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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오직 어머니만이 슬퍼할 것이다.”(롤랑 바르트) 망자(亡者)로 인해 삶의 궤도를 바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여기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예외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이처럼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 어머니, 그녀가 상실의 슬픔을 더욱 숭고하고 폭넓은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죽은 아들의 빈 자리를 메우려는 노력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는 주인공 마뉴엘라의 이야기는 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역시 어머니의 원숙함을 체현한 탓일까? 그의 13번째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이 이른바 알모도바르적이라 불리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일종의 평정(平靜)의 미학을 덧씌워주고 있는 것이. 예컨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알모도바르 특유의 알록달록한 야만적인 원색주의는 온
상실의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 <내 어머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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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의 줄거리를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한국에서 중등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야기, 불멸의 고전 <춘향전>을 영화로 만든다는 건 그래서 대단한 모험이다. 줄거리야 이미 뻔하고 게다다 수십번 영화로 TV드라마로 재탕돼온 이 오래된 이야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게 아직 남아 있기나 한 걸까.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씨의 판소리 완창 ‘춘향가’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어떤 좋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영화 만드는 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그 느낌을 자기 안에 가둬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귀에서 판소리가 계속 윙윙거려 임 감독은 결국 영화 <춘향뎐>에 손을 댔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문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판소리의 리듬과 감흥을 판소리 자체보다 훨씬 뜨겁게 살려내는 방식. 임 감독이 택한 길은 판소리와 영화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서 판소리의 효과를 끌어오는 게 아니라
한국적 영화미학, <춘향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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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이끄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단편 <탱고>에는 ‘소냐’라는 이름으로 낮과 밤을 달리 사는 여성이 등장한다. ‘산드라’ 아니 ‘소냐’는 탱고를 추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성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을 기꺼이 호흡한다. 분명 춤은 그녀에게 새로운 육체를 가져다주었고, 무대 위에서의 은밀한 교환은 그녀를 누구보다 당당하게 만든다. ‘댄스’ 영화가 스토리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매번 끊이지 않고 만들어지는 것에는 위와 비슷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댄스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춤을 통해 변신한다. 엇비슷한 공식이지만 변신의 과정 속에는 파트너로 등장하는 남성과의 갈등과 화해가 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춤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 이 묘한 공식이 춤이라는 해방구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다.
<살사>에서도 이러한 전개는 마찬가지다. 스토리를 놓고 보자면, 적절한 우연(알고보니
살사 댄스가 뿜어내는 열기와 쾌락, <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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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 애니메이션이라는 딱지의 가치는 기괴한 상상력에 의해 발동 걸린 성적자극의 강도와 비례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양념이 폭력. 성적 자극과 폭력이 어떤 비율로 섞이느냐에 따라 요리의 맛은 천차만별이다. <헤비메탈 F.A.K.K.2>이 선택한 비법은 줄리의 말랑하고 뽀얀 살결 위에 빨간 가죽 띠를 두르고 칼을 쥐어주는 것이다. 여전사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시선이 아슬아슬한 의상 사이로 향하기 때문. ‘성인용’을 딱히 원하는 고객이 아니라면 <헤비메탈 F.A.K.K.2>는 영양식이라고 보기 힘들다.
<헤비메탈 F.A.K.K.2>는 1981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2천만달러의 흥행수입과 2백만개 이상의 비디오 판매고를 기록한 <헤비메탈>의 속편격인 작품. 원작은 사이먼 비슬리, 에릭 탈보트 그리고 제작자이기도 한 케빈 이스트만이 함께 만든 만화 <용광로>다. 성인 잡지 <팬트하우스>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헤비메탈 F.A.K.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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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좀더 새로운 재료 찾기, 혹은 익숙한 재료를 낯설게 요리할 방법 찾기에 골몰하는 할리우드가 주목한 신소재 하나. 바로 <에어 콘트롤>이 파고든 관제사들의 세계다. <에어 콘트롤>의 시작은 96년 <뉴욕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에 실린 기사로 거슬러올라간다. 다시 프레이가 쓴 그 글은 관제탑 업무와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는 관제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히트> <파이트 클럽> 등을 제작한 중견 프로듀서 아트 린슨은 일 자체의 극적인 위험과 직업상 독특한 생활문화를 갖는 그들의 세계가 새로운 소재라는 판단에서 이내 영화화 판권을 확보했다. 인기 TV시리즈 작가 글렌과 레스 찰스 형제가 시나리오를 맡았고, 감독 제의를 받은 마이크 뉴웰은 <도니 브래스코>를 마치고 원래 쉬려던 계획을 접고 합류할 만큼 흥미를 보였다.
뉴웰의 말을 빌리자면 <에어 콘트롤>은 “비행기 충돌이 아니라 사람들의 충돌”을 다루는 코미디.
사람들의 충돌을 다루는 코미디, <에어 콘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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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하고 사람을 울리겠다는 데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럴 셈으로 <성원>은 가슴저미는 사연들을 퍽도 많이 들려준다. 우선 주인공 양파의 존재가 그렇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양파에겐 ‘그녀의 얼굴을 단 한번만 봤으면’ 하는 게 살아 생전의 소원이다. 하지만 죽음으로써 양파가 초란을 볼 수 있게 됐을 땐 초란이 양파를 알아보지 못한다. 죽음조차 두 사람의 사랑을 막지 못했지만, 어긋난 사랑의 운명은 죽음보다 더 가혹해서 이들의 재회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홍콩에서 <첨밀밀> 이래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멜로드라마인 <성원>의 뜨락에는 온갖 슬픔의 수사들이 만발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사어의 대부분이 최루성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용어’라는 데에 있다. 할리우드영화 <사랑과 영혼>을 떠올릴 것도 없이 산 자와 유령의 사랑은 <천녀유혼> 시리즈에서 익히 본 것이다. 사랑의 갈피를 채운 작은 사연들에서 이 영화만의 감성을
홍콩산 멜로 영화,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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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카이틀, 로버트 드 니로, 실베스터 스탤론, 레이 리오타라는 화려한 배역진은 이 영화를 조금은 궁금하게 만들다. 어두운 뒷골목을 누비던, 아니 영웅, 반영웅을 자처하던 스타들이 경찰이 되어 모두 한 마을에 산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해비>라는 저예산 영화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탁월하게 묘사해 내는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캅 랜드>에서도 주요한 세 인물을 각각 다른 위치에 배치시킨다.
