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가능한 사랑>을 관람하면서, 만약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했다면 무척 다르게 느꼈겠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영화관의 체험과 안방의 영화 경험을 비교하며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넷플릭스 관람 환경을 염두에 두고 만든 TV드라마적인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극장 개봉은 <가능한 사랑>의 제작을 둘러싼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도 예외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는 영화의 엔딩 시퀀스가 불러온 단순한 착각일 수 있다. 호철(설경구)과 미옥(전도연) 부부가 집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과자 안주에 소주를 먹다가 달을 바라보면서 대화한다. 이 장면은 오래된 드라마 속 한 장면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다. 카메라는 이들이 바라보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달을 포착하지만, 거기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인물에게로 돌아오지 않은 채 크레 딧을 올려 극을 끝낸다. 주인공은 카메라 뒤에 남겨진 채, 실종되고 만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관람했다면 그저 가족을 감싸면서 극을 끝맺는 적당히 온건한 마무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이한 듯 기이하지 않은 마무리는, 타이틀시퀀스와 통한다. 타이틀시퀀스에서 부부의 아들 철(정섶)은 운전 중인 자동차의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간다”라는 말과 함께 과자 봉지를 허공에 날린다. 카메라는 봉지의 느긋한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봉지가 도로 위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의 시각적 계산에 따르면 떨어진 봉지 가까이로 따라붙어야할 가족의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 과자 봉지가 땅에 덩그러니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그 주변을 스치는 자동차들이 보이지만, 이중 호철의 차가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겐 마치 가족이 탄 자동차가 별안간 증발해버린 것처럼 기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장면을 멈추거나 돌이킬 수 있는 넷플릭스를 통해 관람하는 동안에는 호철의 차를 명확히 분간하게 될 수도 있다. 영화관의 관람 조건 속에서 나는 그 순간을 실제보다 기이하게 느낄 자유를 얻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다름
조금 다른 측면에서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10>을 기억하며’라는 엔딩의 자막 역시 드라마적인 영화를 생각하게 한 조건이었다. <데칼로그>는 십계명을 각각 하나의 주제로 삼아 1시간 분량의 10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TV영화다. 영화와 시리즈라는 구획에서 후자에 속할 테지만, 명백히 영화인 작품을 떠올리며 관람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영화 체험에 서로 다른 이름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새삼 생각했다.
장르에 관한 생각은 영화에 내포된 다큐멘터리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가능한 사랑>은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에 관한 극영화다. 극중 인물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설정하면서, 관객은 두대 이상의 카메라를 인식하게 된다. 화면 내부에는 예지(조여정)의 카메라가 있고, 화면 바깥에는 이창동의 카메라가 있다. 예지는 때로는 촬영감독과 동행하고, 이들이 찍은 화면이 직접 인용되기도 한다. 두대의 카메라는 결국 두개의 다큐멘터리를 작동시킨다. 대기업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지의 다큐멘터리 옆에는 영화 만들기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대사로 표현되는 내용 외에 예지의 카메라가 무엇을 담고 싶은지가 생각보다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어느 새벽 풀숲에서 미옥이 울부짖는 호철을 지켜보며 눈물짓다가 돌아서는 순간, 예지의 카메라와 마주치는 장면을 돌이켜보자. 이들을 측면 에서 촬영한 이창동의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롱숏으로 강조한다. 예지의 위치 에서는 호철의 모습이 잘 담기지 않았을 것이고, 이를 지켜보는 미옥의 뒷모습만 담겼을 수있다. 예지의 카메라는 방금 우리가 본 상황이 영화를 위해 촬영된 장면임을 표시하는 도구일수 있다. 영화는 종종 두 카메라의 동조를 표시 하는데, 예지의 카메라가 처음 등장한 장례식 장면에서도 식당 한쪽에 고정된 카메라처럼 움직임이 없던 이창동의 카메라는 호철과 미옥이 음주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갑자기 핸드 헬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예지의 카메라 역시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핸드 헬드로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된다. 동기화된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예지의 카메라는 이창동의 카메라에 덧붙어, 촬영 중임을 알리고 카메라를 의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절정부를 장식하는 상우(조인성)의 별장은 증폭하는 카메라 공간으로 드러난다. 다중 모니터가 설치된 관리인의 공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중 모니터는 주로 상우와 호철이 산책하는 바깥을 향해 있으 므로, 카메라 한대에 의존한 예지와 호철의 인터뷰보다 더 큰 무게감을 지니게 된다. 예지의 카메라가 촬영자의 의도와 태도를 중시한다면, CCTV는 거기에 무엇이 비치는가가 더 중요한 매개다. 말없이 미소 띤 얼굴을 한 관리자는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카메라를 의인화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의 캐릭터는 감시, 비밀스러운 목격 등 부정적인 시선을 연상시키는 감시카메라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중화시킨다. 결국 모니터로서의 카메라는 대상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며, 이에 따라 달라지는 카메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도구다.
