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영화의 숙명은 전작과의 비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오리지널의 무엇을 유지하고 변주했느냐에 관한 기대와 논의가 공개 전부터 오가곤 한다. <부고니아>는 원작의 주요 플롯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각색작이다. 주인공이 외계인이라 의심하는 CEO를 납치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갈등이 불거지며 종국엔 CEO의 정체가 밝혀짐과 동시에 종말이 도래한다. 굵직한 뼈대를 그대로 가져온 한편 전작보다 등장하는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를 단순화하고 테디(제시 플레먼스)의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사건 묘사에 초점을 맞췄다. 특정 인물에게 부여된 무게감도 다르다. <지구를 지켜라!>의 초중반부를 견인하는 이가 병구(신하균)였다면 <부고니아>에선 납치를 당한 미셸(에마 스톤)의 존재감이 크게 작용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가 확정되었을 무렵부터 개봉 이후까지, 만식(백윤식)을 대체하는 미셸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건 어쩌면 그런 연유에서일지 모른다. 혹자는 미셸이 여성 캐릭터이기에 원작의 과격한 서사가 매끈히 정리되었다고 말한다. 그에 동의함과 동시에 유독 미셸을 중심으로 파생되는 <부고니아>의 고유성과 <지구를 지켜라!>와의 차이를 계속 되짚어보게 된다.
무균의 지하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에 비할 바 없이 표백된 세계다. 극의 초반부 인물간 설정과 이를 보여주는 방식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 우선 <지구를 지켜라!>의 만식의 경우 유제화학의 대표로서 주가조작, 스캔들 등 추악한 민낯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자다. 반면 <부고니아>의 미셸을 소개하는 몽타주에서 영화는 그가 자기 관리에 능하며 보여주기식으로나마 직원 복지에 신경 쓴다는 점을 강조한다. 납치된 이후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테디, 도니(에이든 델비스)와 대화로 상황을 해결하려 시도하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만식은 어떠했나. 이런 식의 협박엔 익숙하다는 듯 시종 적대적 태도를 유지하며 병구와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그 결과 병구의 지하실은 모욕을 동반한 고문, 욕설, 출처 모를 분비물로 가득한 혼돈의 장소로 변모한다. 병구와 만식이 끝없이 살을 부대끼며 갈등을 심화시킨다면 테디와 미셸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물리적 혹은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인상이다. 전기고문을 가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원작에 비해 고문의 수위가 낮아졌으며 미셸을 납치하기 전, 테디와 도니는 스스로 화학적 거세를 감행하고 외계인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목적으로 정갈하게 정신과 몸을 단련한다. 땀과 피로 얼룩진 습도 높은 병구의 지하실과 달리 테디의 지하실은 미셸과 도니, 테디가 건조하게 서로를 탐색할 배경지가 되어준다. 도니가 겁에 질려 자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의 외부인들은 판이한 목적을 지닌 채 만식과 테디의 지하실을 방문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범죄수사물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겸비한 작품이다. 회사 대표인 만식이 사라진 후 경찰들이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이 만식의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교차편집된다. 그중 경찰 상철(이재용)과 서현(이주현)은 병구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의 집에 발을 들인다. <부고니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테디와 지인인 경찰 케이시(스타브로스 할키아스) 또한 수사의 일환으로 테디의 집을 순찰하긴 하나 이는 의례적인 방문에 가깝다. 이를 토대로 보면 미셸이 테디에게 호언장담했던, 자신이 사라진 순간 도시의 모두가 본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란 말의 진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돌이켜보면 테디가 미셸을 납치하는 때부터 미셸이 테디를 동반한 채 회사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이들의 여정을 막아서는 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실종됐던 미셸이 다시 회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직원들은 기웃대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미셸의 안위를 확인하거나 테디를 의심하는 이는 없다. 심지어 환자인 미셸이 절뚝이며 구급차를 뛰쳐나갈 때에도 그는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다다른다. 미셸의 납치를 준비하는 도중 불안해하는 도니에게 테디가 전한 것처럼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인공적으로 타인의 부재와 무관심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오진우 평론가가 언급했듯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유폐된 장소를 골라 말도 안되는 상황에 인물들을 풀어놓고 바라보는”(<씨네21> 1530호) 유형의 창작자다.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등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부고니아>에서 그는 다시 한번 밀폐된 곳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탈출한 인물들의 뒤를 좇는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실험실로 변모한 <부고니아>에선 유독 인물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와 관계성 사이에서의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내외부를 막론하고 두드러진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정해진 답안지