스탤론이 연기한 프레디는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사고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바람에 그토록 갈망하던 뉴욕시경 시험에 낙방한 인물. 레이의 배려로 캅 랜드를 돌보는 보안관 일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쪽 귀를 희생하면서 살려낸 여자는 다른 경찰관의 아내가 되어 있는 상태. 그에게 경찰은 인생의 목표인 동시에 거부의 대상이다. 캅 랜드를 지배하고 있는 레이 역의 하비 카이틀은 자신의 조카를 숨기기는 했지만 마을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캅’ 그들만의 세계를 바라보는 진지함, <캅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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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빵을 만드는 것은 좋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 영화 첫머리에 소개되는 주인공의 신조는 <주노명 베이커리>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빵 배달을 갔던 주노명이 몰래 집에 들어가 잠든 아내의 몸을 더듬는 장면에선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아내의 신음소리에 맞춰 수십겹의 페스츄리로 이뤄진 빵이 달콤하게 부풀어오른다. 점점 커지는 빵처럼 사랑은 만족감에 취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싶은 순간 주노명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결혼한 지 10년된 부부, 매일 빵집 카운터에 앉아 아파트로 둘러싸인 풍경만 바라보는 여자에게 늘 빵처럼 부풀어오르기를 요구할 순 없을 것이다.
<주노명 베이커리>는 주노명에게 닥친 위기에서 본격적인 드라마를 시작한다. 흔히 불륜이라고 또는 중년의 로맨스라고 말하는 그것을 주노명의 아내 역시 체험한다. 그 대상이 고릴라같은 남자 박무석이지만 이 남자는 보기보다 괜찮다. 아무도 몰라주는 주노명의 빵 만드는
불륜도 살짝 구으면 로맨스가 된다, <주노명 베이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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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엔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신나간 마약중독자들, 임신한 창녀들, 칼과 총으로 구멍난 시체들,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는 부랑자들이 구급요원 프랭크를 기다리고 있다. <비상근무>에 담겨진 90년대 초 뉴욕 뒷골목의 밤풍경은 단연코 아비규환이다. 영광의 도시 뉴욕은 지옥의 그늘을 감추고 있다가 밤이 되면 끔직하고 흉칙한 맨살을 이렇게 드러낸다. 프랭크도 이 악몽의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자신의 미숙으로 죽은 한 소녀의 혼령이 그에게 치유불능의 불면증을 심은 뒤로 그의 얼굴은 말기 암환자처럼 변했다. 죽어가는 인간들의 호출에 몽유하듯 끌려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독백대로 “죽음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는 것”뿐이다. 그럴수록 프랭크의 안색은 더욱 검게 변해간다.
뉴욕시의 병원에서 10년간 구급요원으로 일한 조 코넬리의 원작소설이 폴 슈레이더의 각색과 마틴 스콜세지의 연출을 거쳐 다시 태어난 <비상근무>는 스콜세지적인
세속도시에서의 영적 구원, <비상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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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말이지만, 배우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실사까지 파고든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발전상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배우 없는 영화’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좀 호들갑스러울 수는 있으나, 불가능하다 도리질만 할 수 없는 것은 <스튜어트 리틀>이 내비친 가능성 때문이다. 사람 세상에 입양된 쥐의 모험담이 애니메이션 아닌 실사로도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것이 1억달러의 제작비가 쓰일 만한 보람직한 프로젝트일 수 있다는 사실. 여기서 사람은 기껏 조연이거나 배경 그림에 불과하다.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한 가상의 캐릭터 스튜어트, 립싱크 솜씨가 훌륭한 고양이 스노벨과 그 패거리들이 이끌어가는 이 영화에서, 할리우드의 여전사 지나 데이비스나 영국 출신 연기파 휴 로리에게 눈길을 보내는 관객이 과연 몇이나 될까.
<스튜어트 리틀>이 일궈낸 기술혁명은 그렇듯 눈부시다. 풍부한 표정연기와 다이내믹한 액션연기를 소화하는 스튜어트의 생생함은, 그것이 살아
어린 관객에게 전하는 ‘친화적인’ 메시지, <스튜어트 리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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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깊이, 오래 생각하면 성자나 철학자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소나티네>를 보면 성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소나티네>는 죽음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가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다. 언젠가 기타노는 자신의 최고작으로 <소나티네>를 꼽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오랫동안 죽음에 홀려 있던 자기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머리에 지그시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기타노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세번 반복되는데 한번은 총알없이 하는 장난이지만 두번은 뻥 뚫린 두피 사이로 피가 용솟음치는, 몸서리쳐지는 장면들이다. 그는 왜 이런 끔찍하고 살벌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일까? 다케시는 야쿠자 보스 무라카와를 통해 그 의미를 돌아본다.
기타노 자신이 연기하는 무라카와는 처음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으로 등장한다. 작은 조직의 보스지만 마음에 안 들면 최고 보스의 오른팔이라도
죽음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 <소나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