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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4)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아임 낫 매드 앳 유

미니애폴리스. 코언 형제의 <파고>의 도시. 어리석음의 눈덩이가 설원 위를 굴러가는 동안 아무래도 가장 멋졌던 건 임신한 경찰관 마지(프랜시스 맥도먼드)였다. 2026년, 다시 미니애폴리스. 이제는 러네이 니콜 굿의 도시. 37살 여성, 시인이자 레즈비언, 세 아이의 엄마,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세관집행국(ICE) 요원 조너선 E. 로스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현대영화가 진실의 다각성을 섬세하게 다루고자 천착할 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잔혹한 편집점으로 대중을 시험한다. 지난 주말엔 전세계 SNS 사용자들에겐 핸드폰으로 촬영된 미니애폴리스 도로 위의 상황이 다른 사람, 다른 각도, 다른 시점에서 담긴 파편화된 푸티지로 당도했다. 첫 번째 영상. 전경 숏. ICE 요원들이 앞뒤로 러네이의 차에 접근하며 누군가는 내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러네이의 차는 멈춰 서 있다가 요원 한 사람이 창문 열린 운전석 안쪽으로 손을 뻗어 차를 붙잡자, 뒤로 후진했다가 도로 진입 방향으로 전진한다. 두 번째 영상. 흔들리는 핸드헬드. 러네이의 파트너인 레베카 굿이 차에서 내려 한 요원을 촬영하며 말한다. “굳이 싸우자는 거예요? 가서 점심이나 드시죠, 형씨. 가시라고요!” 이 두 영상을 근거로 트럼프 행정부는 러네이와 레베카의 차가 ICE 요원을 공격하려 했으며 두 사람이 요원들을 방해하고 조롱했다는 메시지를 전파 중이다. 그리고 공개된 세 번째 영상. 이번엔 운전석에 앉은 러네이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사건 현장에서 찍힌 피살 직전의 영상이다. “괜찮아요, 친구! 난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That’s fine, dude. I’m not mad at you.) 이후 차가 움직이고 앞쪽에 서 있던 조너선 로스가 러네이의 얼굴을 향해 총을 두번 쏜다. 누군가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그릇된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누군가는 안심하기 위해 각자의 보기 체계 안에서 이 영상들을 판독했고 나도 그중 하나다. 충격적인 자극에 포획된 것은 아닌지 자문하면서 무언가 찾으려 애썼다. 그러니까 증거 같은 것을 찾고 싶었다. 러네이가 완전히 억울하게 당했다는 분노를 위한 증거? 아니면 반대로 그들에게 최소한의 총격 집행 사유가 있었다는 합리성의 증거? 무의식의 진위를 판별하기에 앞서 절망감이 앞섰다. 무력한 장면 분석이 남긴 것은 두 가지다. 우선 러네이 니콜 굿은 웃고 있었다. 빛이 날 정도로 차분하고도 완연히. 현장의 긴장감이 고조되자 상황을 완화해보려 택한 제스처였을까.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 두려움이나 복종의 표현과는 달랐다는 사실이다. 이후 러네이의 차가 ‘자기쪽으로 향한다고 판단했다고 알려진’ ICE 요원의 첫 총성이 들린다. 이미 총에 맞은 운전자의 차가 도로 진행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분명한 상황인데도 요원은 몸을 돌려 차를 따라가면서 운전석을 한번 더 겨냥한다. 두번이나 총을 쏘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남자의 욕지기가 영상에서 정확히 들린다. “퍼킹 비치.” 그러니까 두 번째 격발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다. 아임 낫 매드 앳 유, 당신이 위협함에도 나는 당신을 해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공표 앞에서 어느 ICE 요원은 격분한 것이다. 피해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전술로써 정체성에 집착하는 보수언론을 지켜보며 두려워졌다. 영화를 경유해 현실의 의제를 보다 깊이 감각하고 발화하는 이들에게 이 비극은 다른 의미로 당혹스럽다. 기시감이 짙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해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신나게 즐긴 후다. 현실을 모방하는 영화가 시차를 두고 역사의 과오를 사후적으로 진단한다는 통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너무 길게 썼다. 한마디로 현실의 육중한 퇴보다. 미국 <폭스 뉴스>는 러네이 니콜 굿을 설명할 때 시인이라는 단어 앞에 ‘자칭’(Self-proclaimed) 혹은 ‘이른바’(So-called) 같은 조롱 섞인 표현을 썼고, 성적 지향을 강조하며 그가 전통적 가치관에 반하는 인물임을 암시했다. 미소지니가 뒤섞인 이 미묘한 조작을 통해 곧장 “위협 앞에서도 시적인 대사를 읊으려다가 비극을 자초했다”거나 “깨어 있는 척하려다 역시 호되게 당했다”는 식의 온라인 혐오가 따라붙었다. 혹자는 백인 민족주의 운동에 가깝게 극단화되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이 러네이와 같은 백인을 이토록 빨리 소외시키는 형국이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연한 수순이다. 러네이 니콜 굿은 백인 여성의 정상성 모델을 따르지 않으며, 시를 쓰고 여성과 결혼하고 정치적으로 리버럴한 성향을 공표한 시민 활동가다. 오히려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 마가의 이상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위협적이다. 