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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의 꽃 - 복잡한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열망들

여섯 번째 키워드 - 미래의 이야기(들)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가 마지막 글을 내보낸다. 지금까지 이 연재는 6개의 키워드를 횡단해왔다. 24편의 원고가 씨줄과 날줄을 엮어가며 하나의 몸체를 만들었다. 실은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 ‘생태 변이’, ‘전승된 몸짓들’을 지났고, ‘미래의 이야기(들)’가 그 끝을 맺는다. 마지막 글은 이도훈 영화평론가의 몫이다. ‘미래의 이야기(들)’라는 주제에서 21세기 전후로 나타난 다양한 이야기의 방식을 다뤘다. 멀티버스를 비롯한 복잡성 서사가 어떤 배경에서 등장했으며 왜 지금의 대중에게 소구하는지를 밝힌다.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는 잠시 이렇게 항구에 정박해 닻을 내린다. 다만 ‘시네마 오디세이’라는 이름의 항해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예정이다. 오디세이라는 모험의 핵심은 귀향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꽃

복잡한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열망들

<펄프 픽션>

1990년대 이후 대중영화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다룬 작품들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이 흐름은 1970년대 이후에 나타난 포스트 클래식영화를 계승한 것처럼 보였다. 소위 말하는 클래식영화가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 명확한 인과관계, 목표 지향적 인물을 바탕으로 작품 전체에 연속성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포스트 클래식영화는 연출자의 개성과 영화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파편성, 비선형성, 불연속성이 두드러진 서사구조를 구축한다. 시작과 끝이 명확한 단선적인 구조 속에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끝이 어딘지를 모르고 옆길로 새거나 특징 지점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고전적인 서사구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 결과 과거 실험영화나 예술영화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복잡한 플롯은 대중영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고급예술로서의 영화적 전통과 대중예술로서의 영화적 전통이 뒤엉키면서 나타난 이 현상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대중영화는 교양 있는 지식층의 문화적 취향을 반영하는 중간 예술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포스트 클래식을 창의적으로 계승하고 변주한 대표적 감독으로 꼽힌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저수지의 개들>(1992)과 후속작인 <펄프 픽션>(1994)은 범죄영화의 장르적 관습에 따라 ‘누가 그랬는가?’(who done it?)를 추적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의 두 영화는 에피소드적으로 구분되는 챕터들을 비선형적으로 배열하는 블록 구조(block construction)와 함께 특정 장면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를 서서히 드러내는 그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통해서 누가 ‘어떻게 그랬는가?’(how done it?)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혹자는 <펄프 픽션>이 거둔 서사적 실험, 199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약 850만달러의 제작비를 투여하여 2억1300만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점을 종합하여, 이른바 ‘타란티노 효과’(Tarantino effects)로 불릴 만한 새로운 흐름이 영화산업을 한 차례 휩쓸었다고 평가한다.

타란티노 효과는 심오한 주제를 복잡한 형식으로 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목숨이 판돈으로 오가는 순간에도 중단 없이 이어지는 진지하면서도 실없는 대사, 인물의 심리를 파악하기 힘든 무표정한 얼굴, 이야기의 전후 관계를 추론하기 힘든 복잡한 서사구조는 타란티노의 인장과도 같다. 이러한 특징들은 타란티노의 영화가 비선형적인 서사 구축만을 맹목적으로 쫓지 않고 진지한 이야기를 복잡한 형식 안에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타란티노, 폴 토머스 앤더슨, 리처드 켈리, 스파이크 존즈, 짐 자무시, 웨스 앤더슨 등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서 아이러니, 허무주의, 비선형성을 발견한 제프리 스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란티노 효과는 ‘스마트 필름’(smart film)을 낳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소 거친 번역을 허락한다면, 타란티노 이후로 대중영화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똑똑한 영화’에 대한 열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셈이다.

영화학자들은 이처럼 진지하고, 난해하고, 복잡한 영화들에 적절한 이름을 붙이기 위해 골몰했다. 파편화된 시공간적 현실, 시간의 순환과 반복, 다양한 층위의 현실들 사이의 모호한 경계, 불안정한 인물의 심리, 기억상실과 정체성 혼동, 미로 같은 플롯,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가 등장하는 일련의 영화들은 갈림길 서사(forking path narratives), 모듈 서사(modular narratives), 데이터베이스 서사(database narratives), 네트워크 서사(network narratives), 마음 게임 영화(mind game films)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시간이 흐르며 이 다채로운 용어들은 복잡성 서사(complex narratives) 내지는 퍼즐 필름(puzzle films)으로 수렴되었다. 여기서 퍼즐 필름이란 현실의 이질적인 측면들과 평행하고 상호연결되는 이야기들을 포섭함으로써 작품 속 이야기의 세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은 주로 비선형적 시퀀스, 플래시백의 탈선형적 재배열, 인과론을 벗어나는 우연한 사건들의 전개, 평행적인 에피소드들의 차이와 반복을 활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롤라 런>(1998), <슬라이딩 도어즈>(1998), <매트릭스>(1999), <식스 센스>(1999), <파이트 클럽>(1999), <메멘토>(2001), <이터널 선샤인>(2005), <셔터 아일랜드>(2010), <인셉션>(2010), <소스 코드>(2011) 등이 있다. 한편 퍼즐 필름의 유행은 디지털 장비와 인터넷 중심의 뉴미디어 환경이 구축되면서, 영화를 다시 보거나 특정 장면만을 골라보는 관행이 정착함에 따라 더욱 가속화되었다. 역사적인 우연인지 몰라도, 포스트 클래식, 세기말 전환기, 포스트모더니즘, 디지털 전환기와 맞물려 출현했다는 이유로 퍼즐 필름은 영화의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예비하는 양식처럼 인식되고는 했다.

