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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오지 않은 봄은 어떻게 상상되는가, 김성수 감독이 남성들의 세계를 구축하는 법

배우 정우성, 김성수 감독

황정민이 묘사하는 전두광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나는 정우성의 이태신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이태신이 <서울의 봄>의 핵심을 관통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라면 그가 꼼꼼한 사실 고증으로 화제를 낳고 있는 이 영화가 그려내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순수한 허구라는 점도 특별했다. 살뜰한 자막 설명과 유사 작명(作名), 세심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실화 역사극 전략을 앞세우고 있지만 <서울의 봄>의 실질은 숭고한 남성성의 현현(顯現)을 앙망하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에 특화된 감독 김성수는 매번 대의와 명분을 과장하지만 옹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진짜 남자다움의 윤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남자다움의 윤리’라는 테마가 반복, 순환되는 주기, 영웅적 풍모를 가진 남성주인공의 명과 암은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9), <무사>(2001), <아수라>(2016)로 이어지는 김성수 영화 세계의 본류이며, 정우성의 페르소나를 개척해온 이 작가의 장구한 서사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12일, 안타깝게도 우리 곁에 당도하지 못한 ‘남자의 신화’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이 남자는 이태신이라는 화신(化身)으로 형상화되었으며 <서울의 봄>은 역사적 실체로서 전두광과 허구적 판타지로서 이태신의 대결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역사의 승자는 전두광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모체로 한 김성수의 허구적 재구성은 대체 서사를 상상하는 쪽으로 기운다. 따라서 대다수 등장인물처럼 그 모델(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추정된다)이 현실 세계 안에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태신은 완전한 허구의 캐릭터로, 오래 숙성된 김성수 영화 세계의 에센스에 해당하며 그럼으로 인해 이 영화가 제공하는 쾌감의 중심에 서게 된다. 확실히 어둡고 건조한 김성수의 역사 스릴러는 권력과 배신, 이중 교배를 주장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어 장르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암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 없었던 남자

‘하나회’는 알려진 것만큼 ‘하나’가 아니다. 군 조직 안에서 떨친 흉흉한 악명과 달리 저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에 눈이 먼 조야한 수컷들이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갈팡질팡하는 오합지졸로 묘사된다. 정변(政變)의 떡고물을 탐닉했던 이들과 대비하여 반란군 그룹에서 이성과 냉철을 유지하며 상황을 호전시키는 것은 전두광과 노태건(박해준)뿐인데, 이유는 그 이름마저 공허하게 들리는 하나회에서 저 둘만이 진짜 우정을 나눈 동지이기 때문이다. 이태신은 전두광-노태건 계열의 반대 지점에서 숭고의 꼭짓점에 있다. 이태신이 주도하는 진압군 계열에서 숭고미를 대변하는 인물은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만식), 김준엽 헌병감(김성균), 육군참모총장 경호장교 권형진(이준혁),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는 오진호 소령(정해인), 이태신 장군 휘하의 강동찬 대령(남윤호), 국방부 지하 벙커를 사수하는 헌병 조민범 병장 등이다. 반란군에 가담한 다수의 고위급 장교들,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보신을 목표로 움직이는 국방부 장관 오국상(김의성) 등은 이들의 반대편에서 사악한 남성성을 대변한다.

갱스터의 충성심을 냉소하는 허구(<아수라>)에서 군인의 명예와 도덕, 직업윤리에 관한 사실주의적인 스토리(<서울의 봄>)로 돌아온 김성수가 초인적 남성을 동경하는 판타지를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동력은 이 숭고한 남성성과 사악한 남성성의 대결 서사에 있다. 이분법적으로 나누긴 했지만 전두광의 편과 이태신의 편으로 단순화할 수 없을 만큼 <서울의 봄>이 제시하는 군대 남자들의 스펙트럼은 레이어가 풍부하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없는 무능력자, 우유부단함에 찌든 보신주의자, 약삭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는 기회주의자, 부패하고 무책임한 모사꾼 등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맞선 의리 없는 전쟁에 가담한 남자들은 고정되고 안정된 것이 아니라 유불리에 따라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남성성의 음영을 보여주고 있다. 저열한 남자의 민낯을 초극하는 판타지에 관한 이 대체 역사극은 가학성과 활동성, 냉철함을 한편에, 사나움과 폭력, 비열함을 다른 한편에 탑재하고 야욕을 향해 질주하는 전두광, 이 미치광이 반란 수괴를 향해 바리케이드를 넘어 돌진하는 가상의 초인에 관한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렇다면 이태신은 누구인가? 존재한 적이 없는 이 초인은 숭고한 남자의 덕목, 명예와 충성심, 사명, 직업윤리를 표상한다. 서로 상충되는 쟁점을 품은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그날 밤 9시간 동안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신념과 충성심을 재부팅하는 동안 수도경비사령관의 소임을 다하려 했던 이태신은 무인의 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주견(主見), 수도를 지키는 군인의 직업윤리, 상관에 대한 신의와 충성심을 재현한다. 김성수의 남성 판타지는 군인들의 세상이 종식된 줄 알았던 순간 “세상은 그대로야”라고 우리를 조롱하는 전두광에게 승리를 돌리고 싶지 않은 남자의 자존심을 추인하면서 다른 세상, 다른 역사, 다른 남자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판타지 장치로서 이태신은 맨몸으로 장갑차를 멈추게 하고, 적은 수의 수졸들로 거대한 적군에 맞서며, 총과 탱크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대리인이다. 무정부적인 혼란이 서울을 장악했던 그날, 그곳에 없었던 남자에 관한 상상은 김성수가 그려내고자 한 궁극의 이상이며 남성 판타지의 완성을 겨냥한다.