영화라는 작은 국가의 시민 중 상당수는 인종, 젠더, 성지향성과 정체성을 막론하고 대개 이상하며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의 친구다. 훌륭한 주인공들이 높은 확률로 자연스럽게 가지는- 그저 평범할 뿐인- 특성들을 나열한다고 가정해보자. 예술가이고 퀴어이며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하고 부조리에 저항적이며 때로는 매우 감상적이라는 형용은 높은 확률로 중복 적용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부당한 권력에 미소 짓는 시인’ 캐릭터는 뻔해서 당대 작가들에게는 외려 채택되지 않는 인물일 확률도 높다. 친절하고, 불합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적 자질이 시스템의 폭력을 무마한다는 결말을 상상하면 너무나 당연해서 도통 재미가 없고 교조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지난 주말 영화 세계 밖에서 우리가 목격한 결말이 선고한다. 배부른 감상입니다. 다시 <파고>의 관찰자에게로 돌아가본다. 러네이 니콜 굿의 시간과 겹쳐보는 상상이다. 지역사회의 비극 앞에 제각기 다른 반응을 내보이는 동료들 사이로 ‘시나 쓰는 연약하고 고집스러운 퀴어 여성이 법 집행 현장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떠돈다. 마지의 좋은 이웃도 러네이의 죽음이 그 자신의 업보였다고 믿으며 안심하는 것 같다. 귀가 후 텔레비전을 틀자 사건 현장을 담은 혼란스러운 영상 조각들이 짜깁기되어 나오더니 이윽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 시위대의 풍경도 다뤄진다. 그리고 채널을 돌리는 남편. 평온하기 그지없는 자연다큐멘터리가 이어진다. 마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거리로 나간다. 시위대를 지나치고 (어쩌면 합류하고) 영화관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걸작도 졸작도 아닌 평범한 영화 한편이 상영 중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시적인 대사를 읊는다. “난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 마지는 너무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건넬 때 적어도 죽임을 당해선 안된다고 그제야 확신한다. 멍하니 영화를 본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스크린의 뒷면 - 영화 속 스크린의 잠재적 가능세계들

2000년대를 여는 에드워드 양의 첫 영화이자 그의 유작으로 남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 프레임에 붙잡힌 인물들은 비슷한 증상을 공유한다. 그것은 기억상실이다. NJ는 무엇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왔는지 잊어버린다. 그의 딸 팅팅은 버려야 할 쓰레기를 발코니에 두고 그만 잊어버린다. 피로연에 참석한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NJ와 셰리의 재회를 목격하고는 내려온 목적을 잊어버린다. 어지럽게 뒤얽힌 삶의 회로 속에서 그들은 자꾸만 기억을 잃는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삶의 조건이 부서지는 위태로운 신호이기 때문이다. NJ와 셰리가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며 도쿄를 여행하고 있을 때, 타이베이에 있는 팅팅은 친구의 남자 친구인 패티와 첫 데이트를 한다. 에드워드 양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두 장면을 평행편집으로 교차한다. 기억상실로 채워진 <하나 그리고 둘>에서 이 순간은 이례적인 기억의 재구성과 반복을 형성한다. 이때 팅팅과 영화를 보고 나온 패티는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를 건넨다. “영화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세배로 늘었대. 영화를 통해 삶을 두배 더 경험한다는 거지.” NJ의 재회와 팅팅의 만남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도쿄에서 돌아온 NJ는 셰리를 기억하는 대신 컵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다. 과거는 지워지고 기억상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만 <하나 그리고 둘>은 패티가 건네준 말처럼 두 사람의 실패한 사랑을 교차하며 평행편집의 계열 위에 또 다른 가능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화면에는 재회에 실패하는 NJ의 시간과 첫사랑에 실패하는 팅팅의 시간이라는 두 가지 실패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오가는 세 번째 영화의 시간이 있다. 영화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만 또한 실패를 통과한 세 번째 삶의 시간을 조직한다. 이 시간 속에서 각각의 세계는 겹치게 되고 한 가지 시제가 갖는 위상은 분명치 않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불명확한 위상을 비추는 또 다른 영화의 시간이 있다. <하나 그리고 둘>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완성된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는 독특한 회고의 목소리로 영화를 시작한다. “여자는 하오하오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는 늘 그녀를 쫓아다녔다. 여자에게 전화하고 돌아오도록 애원했다. 여자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항상 돌아왔다. 