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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들은 왜 맹목적으로 믿어야 했을까, <넌센스> 이제희 감독

“나는 학부 때부터 장르영화‘만’ 만들었다.” 이제희 감독은 장편 데뷔작 <넌센스>이전에도 스릴러 장르에 몰두해 있었다. 그의 단편 <반상회>는 공금을 횡령한 부녀회장이 의심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에 가담하는 이야기였고, <그림자 밟기>는 기간제교사가 정교사가 되기 위해 사악한 학생 한명에게 처절하게 매달리는 이야기였다. 올해 여름 17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호러영화 <노이즈>도 이제희 감독이 작가로 참여한 작품이다. <넌센스>는 어떠한가. 이 영화 또한 손해사정사 유나(오아연)와 웃음치료사 순규(박용우)가 믿음을 근거로 서로를 옭아매는 심리 스릴러다. “현실에 밀착한 장르영화를 만들고자 애쓴다”는 이제희 감독의 이야기를 전한다.

- 사이비종교 소재의 다큐멘터리로부터 영화의 아이디어를 찾았다고.

믿음을 소재로 한, 믿음의 속성을 파헤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사이비종교를 직관적으로 떠올렸다. 사이비종교를 제재로 한 작품은 대개 교주에 집중하지 않나. 그런데 나는 사이비종교에 이끌리는 신도 개개인의 심리가 관심사다. 사회면을 뒤흔드는 다른 뉴스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결과만큼 사건의 배경이 궁금하다. 기자간담회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언급했지만 <넌센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언더그라운드>, 정확히는 옴진리교 테러사건의 가담자를 다룬 2편 <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다. 가담자들의 증언 속엔 대부분 심리적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이 맹목적인 믿음을 낳았고.

- 유나가 순규나 미숙(오민애)과 대립하는 이유 또한 믿음에서 기인한다. 유나는 뭐든 불신하는 존재인 반면, 순규는 누구든 믿게끔 만드는 자다. 또 미숙은 뭐라도 믿어보려는 사람이다.

결국 편집됐지만 유나가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미숙이 신봉하던 쑥향을 피우는 장면이 있다. 나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장면이다. 몇년 전 엄마와 카페를 운영한 적 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아 장사가 쉽지 않았다. 우리 엄마도 미숙처럼 이것저것 믿는 분이라 당시 가게 안에서 온갖 향을 피우며 번영을 비셨다. 그땐 그게 너무 싫었다. 그런데 엄마의 카페를 내가 물려받아 사장이 되니, 뭐라도 붙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더라. 위치에 따라 이전엔 마뜩잖았던 것들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걸 깨우쳤다. 작가 입장에선 자기반영성이 꽤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아파트에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노이즈>를 쓸 땐 몇달간 구축 아파트에서 살아보기도 했다.

- 믿음에 관한 수많은 대화로 영화가 채워져 있다. 대화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배우들에게 주지한 점이 있다면.

오아연 배우에게는 최대한 순규의 말에 동요하지 않기를, 아예 리버스숏에서도 리액션을 하지 않기를 요구했다. 박용우 배우와는 촬영 전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사나 설정 등도 배우의 아이디어에 따라 수정된 부분이 많다. 순규는 디렉션이 자세할수록 틀에 갇힐 우려가 큰 캐릭터라고 판단했다. 사전에 긴 논의를 거쳤으니 현장에서는 배우가 자기만의 박자로 움직이길 바랐다. 사실 초고에서는 순규가 훨씬 나이가 많은, 좀더 구루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섹슈얼한 기류가 흐르면 좋을 것 같아 순규의 나이를 낮추고 캐릭터의 매력도 일부 손봤다.

- 어쩐지 순규가 영화 내내 딱 달라붙는 상의만 입고 나오더라. (웃음)

순규는 그게 누구든 유혹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어떤 코디가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하는지 알지 않을까.

- 편집감독 크레딧에도 이름을 올렸던데, 촬영 후 편집실에서 대치 신들을 어떻게 이어 붙였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장편제작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모두 감독이 편집을 직접 해야 하고 이를 위해 기성 편집기사를 멘토로 붙여준다. <넌센스>의 경우 <3학년 2학기><사랑의 고고학>등을 편집한 이연정 감독님이 함께했다. 직접 편집실에 앉아보니 영화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졌다. 이번 영화에서 두 배우가 대사 이상의 감정을 눈으로 전했다. 예컨대 해장국집에서 순규가 유나에게 다가오는 장면은 카메라가 원경에서 근경으로 프레임을 좁혀가는데, 이때 오아연, 박용우 배우가 눈동자로 율동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컷 안에서 눈의 움직임으로 템포를 변주하는 두 배우의 연기를 꼭 주목해달라.

- 조명 활용이 인상적이다. 유나의 공간은 그린, 순규의 공간은 마젠타로 조명의 톤이 맞춰져 있고 둘이 진실 게임을 벌이는 장면은 푸른빛 아래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이유석 조명감독님과 송현준 촬영감독님이 워낙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콤비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두분이 조심스럽게 조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고백하자면 처음엔 동의가 잘 안됐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처럼 일상의 톤을 건조하게 유지하며 사건과 거리를 두는 촬영, 조명이 <넌센스>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캐릭터를 색으로 표현했을 때 만들 수 있는 효과를 납득한 이후 마음이 움직였다. 보색에 가까운 두 컬러가 서로 침범하며 대립의 구도를 선명히 그려보겠다는 두분의 계획에 설득이 됐다. 또 <넌센스>의 구성원 각각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게 선장의 역할 같았다. 아무튼 조명감독님이 이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웃음) 상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명감독님의 지인들을 초대하는데 그분들이 관람 후 전해주는 피드백이 내게도 큰 힘이 된다.

- 두 주인공은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모호한 결말을 맞이한다. 사건별로 ‘기, 승, 전’만 있고 ‘결’은 제시하지 않는 결단을 내린 배경은.

분명한 의도가 있다. 내가 사이비종교에 빠진 신도들의 이면이 궁금했던 것처럼 관객들 또한 모호한 여지를 극장 밖에서도 거듭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 각자의 삶을 관객들이 상상하길 바란다. 배우들에게도 시나리오에 공란으로 둔 지문에 대해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기자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채워 표현하길 부탁했다.

- 관객들에게 <넌센스>가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독립영화를 향한 편견이 생산자과 수요자 모두에게 있다고 본다. 관객은 독립영화라고 하면 어려운 영화일까봐 겁먹는데, 그저 영화를 즐겨주길 바란다. 돌이켜보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도 독립영화 아닌가. 그런데 독립영화 진영 내부에서 장르영화는 상대적으로 경시된다고 느낀다.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2010) 같은 작품이 또 나와야 하지 않겠나. <넌센스>를 계기로 독립영화 안에서도 보다 다양한 장르가 탄생하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