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단순한 재미를 제공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뿐 아니라, 시대의 불안과 욕망을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하다. 2000년대 후반에는 사회적 스트레스를 반영한 ‘막장 드라마’가 유행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자, 악을 응징하는 ‘다크 히어로’ 혹은 ‘사적 복수’ 서사가 본격화했다. 2025년에는 공감 부족과 죄책감 결핍, 충동성,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이코패스 인물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부쩍 늘었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SBS), <다 이루어질지니>(넷플릭스), <친애하는 X>(티빙), <조각도시>(디즈니+)가 대표적이다.
사실 드라마에서 사이코패스 캐릭터는 그리 낯선 존재는 아니다. 과거에는 잔혹성과 비정상성을 극대화한 ‘최종 빌런’의 역할이었지만, 정신과적 증상에 관한 사회적 이해가 높아지며 역할과 존재감은 조금씩 변화해왔다. <비밀의 숲>(2017)의 황시목(조승우)이 대표적이다. 시목은 타인의 감정에 무감한 인물이지만, 그의 감정 결여는 악행의 조건이 아니라 검찰 조직 내부의 불의한 공모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의 고문영(서예지)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지만, 엄마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드라마는 사이코패스를 괴물에서, 보다 입체적인 인간으로 보여주며 변화해왔다.
요즘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는 어떨까?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의 정이신(고현정)과 <친애하는 X>의 백아진(김유정)은 여성이며,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동시에 지닌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쇄살인범인 이신은 친족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 경험이 살인 동기가 되었고, 범행 대상은 아동·여성에게 폭력을 일삼은 남성 가해자들이다. 아진은 자신의 생존과 욕망을 위해 타인을 조종해 간접 살인을 실행하는 등 악행을 일삼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에게 동정적인 인물들을 조종하여 악행의 도구로 삼는다. 아진에게 인간은 “쓸모”로 나뉜다. 그러나 아진은 엄마의 학대와 아빠의 지속적인 폭력, 주변 인물들에게 모함을 당한 피해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타고난 것인지, 학대와 폭력 속에서 생성되고 강화된 것인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피해 경험에서 비롯된 왜곡된 자기 인식이 죄책감 없이 타인을 도구화하는 폭력적 전략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신과 아진의 범행은 변호할 여지가 없지만, 두 드라마는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이 돌봄의 부재, 안전망의 붕괴, 성별화된 폭력이 반복되는 사회적 조건이 길러낸 결과에 가깝다는 걸 보여 준다.
영화 <조작된 도시>를 12부작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조각도시>는 다른 결의 사이코패스를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게임 마니아이자 백수로 살던 권유(지창욱)가 살인 누명을 쓰자 자신의 무고함을 믿는 게임 동호회 멤버들과 함께 진실을 파헤치지만, 드라마는 다르게 설정되었다. 성실하고 선량한 배달 노동자로 살던 박태중(지창욱)은 살인 누명을 쓰고 철저히 고립된 채 홀로 싸운다. 교도소에서 만난 노용식(김종수)과 그의 딸이 도움을 주지만, 개인적 호의에 가깝다. 반면 악은 더 강력해졌다. 안요한(도경수)은 자본과 권력을 기반으로 생명을 유희의 도구로 삼는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이다. 그의 악행은 공권력과 상류층의 결탁을 통해 영화보다 더 강화되었고, 드라마에 추가된 레이싱 대결 장면은 ‘오징어 게임’을 연상케 한다. 드라마의 제목인 ‘조각’은 상류층이 저지른 살인을 무고한 시민에게 덮어씌우는 과정을 의미하지만, 평범한 이들의 삶이 ‘조각’난 사회를 은유하기도 한다. 계급화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구도가 심화하는 사회 속에서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시민의 삶은 사이코패스와 공동정범들에 의해 조각나고, 공동체로도 연결되지 못한 채 스스로 살아남아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뿐 아니라 사이코패스 인물들은 강력한 권력자로,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로, 사회조직의 고발자로 드라마 도처에 존재한다. 이런 변화는 캐릭터의 다양화로 볼 수도 있지만, 사회적 징후로 읽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어쩌면 막장 드라마 시대를 지나, 사적 복수를 통해서라도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사회적 절망을 경험하다가, 사이코패스가 곳곳에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는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고 도구화하는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사회적 돌봄과 안전망이 약화하고, 공동체가 해체되고, 자본과 권력의 불의한 연대가 지속되고, 이타적이고도 책임 있는 어른이 사라진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즉 사이코패스적 사회가 사이코패스를 낳고 키운 것이다.
사이코패스적 사회가 사이코패스를 낳고 키웠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까? <다 이루어질지니>는 이 질문에 의미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기가영(배수지)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자란다. 가영의 할머니는 가영이 폭주하지 않도록 사랑과 경계라는 두축을 함께 제공한다. “무감각이 제일 무서운 것”이라는 할머니의 말은 가영의 감각을 되돌리기 위한 최선의 장치였고, 마을 사람들도 가영을 무심한 듯 정성껏 돌본다. 가영을 둘러싼 이들은 사이코패스 인물이 폭력성을 억제하고 ‘좋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안전한 공동체를 제공한다. <친애하는 X>에서 아진이 잠시 흔들린 순간 또한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용납하는 타인을 만났을 때였다. 하지만 아진에게는 가영을 키운 사랑과 경계의 공동체가 없었다.
우리는 지금 사이코패스를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마주하게 된 것일까. 드라마에서 만난 사이코패스는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폭력과 불의의 연대가 강화되고 관계가 단절된 사회가 낳은 가장 평범하고도 극단적인 얼굴이다. 사이코패스는 왜 늘어나는가. 사이코패스를 만든 것이 사회라면, 그것을 멈추게 할 힘 또한 사회에 달린 게 아닐까. 드라마는 다양한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통해 이 불편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