이 일은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다. 세계는 21세기를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고 있었다.” 도입부의 화면 속에서 비키는 다리 위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이따금 뒤를 돌아본다. 비키는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그녀’로 부른다. 이제 막 스크린에 펼쳐지기 시작한 현재는 이미 그토록 낯선 것이 되어 있다. 뒤엉키고 분해된 기억과 시간을 조직하며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21세기 영화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전해준다. 영화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장력 아래 놓여 있으면서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향하는 비키의 매혹적인 몸짓은 21세기 영화의 위치를 규정하는 알레고리적 신체가 된다. 영화의 비키의 발걸음을 따라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아리타는 자신의 몸을 철사로 감아 검지를 바깥으로 뻗는 손짓을 남긴다. 언젠가 아리타는 동료인 니무라에게 그 손짓이 앞으로 ‘가라’는 신호라고 말해준 바 있다. 철사로 묶어 자살한 아리타의 신체는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에 주박되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열차가 도착하는 것처럼 영화는 한번 시작하고 나면 뒤로 돌아갈 수 없이 끝에 다다라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우회하고 탈선하며 다른 방향을 돌아보는 가능성을 또한 간직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가 화면 외부에 펼쳐진 폭력적인 세계와 접합해 있고 원리적으로 거기서 도망칠 수 없는 매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기반 뒤에 따라오는 21세기 영화란 그 원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매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의 영화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펼쳐진 세계의 매혹이 파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1세기의 영화는 선명한 소명에 몰두하는 고전주의적 영웅과 반영웅의 영화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도착지과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자들이 무기력한 자세로 뒤를 돌아보는 영화도 아니다. <밀레니엄 맘보>의 도입부를 묘사하며 말했듯이 21세기 영화는 주어진 자세를 비틀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로부터 오는 정반대의 명령에 붙잡혀 있다. 세계에 철저히 몰입하는 동시에 세계의 의미와 좌표를 되짚기 위해 영화가 고안한 것은 스크린 위에 펼쳐진 영화적 세계 내부에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는 또 다른 형태의 스크린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과 <밀레니엄 맘보>는 영화관의 스크린, 텔레비전과 CCTV 화면, 카메라와 촬영된 사진 이미지, 컴퓨터 모니터로 화면 내부를 빼곡히 채운 영화들이기도 하다. 21세기 영화 속 인물들은 서사의 장소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들의 속성과 의미를 구성하고 되짚고 갱신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스크린의 장소에 거주한다. 영화는 마치 이면화를 그리는 것처럼 현실의 장소와 이미지의 장소를 평등한 세계의 단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세계가 파열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복수적 세계의 범람을 불러들인다. 그 복수형의 단면은 어느덧 너무 많은 사회적 조건이 동질화된 나머지 서사 내부에선 거의 불가능해진 세계 안의 차이와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기제다. 이는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과거와 미래의 시제를, 현존하는 질서와 잠재적인 질서의 경계를 확증할 수 없는 편재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상호 교란적인 세계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돈가방을 든 도망자와 공기총을 든 추격자를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언제나 뒤늦게 빈손으로 도착한다. 그는 이미 추격자가 다녀간 현장에 앉아 그가 지켜보던 텔레비전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에 흐릿하게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보안관은 그들이 자신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중얼거린다. 웨스턴의 풍경을 전유하고 있지만 이곳은 도망자와 추격자와 보안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에 비친 흐릿한 형체와 시각을 공유하는 불안정한 형상들의 세계다. 이 세계의 풍경에는 기준을 설정할 만한 원점과 기원이 없다. 