그런 면에서, 복잡성 서사에 관한 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의 미래’(Film Futures)는 그 제목에서부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 이 글은, 현실을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로 보는 ‘가능세계’ 내지 무한한 우주를 상정하는 ‘평행세계’의 원리를 적용한 작품들의 서사적 양식을 ‘갈림길 서사’로 지칭하고 그 특징을 분석한다. 여기서 갈림길은 현실이 복수의 가능성으로 분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가령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진실을 알려주는 빨간 약과 진실을 잊은 채 살게 만드는 파란 약을 놓고 고민하다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네오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가능성, 이야기, 세계가 펼쳐질 수 있듯이 우리의 삶 역시 수많은 가능한 현실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보드웰은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맹목적인 기회>(1981), 피터 호윗의 <슬라이딩 도어즈>, 톰 티크베어의 <롤라 런>, 위가휘의 <넘버원이 되는 법>(1997)을 예로 들면서, 갈림길 서사는 선형적이고, 방향성이 명확하고, 특정 지점에서 교차한 뒤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결말로 통합되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보드웰이 말하는 바의 핵심은 갈림길 서사를 적용한 영화들이 보르헤스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무한히 확장하는 대신 두세개 정도의 갈림길만 허용하면서 그마저도 하나의 결말로 합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갈림길 서사를 적용한 영화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인지적으로 다루기 쉽게 다듬는 온건한 실험을 시도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퍼즐 필름의 공식은 ‘플롯은 복잡하되 이야기는 단순하게’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의 단순성은 관객의 몫이다. 퍼즐 필름 관객이 느끼는 즐거움은 이야기의 미로를 빠져나오면서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찾아오는 지적 희열에 찬 탄성에 있다.

영화의 미래에 대한 보드웰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이후로 영화계 안팎에서 매체와 장르를 넘나드는 상호매체성에 대한 실험과 함께 트랜스미디어적인 스토리텔링이 유행처럼 번졌다. 영화와 뮤직비디오 사이에서 일어난 매체적 또는 장르적 소용돌이를 예로 들 수 있다. 2000년대 전후로 데이비드 핀처, 미셸 공드리, 가스파르 노에, 마르코 브람빌라와 연출자들은 뮤직비디오와 영화를 넘나들면서 특정 모티브를 반복하거나 순환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연속성의 서사를 무너뜨렸다. 미셸 공드리는 자신의 뮤직비디오에서 비선형적인 시간성과 이에 기반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그가 연출한 케미컬 브러더스의 <Let Forever Be>(1999)와 카일리 미노그의 <Come Into My World>(2002)의 뮤직비디오 모두 일상의 현실이 여러 가능성으로 분기되고 그것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풍경을 담아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외에도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다른 세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공드리의 상상은 훗날 <이터널 선샤인>으로 결실을 맺는다.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우려는 한 남자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겪는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추억과 후회에 잠긴 주인공이 과거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시간에 대한 영화적 실험으로 풀어냈다. 그런 점에서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에 관한 기억의 불일치와 시간 여행을 영화적으로 시도했던 알랭 레네 감독의 21세기적 변주라고 평가할 만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잡성 서사가 현실의 불확실성 혹은 불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가? 우리는 삶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가? 영화는 현실에서의 시공간을 분절하고 그 파편을 재구성하는 조립의 예술이다. 일부 영화들은 더 나은 현실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타임루프나 타임슬립과 같은 시간 여행의 방식으로 다루었다. 지금 이곳과 다른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사변적 상상은 멀티버스를 소재로 한 영화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멀티버스는 우주가 단 하나의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에 걸쳐 다층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소중한 대상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서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극복하는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일례로 <어벤져스> 시리즈는 외계 존재가 지구에 침공할 것이라는 불안에서 시작하여 절대적 악 타노스와의 대결, 그리고 초토화된 우주를 되돌리기 위해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모험을 떠나는 과정을 다룬다. 이 시리즈가 만들어지는 시기를 전후로 멀티버스는 복잡성 서사와 결합하여 대중문화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나 열성 팬덤을 등에 업은 미디어 콘텐츠들은 특정 세계관을 재생산하거나 확장하는 데 경쟁적으로 매달렸다. 이에 대한 수용자들의 태도 또한 복합적이었다. 그들은 복잡한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고, 백과사전적인 정보를 수집 및 해독하고, 나아가 거대한 세계관의 구축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 대중영화에서 지속된 서사에 대한 실험은 복잡성에 확장성을 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사이 에피소드적인 구성이나 챕터별 구획 방식은 다소 뜸해졌고, 시간 여행으로 시공간을 조작하거나 멀티버스로 세계관을 구축하는 방식도 어느덧 진부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렇다면 서사의 실험을 구심점 삼아 진화하리라 믿었던 영화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이제 효력을 다한 것일까? 다시 보드웰의 관점을 빌리자면, 서사는 대중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복잡성 서사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복잡한 플롯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한 삶 그 자체다. 복잡성 서사의 유행이 끝나도 서사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서사를 통해서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열망이 계속되는 한 서사에 대한 열망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의 꽃을 피우는 것은 이야기이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편집위원들의 코멘트