남자다움의 윤리에 관한 이상적 모델

남자의 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과잉된 표현이 주를 이루는 장르는 성별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는 절제되지 않은 감정적 강렬함과 육체의 에너지, 직업적 전문성을 결합한 남성성의 모델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전형으로서 <서울의 봄>은 인물들 사이의 권력 투쟁과 협잡, 힘의 역학의 지속적인 변화를 스토리의 중추로 삼아 영화 표현의 절경을 이룬 교차편집 안에서 극적으로 폭발시키는 이야기이다. 남성의 판타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조를 제공하는 이 영화는 부패하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이들에 관한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스토리와 더불어 점진적으로 붕괴해가는 명예와 도덕의 세계에서 악덕을 대체할 수 있는 남자들의 우정을 묘사한다. 이는 강인함과 친밀함을 한몸에 체화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동경이며 보이지 않는 상황(수없이 연결되는 전화)에서도 끈끈하게 이어지는 남성적 유대를 조형하는 이 영화의 방식과 연관된다. 낭만적인 남성성을 기념하기 위해 연출된 몇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먼저 최후를 예감하게 하는 절박한 순간, 출동 직전의 이태신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은 멜로드라마적인 일탈의 순간을 제공하면서 남자의 윤리를 풍만하게 하는 데 공헌한다. 특유의 신념을 빛내는 행주대교 신에서 이태신이 다리 위로 진격해오는 공수여단의 장갑차를 혈혈단신으로 막아낼 때의 강직함은 그의 투쟁이 최종적인 승리로 향하지 못했을지라도 당신의 피를 끓어오르게 할 것이다. 판타지는 숭고함 대 사악함의 대비를 절정으로 밀어올리는 클라이맥스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수경사 군인들을 이끌고 세종로로 진격하는 가운데 이태신은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본다. 단속적인 편집으로 짧게 처리된 숏의 이행은 이태신과 이순신을 하나의 라인으로 연결한다. 따라서 가공의 캐릭터 이태신은 역사 속에 실존했던 장태완 장군이 아니라 중과부적의 열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항전했던 전설의 무인 이순신으로부터 기원한 것임이 자명해진다.

<서울의 봄>은 선택이 아니라 대비의 스토리이며, 울분과 분노를 조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상상의 쾌감을 위한 영화다. 요컨대, 이태신의 추인은 전두광과의 대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중영화의 남성 판타지 안에서 빌드업되는 이 신화는 숭고한 남자에 맞서는 대립항과의 관계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 영화가 남자 영웅의 고통과 노력을 존엄하게 여기고 기념하는 방식을 재설정함으로써 오염된 남성성이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려 한다. 정의롭고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초인에 대한 대담한 재확인 작업은 사이비 남자들이 주도했던 불의한 역사의 죄과를 씻어내기 위해 분투한다. 김성수는 순간의 선택이 야기한 참담스러운 결과를 보여주기보다 상이한 신념에 따라 자신의 길을 선택한 남자들을 대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비루함과 굴욕을 무릅쓰고 승리한 남자들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보다 역사 바깥에서 진정한 남자의 윤리를 세우는 것이 김성수의 목표이다. 밤의 쿠테타가 성공으로 귀결되는 순간 이태신이 바리케이드를 넘어갈 때의 장면 연출은 판타지 빌드업의 결정판이다. 지면에 가까이 위치한 카메라는 이태신의 돌격을 측면에서 그의 전신이 드러날 수 있는 거리에서 조망하고 깜깜한 새벽을 대낮처럼 밝히는 서치라이트는 그의 몸을 휘감는 빛의 강도를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더이상 전진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이르러 이태신이 던지는 일갈은 군인이자 인간의 자격을 박탈하면서 전두광의 호승심을 헤쳐놓는다. 수치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전두광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굴욕과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 김성수의 사려 깊은 장면 연출은 찰나의 흔들림을 설정한다.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뒤 패거리들과 헤어져 홀로 거리를 배회하던 전두광이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면서 한편으로 정신 승리에, 다른 한편으로 남자다움에 관한 도덕적 열패감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을 때 황정민의 불가사의한 연기는 승자의 음울함을 표현한다. 이어지는 숏에서 김성수는 고문실의 이태신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감된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이성민)을 부르며 흐느끼는 모습을 배치함으로써 이전에 본 것과 선연한 대비를 이루도록 한다.

‘명예와 충성의 남자’와 ‘사욕과 배신의 남자’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순간, <서울의 봄>은 비극적 현실 안의 저열한 남성성을 대체할 남자다움에 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손상된 남성성을 구출하는 허구가 제공하는 상상적 쾌감일지언정 명예와 충성심을 끝까지 보존했던 남자를 예찬하는 판타지 서사는 대중의 욕망에 이상적으로 접속한다. 이것이 1979년 12월12일 이후 서울에는 봄이 오지 못했지만, 오늘날 그 시절을 회고하는 사람들에게 복원해주고자 하는 봄에 관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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