단지 풍경이 주어져 있고, 그에 대항하며 형성되는 다면화된 얼굴과 형상이 채워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에서 세계는 온라인 공간에 접속한 뒤 유령이 되는 인간의 얼룩으로 채워진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세계는 리무진 파노라마처럼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단면과 디스플레이 모니터 위의 평면으로 분할되어 있다. 샹탈 아케르만의 <노 홈 무비>에서 카메라를 든 아케르만은 스카이프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어머니의 얼굴을 비춘다. 카메라는 실시간으로 간극과 격차가 실종된 세계의 원리를 비추지만 그 장면에서 상대방의 형상은 추상적인 픽셀의 형태로 조각나 있다. 세계는 유령의 시각으로, 이동수단의 시각으로, 프로그램과 데이터의 시각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장뤼크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서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도, 누가 무엇을 위해 촬영했는지 파악할 수도 없이 펼쳐지는 저화질의 스마트폰, 캠코더, CCTV 영상은 허구적 세계의 위상이 파괴된 현실을 증언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접점을 다시 회복하려는 절실한 자기파괴다. 스크린을 매개로 현실과 허구를 나란히 두고 그 관계를 탐색하는 자기파괴적 걸작이 바로 토니 스콧의 <데자뷰>다. 이유 모를 선박 폭파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는 원격 위성 장치를 토대로 지나간 과거를 모든 각도와 시점에서 다시 관측할 수 있는 스크린이 있다. 이 스크린에는 정확히 4일 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며 지켜보는 이들이 시간을 앞으로 당기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데자뷰>에는 스크린을 매개로 4일 전의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공존하는 세계로 주어진다. 폭파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 더그는 범인에게 살해당해 현재시제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스크린으로 지켜본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이 눈앞에 있다는 감각이 더그의 시각을 물들이기 시작하고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매혹으로 번진다. 스크린 속의 대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에 이미 죽어버린 대상이 눈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한다는 조건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낯선 경험으로 뒤바뀐다. 스크린과 현실의 이중적 시각에 충격을 가하는 사건은 영화 중반부에 벌어진다. 더그는 스크린의 범위를 벗어난 범인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 4일 전의 과거가 영상으로 재생되는 고글을 쓰고 자동차에 탄다. 그는 한쪽 눈에 고글을 쓰고, 다른 눈으로 현재 시점의 범인을 추격한다. 한 시각에는 과거의 행적이, 다른 하나의 시각에는 현재 시점의 상태가 교차하며 스크린에 두 가지 시제의 영상이 충돌한다. 더그는 한쪽 눈으로 스크린에 기록된 단서에 집중하면서, 다른 눈으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한다. 파괴된 세계는 두눈에 비치는 분열적 표상으로 순식간에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가 나뉘는 시각을 매개로 더그는 마침내 4일 전의 범인이 도착한 곳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그곳은 파괴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가 지켜본 ‘현실’은 그가 발 디디고 선 현실과 다르다. 영화는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꾸며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또 다른 화면과 스크린이 틈입할 때마다 하나의 거짓말은 다른 하나의 거짓말과 만나게 된다. 이 조건 아래서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는 언제든 다른 무언가로 뒤집히거나 일관된 현실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중첩된 거짓말의 세계가 된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이 불명확한 형상의 세계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거짓말의 이행 과정을 다룬다. 콜걸로 일하는 아키코는 술집 창문에 비친 형상에서 택시에 비친 형상으로, 노교수의 침실 한쪽에 있는 텔레비전에 비치는 형상으로, 남자 친구인 노리아키가 발견한 성매매 광고 사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표상이 머무는 장소를 옮긴다. 아키코는 “~인 것처럼”이라는 가정법에 사로잡힐 때마다 영화가 꾸며낸 거짓의 세계에 적합한 형상으로 프레임 내부에 거주한다. 아키코가 임시로 거주하는 이미지의 평면은 영화적 허구와 가정법의 진실이 공존하는 픽션의 절단면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서로 다른 거짓말의 집합으로 채워진 물리적 세계에서 공존 불가능한 거짓이 충돌할 때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임시적인 장소를 끝없이 발명한다. 21세기의 영화는 서로 다른 화면과 서로 다른 거짓말이 품고 있는 불안을 안고, 그러나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오래된 무명의 강인함 <기차의 꿈>