이도훈 영화평론가

우리는 아직 21세기 영화의 역사를 완성하지 못했다. 고작 사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한 세기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무모한 기획에 참여하게 된 것은, 현행 영화사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하루빨리 정립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아울러 영화의 죽음, 디지털 영화, 인공지능 영화와 같은 거대 서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변화된 영화적 열망들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오늘날 영화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경험하며 영화적 관념을 펼쳐놓는다. 그들은 영화관, 영화제, 잡지, 연구서, 인터넷 커뮤니티, 소셜 네트워크 등을 배회하면서 저마다의 취향과 교양에 맞는 장소에 닻을 내리는 항해자에 가깝다. 갈수록 세분화, 전문화, 주변화되는 그들의 영화적 감각은 때로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다행히 그들의 영화 문화는 배타적이지 않다. 계산적인 이해득실보다 문화적 가치로서의 영화를 늘 먼저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인들은 각자의 대기실에서 저마다의 영화사를 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들 각자의 영화적 감각이 충돌하고, 협상하고, 화해하여 공통의 영화적 감각을 형성할 그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며 적어 내려갈 페이지도 많이 남아 있다. 영화에 관해 말하고 노래하는 그대들의 목소리가 언젠가 완성될 역사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란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21세기 영화에 새롭게 나타난 하나의 특별한 피사체를 거론하고 싶다. 그것은 식물이다. 어느덧 영화에선 식물학자들이 빈번히 주인공으로 등장하고(라우라 시타레야의 <트렌케 라우켄켄>, 시로 게라의 <뱀의 포옹>) 울창한 식물로 뒤덮인 숲과 정글이 배경으로 나타나곤 한다(아피찻퐁 위라세타꾼과 알랭 기로디의 식물적 장소들). 인간의 존재를 압도하는 거대한 나무(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인간과 세계의 작은 기적을 증언하는 풀잎과 꽃(장뤼크 고다르의 <아워 뮤직>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에 이르기까지. 20 세기가 동물의 움직임을 조직하는 것으로 작동하던 영화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식물의 보이지 않는 기척을 카메라에 담아낸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면 왜 식물인가? 이는 식물에 담긴 이중적인 시간성 에 있다. 카메라 앞에 놓인 식물은 분명 우리가 관측 한 적 없는 과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식물은 새롭 게 태어나는 현재형의 운동으로 삶을 지속하는 존재 이기도 하다. 과거의 계승과 현재의 생성이라는 모 순적인 운동이 식물에 깃들어 있다. 21세기 영화를 말하는 것은 누락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의 조건을 검토하며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다. 식 물은 멈춰 선 자리에서 그 모든 절차를 통과하는 모 래시계의 이미지다. 이 고요한 곳에 새로운 영화를 말하는 일의 어려움과 21세기 영화가 돌파해야 할 과업이 담겨 있다.

이우빈 기자

“복잡한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열망들.” 이도훈 영화평론가의 이번 글 제목은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연재의 끝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 보인다. 결국은 열망의 문제다. 지금은 21세기가 이제 막 사반세기를 지났을 뿐이며, 사람의 생애주기로 친다면 막 성인이 된 시기이다. 어떠한 이야기로 영글기엔 때 이른 시점이다. 그럼에도 1년여에 걸쳐 ‘21세기 영화’의 지대를 파헤치려 한 이유는 열병에 가까운 비평의 열망 때문이었다. 20세기의 평자들은 침묵하는 일 역시 비평의 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짚었었다. 다만 21세기의 양상은 다르다. 침묵 자체가 권위가 되던 시절은 지나갔다. 작동 방식과 결과물의 방향성에는 이견이 있겠지만, 최소한 ‘왜 침묵하(되)는가?’에 대한 이유라도 꺼내야 비평의 톱니바퀴가 움직일 법한 현재다. 영화와 영화비평은 이제 영화의 안이든 밖이든, 표면이든 외계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그 존재 의의를 스스로 탐닉하지 않고서는 서 있기 어렵다. 연재의 첫 글에서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밝힌 문장으로 그 이유를 갈음한다. “영화와 세상 사이에서 안과 바깥을 질문하는 대신에 이제는 항상 영화가 세상 안에 있음을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긍정하고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세상을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영화의 새로운 윤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