병구와 만식, 미셸과 테디의 관계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만식은 무결한 인간상과 거리가 멀지만 병구가 타깃으로 삼을 적확한 상대라기엔 의문이 든다. 병구는 자신을 쫓아온 경찰에게 총구를 겨누며 ‘내가 미쳐갈 땐 어디 있었냐’고 울부짖는다. 병구의 가족들은 산재의 희생자이며 본인 역시 가정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다. 이를 감안할 때 병구가 표출하는 분노의 근원으로 그를 괴롭혔던 가해자와 사건에 연루된 불특정 다수, 나아가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사회시스템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병구는 만식 외에 분노의 화살을 돌릴 이가 존재했다면 그 또한 타깃으로 설정했을지 모른다. 반면 테디의 분노는 오롯이 미셸을 향한다. 테디의 어머니는 미셸의 회사가 벌인 오피오이드 사태의 피해자였고 그로 인해 테디는 일전에 미셸과 마주한 경험이 있었다. 테디가 총구를 겨눌 이는 명확했던 셈이다. 그러나 테디는 미셸이 외계인 왕족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예를 갖춰 그를 대하기 시작한다. 고객을 실험체로 대한 대기업의 만행에 어머니가 희생됐음에도, 2차로 미셸이 권한 처치로 인해 어머니가 사망했음에도 테디는 미셸의 호통에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한다. 대신 미셸의 해결책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의 인도를 따라 스스로를 종말의 길로 몰아넣을 뿐이다. 병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만식에게 대항한 것과는 다른 선택이다. 두 작품의 후반부를 비교해보면 테디가 처한 상황은 병구의 것에 비해 훨씬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병구의 잔인함을 견디지 못한 순이(황정민)는 그를 떠나지만, 위기에 처한 병구를 돕기 위해 다시 나타난다. 반면 테디는 도니와 어머니가 모두 생을 마감한 상황에서 혼자 남았다. 그런 테디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미셸 외에 무엇이 있었나.
테디와 미셸, 도니의 관계성에 몰두하게끔 유도하던 카메라는 <부고니아>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신에 이르러 방향을 튼다. ‘잘못된 믿음, 벌을 얻기 위한 의식’을 가리키는 ‘부고니아’라는 제목처럼 테디는 자신이 기르는 벌들이 군집파괴현상으로 인해 사라져간다며 외계인과 지구 종말의 연계성을 설파한다. 테디의 양봉장에 균일하게 놓인 벌집틀에 군락을 형성한 채로 벌들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간다. 벌들이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조건을 개선하고 벌집틀을 잘 보존해둔다면 다시금 생태계의 선순환을 기대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럴 요량으로 테디는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미셸을 납치했다. 그러나 도리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벼랑 끝에 몰린 채 테디는 역으로 자신이 집착해온 가설과 음모론의 희생자가 된다. 그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의 태도는 대표-직원이라는 미셸과 테디의 현실에서의 위계, 외계인-인간이라는 종족간의 위계와 맞물리고 결과적으로 테디는 이 구조를 답습하고 수용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죽음의 몽타주
<부고니아>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또 다른 실험실이라 칭하면서도, 왠지 전과 다른 이질감이 든다. 단순히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들과도 결을 달리하는데, 과정에서도 결말에서도 극 중 인물이 전복을 시도할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인간은 결국 이기심과 폭력을 동반한 자멸을 반복할 것이란 결말을 예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결말부에 이르러 인간을 멸종시키기로 결정한 미셸은 지구 위의 보호막을 파괴한 뒤 처음으로 누군가를 연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만식은 병구의 과거가 적힌 노트를 읽고 크게 동요했다. 그렇다면 미셸의 연민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가 내보인 감정과 별개로 지구에선 계획대로 오로지 인간종만을 솎아 멸종시켰다. 가게, 공장, 카페, 수술대, 묘지 등 갑작스레 사망한 채 널브러진 죽음의 이미지들이 끝없이 나열된다. 시체를 맴도는 생물들이 이제 온전한 지구의 주인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 결말을 위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부고니아>를 연출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양봉꾼과 벌, 회사 대표와 직원, 외계인과 인간, 연출자와 캐릭터와 같이 시야의 우위를 점한 존재와 그 대상이라는 구조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 실험실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러 <지구를 지켜라!>를 재해석한 이 영화에선 인간을 향한 일말의 연민이나 가능성조차 남아 있지 않다. 행성 자체를 파괴하기보다 인간종만을 타기팅해 제거하길 택한 결말부가 이를 대변한다. <지구를 지켜라!>가 지닌 특색 중 하나는 연이은 사회적 재해로 인해 트라우마를 떠안은 개인이 불온한 방법을 경유해서나마 나름의 복수를 시도했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부고니아>에서도 관계의 전복이나 갈등이 필연적으로 삽입되었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전작에 비해 명확하게 인물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만큼 인물의 자율성을 감소시켰다. 그 간결하고 냉철한 결정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그것이 최선이었는가에 관해선 의문이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