20세기 초 아이다호의 원시림, 한 남자가 도끼를 휘두른다.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는 그저 노동의 메아리가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나무들의 비명이 곧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있었음은 분명해진다. 적어도 로버트(조엘 에저턴)에게는 그것이 아메리칸드림보다 선명한 멜로디였다.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은 소설가 데니스 존슨이 쓴 동명의 작품에 기반해 평범한 한 벌목꾼의 80년 생애를 통과한다. 원작 소설이 헤밍웨이적 간결함으로 찬사받았다면 영화는 테런스 맬릭의 기시감을 자아내는 서정시로 탈바꿈했다. 시대적 교집합 면에서는 20세기 초 떠돌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뿐 아니라 마이클 치미노의 수정주의 서부극 <천국의 문>(1980)도 어김없이 함께 떠오르는 영화다. 앞서 나온 두 영화는 변화하는 미국을 ‘천국’에 빗대면서 그 염원의 무모함과 불가능성을 가리켰다. 이번 작품엔 ‘꿈’이 있다. 건설업이 부흥하고 기차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시점에 기차의 꿈이란 얼핏 미국의 꿈처럼 들린다. 하지만 철도를 놓아 문명을 확장하는 것이 노동자 자신의 꿈이었던 적은 없다. 산기슭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로버트의 꿈은 한철 노동이 끝나면 아내 글래디스(펠리시티 존스)와 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더 넓은 곳으로 뻗어 나가기보다 그저 돌아가기를, 정확히는 자신의 터전이라 믿는 곳에 나무처럼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그에게 기차의 꿈은, 고된 노동으로 잠들었다가 도착지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먼 곳에서 집이 불타는 악몽이다. 남자는 산불로 가족 모두가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조차 폐허가 된 집터에 그대로 남아 있기로 한다. 지근거리에서 공생하는 야생 곰도 굶주림보다는 극심한 슬픔에 시달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곁을 지나친다. <기차의 꿈>의 주인공은 가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지탱하는 내면의 양식은 가족애, 그리고 근면 성실한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인데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 이 모든 것을 소거한 후에야 본론을 시작한다. 거대 역사의 속절없는 흐름이 개인의 삶에 뿌리내리는 형태는 언제나 교묘해서,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고도 벌목 현장을 전전하던 로버트는 마지막 남은 노동자로서의 존엄함마저 소리 소문 없이 빼앗긴다. 관객이 스크린 타임 속 세월의 부피를 오롯이 체감하기도 전에 도끼질에 능숙하던 남자는 낯선 전기톱 앞에서 뒷걸음질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로 그는 텅 빈 채로도 운행을 계속하는 기차처럼 그저 세월 속을 살아나간다. 과시적인 인물형의 향연으로 점철된 동시대 스토리텔링의 포화 속에서 배우 조엘 에저턴이 탁월하게 묘사한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너무도 평범해서 희귀종이다. 미국의 우화인 <기차의 꿈>이 시대와 지정학적 위치를 건너뛰어 현실의 수많은 조용한 존재들에 가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편 <기차의 꿈>에서 종국까지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은 죄의식이다. 1917년 여름, 로버트는 함께 일하던 중국인 동료가 백인 집단의 무차별적 폭력에 살해당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주인공을 가담자로 묘사한 원작과 비교해 영화는 도덕적 책임을 희석했으나 방관의 죄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나무를 베는 원죄가 불러낸 기후 재앙, 정착민 식민주의가 낳은 인종적 폭력의 긴 역사가 개인의 삶에 그리는 무늬는 이처럼 모호하지만 분명 지속된다. 생각해볼 것은 가해와 속죄 모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동시에 어느 쪽에서도 주역이 아닌 사람들의 인생,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스타일의 차이와 무관하게 소설과 영화가 동일하게 짊어진 무거운 숙명은 문명이 반드시 값을 치른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에게 그 대가는 평생의 무명성, 존재의 지극한 사소함으로 찾아온다. 우리의 주인공은 멀쩡했던 나무가 어느 날 육중한 가지를 떨어뜨려 동료를 죽이는 이치를 이해할 수 없다. 산불이 하필이면 왜 자기 가족을 앗아가는지, 잿더미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게 왜 그제야 단비가 쏟아지는지 알기에도 역부족이다. 종종 그를 보살피는 원주민 이웃을 제외하면 누구도 로버트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살을 알아차리지 않는다. 훗날 인류가 허공을 정복하여 달 탐사까지 성공했음을 알릴 때에도 로버트는 ‘노바디’다.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쇼윈도 너머로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는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뒤늦은 훈장일 리는 없다. 