외설은 어떻게 성립하는
바다를 바라보던 미옥이 입은 옷을 하나씩 벗은 채 물에 들어가 수영하고, 상우 역시 뒤따라 들어오면서 미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이후 물 밖으로 나온 미옥은 다가오려는 상우에게서 벗어나 옷을 챙겨 입고는 황급히 숙소쪽으로 간다. 미옥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관리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드러나며 앞선 상황이 누군가에게 목격되었을 가능성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극 중 인물이 이 장면을 목격했 는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미 관객은 이 장면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예지의 카메라가 촬영 중임을 알리는 기능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니터 화면은 관객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잉여일 뿐이다. 모니터에 카메라를 지나치는 몸이 드러나자, 카메라는 곧바로 외설적인 것이 된다. 외설적인 것은 찍은 사람에게서 오는가, 카메라라는 물질에서 오는가. 찍히는 사람에게서 오는 가, 보는 자의 시선에서 오는가. 충격적인 순간이 주는 파동은 오래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편, 미옥의 수영 장면은 예지의 카메라라는 변명 없이 이창동의 카메라가 맨몸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옥이 옷을 모두 벗은 채 바다에 들어가 수영할 때, 이창동의 카메라 역시 물에 따라 들어간다. 그녀를 따라 뛰어든 상우의 움직임은 그저 미옥을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덧붙은 잉여적인 동작일 뿐이다. 카메라는 자신이 물에 뛰어들어 물살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물 바깥이나 물속이 아닌, 물의 표면에 머문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주인공이 물에 뛰어들면, 카메라도 물살을 맞으며 함께 젖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예지가 말한 사랑보다 상우가 말한 메서드 연기라는 표현에 더 걸맞을 수 있지만,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없는 카메라가 대상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혹은 존중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와 대상간의 거리
영화의 핵심은 계급 격차를 드러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와 대상간의 거리를 다루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예지의 카메라와 상우의 움직임처럼, 계급 격차는 이 거리감을 강조하기 위한 덧붙음처럼 보인다. 바꿔 말하면, 거리감을 조건으로 하는 카메라는 계급의 격차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를 바꿔내는 통로이기도 하다. 보통 카메라의 거리감이 곧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격차를 드러낸다고 말해지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주로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운용하는 예지는 촬영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대상에게 반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인물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는 예지의 얼굴은 거리감이 지닌 객관성의 환상에 균열을 낸다. 그것이 공감만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욕망과 관련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거리는 달과 인간의 거리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달과 인간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인간은 달에 친근함을 느끼곤 한다. 집에 돌아온 미옥은 달 사진을 찍어 예지와의 문자 대화창에 첨부 해두지만 보내지는 않는다. 전송되지 않은 달 사진이 아직 편집되거나 발표되지 않은 미옥 자신의 다큐멘터리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달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는, 그저 달일 뿐이지만 바라보는 얼굴로 인해 달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여주지 못한 것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마무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