자신도 크게 놀랐다. 당시 내게 젊은이다운 무모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이후 수십년에 걸쳐 이 선택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우리의 제품을 선택해준 모든 사람에게 지금도 깊이 감사한다.
- 당신은 2020년 3월15일에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던 상황에서도 앞으로 2년간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전년도와 같은 수준의 급여를 보장하며, 거래처에도 가격 인하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나.
그날의 감정적 무게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동료들과 그들의 가족이 느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덜어줄 명확한 정보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들의 모습을 계속 생각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전세계가 극심한 불확실성에 놓인 시기에 자신감과 희망을 전하고자 모든 동료에게 서한을 썼다. 서한에는 누구도 해고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내가 ‘인본주의적 자본주의와 인간의 지속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불문율에 따라 공급업체에도 가격 할인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다.
- 영화를 보다 보면 책, 연극, 미술, 건축 등 문화예술 전반이 당신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을 지금의 브루넬로 쿠치넬리로 만든 문화적 경험에는 무엇이 있나.
연극과 예술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정신의 진정한 자양분으로 여긴다. 책은 언제나 내 삶의 길을 보여주고, 건축은 내게 조화로운 비전을 의미하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가장 큰 의미를 지닌 문화적 경험은 동서양 철학의 위대한 거장들과 만난 일이다. 공자의 가르침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장엄한 철학, 우리가 사랑하는 인문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상이 내게 영향을 주었다. 조토의 감동적인 아름다움과 비트루비우스 원칙의 완벽함, 레오나르도의 보편적인 천재성 역시 빼놓을 수 없다.
- 솔로메오에 인류 도서관을 짓는 등 문화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현재 진행 중인 문화 사업은 무엇인가. 그중 영화와 관련된 것도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유서 깊은 건축물, 내가 ‘우아한 변방’이라고 부르는 곳에 아름다움을 되찾아주는 일은 중요하게 여긴다. 가족 재단을 통해 지역의 미화와 재생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이유다. 그중 하나가 솔로메오에 짓고 있는 새로운 만민 도서관이다. 안타깝게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영감을 얻은 이곳은 전세계 모든 언어로 된 책을 최대 50만권 소장하는걸 목표로 한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도서관을 세우는 것은 공공 곡물 창고를 더 짓는 것과 같다. 정신의 겨울에 대비해 비축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이 도서관이 바로 그 의미를 구현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영화와 관련해서는 <브루넬로: 우아한 선구자>에 집중하고 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영화에 대한 반응을 접하고 있다. 이순간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다.
- 영화 취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영화관이 있나.
1960년대 영화관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그 시절에 관한 멋진 기억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영화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특별한 애착이 있는 오래된 영화들로 돌아가는 걸 좋아할 뿐이다.
- 당신의 영화 취향이 담긴 목록에는 어떤 작품이 들어 있나.
내 인생의 영화를 꼽으라면 다시 <시네마 천국>으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다른 어떤 영화보다 당시의 분위기를 잘 포착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탈리아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인생은 아름다워>를 어떻게 빼놓을 수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식 결혼>(1964)이 있고,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출연한 수많은 훌륭한 영화도 있다. <위대한 전쟁>(1959)과 배우 니노 만프레디의 영화들도 떠오른다. 니노의 영화들은 웃음 속에서도 무언가를 곱씹게 한다. 물론 훌륭한 영화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 일본에도 많다. 점점 더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도 빼놓을 수 없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오스카상을 마땅히 받을 만한 작품이었다.
- 일찍이 철학에 매료됐고 철학 분야의 명예학위도 받았다. 삶의 지표가 된 철학적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가.
철학과 사랑에 빠진 건 첫눈에 반한 것과 같았다. 당시 나는 도시 외곽의 한 카페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곳에서 두 학생이 철학적 주제를 놓고 활발하게 토론하는 것을 들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이 칸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호기심에 사로잡혀 인간 사상의 거장인 칸트의 저작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오늘날 칸트의 격언들은내 길을 밝혀준다. 그중 단 하나만 인용해야 한다면,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이 문장을 꼽겠다.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간성을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내 삶과 일에 북극성과도 같은 문장이다.
- <씨네21>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전문지로, 올해 창간 31주년을 맞았다. 여전히 매주 한권의 종이 잡지를 만드는 구성원들은 어떻게 하면 전통을 지키면서도 동시대적일 수있을까 하는 질문을 품고 일한다. 장인정신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온 당신의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종이 잡지를 계속 발행하기 위해 당신과 동료들이 기울이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패션 하우스 역시 뛰어난 장인정신과 품질을 지키는 동시에 여러 가치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자신이 하는 일의 방향을 결정하는 확신이야말로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 마지막 질문이다. 2026년 옷장에 꼭 들여야할 색 하나를 추천한다면.
화이트. 흰색은 다재다능하고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에 함께할 수 있으며, 언제나 끝없이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지금도 흰색을 깊이 사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