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트미러는 영상과 게임을 오가며 다종다양한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 누가 보아도 멜트미러의 것이라고 인식할 법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관철하며, 뮤직비디오 장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다. 밴드 실리카겔과 꾸준히 협업하면서 대표곡 <NO PAIN> <Mercurial> 등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에스파의 <Whiplash>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쇠 맛’이라는 특유의 수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얼마 전 연출을 맡은 아이돌 그룹 A2O LITE의 데뷔곡 <NEON> 뮤직비디오는 연달아 화제를 낳고 있다. 쾌감을 부르는 움직임의 절도와 멜트미러 특유의 질감이 종래의 케이팝 뮤직비디오에서 느끼기 어려웠던 감각을 선사한 것이다. 멜트미러의 작업실을 방문해 그만의 폭넓은 취향과 명확한 가치관을 긴 시간 들여다봤다.
- <NEON> 뮤직비디오를 포함해 매체를 불문하고 멜트미러의 스타일을 알아볼 수있는 요즘이다. 독창적인 스타일의 근원은 무엇일까.
‘쇠 맛’이라는 말로 묘하게 알려지기도 했었는데, 특별히 어떤 이미지를 노린다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선명한 표현을 좋아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단호함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뮤직비디오 생태계에서 감독의 스타일을 제대로 표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대부분 2회차나 3회차 만에 촬영을 끝내야 하고, 클라이언트의 요청과 현실적 제약도 다른 예술 장르보다 많은 편이다. 특정 인물은 왼쪽 얼굴만 찍어야 한다든지 하는 조건도 있을 정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감독의 연출 방식과 멀어지고 사소한 결정 하나하나가 계획과 멀어지게 된다. 영상을 만들면서 단호한 편집점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난 작업의 베이스가 아이돌 산업이 아니고 간헐적으로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보니 스스로 내 것을 지키기 위한 타협점을 찾아왔다. 구상한 컷을 관철하기 위해 그외에 다른 컷을 찍지 않을 때도 있고, 직접 촬영한 소스로 애니메틱스(영상 제작 과정에서 스토리보드와 음악 등의 요소를 실제와 비슷하게 만든 준비 단계의 영상.-편집자)를 다 만들어서 그대로 찍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렇게 감독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다 보니 밖에서 봐도 아는 스타일이 생겨났나 보다.
- 단호한 편집점. 멜트미러의 스타일을 일축하는 말인 것 같다. 컷이 구분되는 타이밍만 보더라도 멜트미러의 색채가 드러나니까.
아이돌 업계에선 꽤 싫어했다. (웃음) 컷이 어떻게 이어지고 운동감이 어떻게 연속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애니메틱스를 만들었는데, 소위 말하는 ‘때깔’이 종래의 그것과 다르니까 낯설어하더라. 다행히 <Whiplash> 뮤직비디오의 성과가 좋았고, 그 이후로 업계의 이해도가 높아진 것 같다. 단호한 편집점 같은 스타일에 관해서라면내 기질이 원체 강박적이란 이유가 있는 것같다. 뮤직비디오는 어쩔 수 없이 음악이 앞서고, 그 음악의 구조를 연출자가 파악해서더 잘 들리게 만드는 포맷이다. 음악의 가장 좋은 점을 힘있고 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작업인데, 다행히 내 단호하고 선명한 표현 방식이 그런 특성과 잘 맞물린 것 같다.
- 멜트미러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언급한 운동감이 끊이지 않고 완결된다는 인상이 강하다. <NEON>은 그러한 운동감을 곡, 안무와 함께 가장 적절히 배치한 사례로 여겨진다.
그간의 케이팝 뮤직비디오를 보면 액션의 미진함 같은 것이 종종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실 때 컵에 물을 담고, 손으로 컵을 집어 올리고, 물을 마시게 된다면 두 번째 단계쯤에서 움직임이 끝난 채 다른 맥락으로 튀어버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난 한움직임의 과정을 끝까지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큰 사람이고, 1-2-3-4의 순서를 제대로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 <NEON>에선 1-2-3…으로 이어지는 안무를 아예 숫자로 보여주지 않았나. 꼭 DDR(아케이드 리듬 댄스 게임) 같고 멜트미러의 작법이 표시되는 순간이라 흥미로웠다. 결과의 단호함은 작업 과정의 명확함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 이번 작업에선 TRPG(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 방식을 활용했다고.
