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1973)은 니스의 촬영소에서 ‘파멜라를 소개합니다’라는 멜로드라마를 찍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감독 페랑(트뤼포 본인이 연기했다)은 영화 만드는 일을 서부로 가는 역마차 여행에 빗대며 처음엔 근사한 여행을 꿈꾸지만 얼마 못 가 목적지에 닿을 수나 있을지 걱정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같은 영화에서 페랑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촬영을 그만두겠다는 배우 알퐁스를 붙잡고 이렇게도 말한다. 영화는 인생보다 조화로워 막히는 구간도 죽은 시간도 없이 밤기차처럼 앞으로 달려갈 뿐이라고. 나는 오랫동안 두 대사 사이의 낙차를 음미했다. 스크린 위의 영화에는 죽은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 영화를 만드는 현장은 거의 죽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략 10년 전 촬영 현장 실습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국영화의 굵직한 폭발을 도맡아온 특수효과팀 데몰리션이 폭파 장면을 준비하던 날이었다. 대단한 광경을 목격하리라는 들뜬 기대는 금세 긴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현장의 태반은 기다리는 일이다. 조명이 자리를 옮기는 동안, 배우가 분장을 고치는 동안, 구름이 지나가는 동안 모두가 서성였다. 폭발은 몇초면 끝나지만 그 몇초를 위해 반나절이 흘렀다. 한번 무너뜨린 세트는 되돌릴 수없으니 기다림은 곧 확인의 시간이기도 했다. 기다림의 시간 안에도 다양한 결이 있다는 걸그날 처음 알았다. 하염없이 늘어진 시간이 아니라 단 한번을 위해 바짝 날을 세운 시간. 이후 인터뷰에서 폭파 버튼을 누를 때 모니터가 아니라 사람을 본다고 말했던, 데몰리션을 이끄는 정도안 대표의 눈빛이 아직 생각난다. 그날의 기다림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긴 기다림 끝의 짧은 인터뷰를 통해 알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비로소 느꼈다.
기다림의 끝에서 가끔 무언가 일어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 속 대사를 빌리자면 “방금, 지금, 무언가 일어났어”. 현장의 모두가 동시에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숨을 멈추고, 스태프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감독의 컷 소리가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오는 순간. <아메리카의 밤>의 고양이 장면이꼭 그렇다. 방문 앞에 내놓은 쟁반의 우유를 고양이가 핥아야 하는데 준비한 새끼 고양이가 끝내 연기를 거부한다. 몇번이나 고양이를 쟁반쪽으로 밀어놓아도 소용이 없다. 결국 스크립터가 촬영소에 사는 고양이를 데려왔고 녀석은 한참을 뜸 들이더니 기어이 우유에 입을 댔다. 이는 트뤼포가 <부드러운 살결>(1964)을 찍으며 실제로 겪은 소동을 옮겨온 장면이다. 영화는 결국 우연과 만남의 일이다. 촬영이라는 교차로에서는 날씨와 빛, 배우의 컨디션, 고양이의 기분까지 수많은 문이 닫히고 열린다.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건 항상 재미있다. 완성된 영화는 그 모든 기다림과 우연을 매끄럽게 지워버린다. 페랑의 말처럼 스크린 위에는 죽은 시간이 없기에, 지워지기 전의 시간은 현장에 가야만 볼 수 있다. 한편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아메리카의 밤>의 한 장면을 두고 “촬영장을 찾은 바깥사람들(남편과 연인, 투자자, 그리고 기자들)은 감독 의자 하나씩을 얻어 앉아 흐뭇하게 웃지만 끝내 그곳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반나절 기다려 본 걸로 현장을 안다고 할 순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현장에 가서 그곳의 공기를 전하려 한다. 보도자료와 메이킹영상이 현장을 대신 보여주는 시대에도 이 잡지가 30년 넘게 기자를 현장에 보내려고 공을 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완성된 영화가 지운 시간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바깥에서 기다리고 버티고 사람을 보며 버튼을 누르는 이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죽은 시간이 사라진 영화를 만끽할 수 있다. 이번주는 그시간을 대신 살아낸 사람들의 옆자리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