훌륭한 이야기의 창은 구태의연한 사회를 찌르고, 그 방패는 인간 존재의 한낱 무상함을 보호할 수 있다. 연출자의 불안을 드러내는 빈번한 환상 몽타주와 플래시백이 난삽함에도 불구하고 <기차의 꿈>에 저항 없이 흐느끼게 되는 이유다. 1968년, 로버트는 생애 처음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기차의 꿈이 소진되고 비행기의 꿈이 날아가는 시대가 그를 지켜줄 리 만무하지만 이 순간 그는 주어진 행복을 누린다. <기차의 꿈>의 최종 시퀀스는 평생 자기 삶의 미스터리를 풀지 못하는 인간을 마침내 위로한다. 부모도, 가족도, 후계자도 없는 남자를 두고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말한다. “그 봄날, 위아래의 감각마저 뒤집혔을 때 그는 마침내 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한없이 무력하게 상공의 바람과 압력에 흔들려가면서 문득 미소 짓는 남자가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평범한 삶들에 대한 차분한 경의로 읽을 때 <기차의 꿈>은 경이롭다. 동시에 이 영화가 끝내 떨치지 못하는 원죄를 기억한다면, 아무리 미약한 개인도 폭력의 사슬을 짊어진 역사적 주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역설 속에서 모든 무명의 인간은 한 그루 나무의 심오함을 배워가는 게 아닐까. 데니스 존슨은 소설에서 이렇게 바꾸어 썼다. “대부분의 우리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매우 깊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

[기획] 독창성과 지역성이 만날 때 거대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가파르게 변모하는 콘텐츠 산업에서 디즈니+는 어떤 전략을 고민할까. 디즈니+ 오리지널 프리뷰 2025에서는 에릭 슈라이어 디즈니 텔레비전 스튜디오 및 글로벌 오리지널 텔레비전 전략 부문 사장과 캐럴 초이 월트디즈니 컴퍼니 아태지역 통합 마케팅 및 오리지널 콘텐츠 전략 총괄의 리더십 세션을 마련하여 글로벌시장의 아태지역의 콘텐츠 전략에 대해 나누었다. 두 패널은 공통적으로 스토리가 발굴되는 공간으로서 아태지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먼저 에릭 슈라이어 사장은 디즈니+ 핵심 전략 자체가 로컬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디즈니는 스타워즈, 픽사, 마블, FX, 훌루 등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와 IP를 보유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각 지역의 시청자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현지 문화를 반영한 스토리 중심으로 글로벌 OTT 라인업을 보완하고 있다. 나는 일본·한국·호주 시청자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미국인이니까. 하지만 스토리의 보편적 구조와 시각언어는 잘 알기 때문에 지역 리더들이 아태지역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집중한다. 나는 자주 질문한다. ‘당신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불타고 있나?’” 이어서 캐럴 초이 총괄은 스토리텔링이 유행어처럼 번지는 시대에 디즈니가 어떻게 본질에 가닿는지 이야기했다. “전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요소는 분명 있다. 훌륭한 이야기, 높은 제작 완성도, 강렬한 캐릭터 아트. 이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도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거기에 지역의 문화적 뉘앙스를 더하면 어떻게 될까. 로컬 크리에이터의 개성과 색이 살아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로컬 포 로컬(Local for Local) 전략이 유의미한 효과를 볼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무빙><나인 퍼즐><카지노>등 성과를 냈다.” 숏폼이 각광받는 시대. 디즈니+는 이를 어떻게 접목하고 응용할 계획일까. “특히 아시아에서는 디지털 소비 패턴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2분 내외의 세로형 드라마처럼 ‘초단편 포맷’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트렌드가 디즈니+의 전체 포트폴리오에 어떻게 녹아들지는 아직 탐색 중이다. 다만 우리는 이미 미드폼, 언스크립티드 등을 실험하고 있다.”(캐럴 초이) 이어 에릭 슈라이어 사장 또한 이러한 소비경향에 의견을 더했다. “우리는 공장식 프로세스가 아니다. 매번 다르게 예술가를 지원하면서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내는 여정이다. 전통적인 드라마의 경우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작가와 피드백을 주고받고, 파일럿을 촬영한 뒤 시리즈로 확장한다. 하지만 요즘은 파일럿 없이 바로 시리즈 제작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장점은 형식적 유연성이다. 이제는 7분짜리 <블루이>같은 초단편 시리즈도 성공을 거둔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의 제약을 없애려 한다. 창작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실험할 수 있도록 놀이터를 지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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