실리카겔의 <Mercurial> 뮤직비디오를 작업할 때쯤부터는 게임 개발자로서의 성향을 더 가져오고 싶었다. TRPG엔 마이크로 스코프라는 룰이 있다. 일단 거대한 세계관부터 만들고, 그 역사의 시작과 끝을 정해둔 채 그 사이를 점점 파가면서 틈새를 채우는 방식이다. 크게는 시대, 사건, 장면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부터 정해야 한다. 이 범주를 영상으로 치환하면 장면은 말 그대로 하나의 컷이 되고, 사건은 한시퀀스가 되고, 시대는 더 큰 범위의 분기점이 된다. 내가 짜고 싶은 컷의 명분을 역순으로 추적해가는 절차로서 게임의 과정을 영상 작업에도 도입한 것이다. 좋은 회의의 새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통상적으로 뮤직비디오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레퍼런스 수집이다. 좋아 보이는 이미지나 영상을 다 다운로드해 모아놓고 이어 붙이는 작업부터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작업물은 결국 무언가의 아류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반대를 택했다. 아이데이션의 기반을 제작진이 창조한 세계관부터 시작해서 차차 정립하도록 잡은 것이다.
- <NEON>의 세계관은 어떻게 정립했었나.
팀명이 A2O LITE이고 제목도 <NEON>이다. 가사를 읽으면 계속 어딘가에 올라간다는 상승감이 돋보인다. 어떤 곳을 향하여, 가장 작은 불빛에서 가장 큰 불빛까지 도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통형 탑을 무대로 수직 상승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탑의 층별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마지막에 이르면 완전한 외부로 나오게 된다는 큰 맥락을 잡았다. 최종적으로 탑의 형태와 수직성은 다소 희박해졌지만, 어두운 실내 공간에서 환한 실외로 나오게 된다는 첫아이디어의 전반적 흐름은 유지했다.
- 멜트미러의 작업에서 금속성을 빼놓을 순없다. 단호한 성정에 어울리는 질감인 것일까.
그 부분은 나도 궁금하다. (웃음) 처음 그런 인상을 준 것이 <Mercurial>인 것같고, 다음은 <Whiplash>였던 듯하다. 각 팀이 원하는 방향성과 잘 맞아떨어진 경우다. 에스파는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길 원했고, 스타일링이나 음악 모두 금속성과잘 어울렸다. 촬영 기기가 주로 쓰이는데, 이건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직전에 한작업이 산산기어라는 브랜드의 30초짜리 영상물이었고, 현장에서 로봇 팔을 조종하는 기사님의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간이 테이블을 만들어서 모니터와 컨트롤러를 층층이 쌓아두고 작업하시는데 그 비주얼이 상당히 멋있더라. 촬영 장비들의 매력을 언젠가 발산하고 싶었고, 마침 <Whiplash> 뮤직비디오를 만들게 됐다. 촬영 장비 활용을 설득하기 위해서 떠올린 방안이 있었다. 촬영 장비는 대부분 직접 구동해야 하고 패닝하거나 틸트하는 등의 특정 메커니즘이 있다. 이런 움직임의 종류를 멤버별로 매칭해서 뮤직비디오 전체의 규칙을 설정해버렸다. 카리나에게는 수직의 움직임을, 닝닝에게는 틸트를 맡기는 식이었다. 누가 등장하는지에 따라 영상의 운동감과 리듬이 정해지는 룰을 만든 거다.
멜트미러가 그린
- 금속성과 단호한 편집점으로 만드는 리듬이라고 하니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호수의 란슬로트> 같은 영화가 곧바로 생각나기도 한다.
왠지 종종 듣는 평이지만 브레송이라니 얼토당토않다. (웃음) 스스로 찾은 공통점이라면 사람의 손에 집중한다는 정도인것 같다. 손가락이 10개 있으면 아주 많고 다양한 제스처가 나올 수 있다. 대부분의 행동이 손에서부터 시작되니 손에 집중해 찍거나 손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영상언어를 단순히 말해 운동감이라고 생각한다. 운동감의 연쇄이고 그것이 잘 조립되어 우리 눈에 시각적 단서를 좁히거나 넓힐 수 있다면 영상을 끝까지 보게 된다고 믿는다. 어떤 액션의 덩어리가 이쪽으로 향했다면 다음 컷의 시작점도 반드시 이곳이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편집한다. 자칭 ‘눈이 편안한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 <NEON>은 특히 손에 결부된 안무가 많다. 시작 부분부터 두 멤버(아이찡, 시리)의 손끝이 움직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카메라가그 속도에 맞춰 움직이며 손에 집중한다. 멜트미러의 작업을 보면 카메라와 액션이 합치하는 순간이 잦은데, 둘 중 어떤 요소가 우선시되기를 바라나.
속마음으론 카메라가 미리 위치하고 액션이 따라와주기를 바란다. 기다림의 위치를 적확히 잡는 것이 예리한 예술가의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촬영할 때도 그런 순간에 무척 기쁘다. 한 인물을 팔로잉하다가도 불현듯 카메라가 어떤 위치를 선점하면 되게 좋은 장면이 찍힐 것 같다는 예감이 들 때가 있다. 다만 뮤직비디오 신의 연출자들은 이러한 숏의 가치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군무를 다담아야 하고 6K, 8K 촬영이 가능해지다 보니 일단 넓은 숏을 찍은 뒤 나중에 확대하거나 잘라버리는 방식을 써야 할 때가 많다. 이런 방식을 지양하고자 현장에서 카메라가 들어갈때 들어가야 한다는 관점으로 작업 중이다.
- <Whiplash>의 촬영 장비, <NEON>의 실과 구슬 등 다양한 오브제의 활용도 멜트미러의 특징이다. 오브제의 활용엔 어떤 기준이 있나.
이 대목이 브레송의 방식과 꽤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인물이나 물건을 방치하지 말자는 점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가끔 다른 뮤직비디오를 보면 어떤 물체가 나와도 그저 순간의 예쁨을 위해 소비되는 경우가 있다. 기능 없는 물체가 휘발되기만 하고 결국은 ‘내가 뭘 봤지?’ 하는 이상한 잔상만 남게 된다. 오브제에 특별한 상징을 두진 않더라도이 영상을 봐야 하는 운동감에 관한 근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이 오브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NEON> 뮤직비디오의 흐름을 구상하며 처음 고안한 아이디어가 실뜨기였다. 실뜨기로 만들어진 물체가 빛의 덩어리가 되고 구슬이 되어 굴러가면서 연속적인 운동감을 만드는 방식이다.
- 오브제를 텅 빈 물체가 아니라 시각적 내러티브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게임 개발에 몰두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지마 히데오 등 동시대 활발한 게임 디렉터들의 성장 배경에 영화가 있듯이 나도 영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게임에서 찾고 싶었다. 영상의 대안점이라거나 영상 매체 이후의 새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영상에 집착하는 것이 창작력을 퇴보시킬 수 있음을 느꼈고, 영상 기반의 비디오게임에서 보드게임과 TRPG의 세계로 넘어가게 됐다. 게임의 성립 조건은 시각 매체로서의 전제 이전에 특정한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더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것 같았다. 게임을 흔히 즐거움이나 오락의 매체로 여기지만, 근본적인 심리 요소는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해소할수 있는 정도로 던져주면서 해결의 쾌감을 극적으로 선사하는 것이다. 닫힌 메커니즘 속의 다양한 변수를 통해 균일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영상의 다음 단계라고 여겼었지만, 지금은 아예 다른 지점에 있는 매체라고 느낀다.
멜트미러가(의) 가장….
멜트미러는 게임과 영상 작업자로 유명하지만, 만화 · 서브컬처 · 영화 등 여러 예술 분야의 마니아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그의 취향을 살피기 위해 몇 가지의 옵션을 질문으로 던졌다.
➊ 만나고 싶은 영화감독은?
“짓소지 아키오. <울트라맨> 시리즈 중 <울트라 세븐>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터라, 그분이 지닌 영상의 경직성에 관해 대화해보고 싶다. ‘짓소지 앵글’이라는 말이 생겼을 만큼 안노 히데아키 등후대 창작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실리카겔의 <Kyo181> 뮤직비디오를 작업할 때 큰 영감을 받기도 했다” (기자는 이후로 40분 넘게 <울트라 세븐>에 관한 상찬을 들었고 함께 작품을 보며 이야기했지만, 지면에 다 옮기지는 못했다.)
➋ 자극받은 뮤직비디오는?
“조너선 글레이저가 연출한 뮤직비디오를 되게 좋아하고, 그 시절에 만든 것 중 기네스 광고 영상 <Surfer>를 작업하면서도 자주 본다. 엄밀히 말해 뮤직비디오는 아니지만, 조너선 글레이저 스타일의 집약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➌ 좋아하는 만화는?
“가장 좋아하는 것을 뽑기는 너무 어렵다…. 최근에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권하는 작품은 마쓰모토 다이요의 <동경일일>이다. 아, <동경일일>도 걸작이지만 <넘버 파이브>가 최고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판단 지점을 넘어설 정도의 무엇….”
➍ 추천하는 게임은?
“<씨네21> 독자들께는 <켄터키 루트 제로>를 추천하고 싶다. 포인트 클릭 어드벤처 장르로 클릭으로 단순히 진행하는 게임인데, 특유의 무드가 엄청나서 아주 시네마틱한 게임이 아닐까 싶다. 전반적인 실루엣과 조형감, 카메라의 활용 방식이 정말이지 탁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