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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티어 스틱

티어 스틱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을 때에 약간 실망한 기분이 드는 것은 별로인가요. 눈 아래에 바르면 눈물이 나는 촬영용 소품인데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약간 립스틱 형태로 생겼네요. 바쁜 현장에서 눈물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 쓰는 물건일 테지만 아름답게 눈물만 톡 떨어지는 장면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사용할 것 같아요. 우는 얼굴조차 예뻐야 한다는 현실에 이거 참 팍팍해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네요. 하긴 슬플 때면 아무리 표정을 풀려고 노력해도 눈 주변 근육과 주름이 쥐어짜지며 참 못생겨집니다. 또르르 눈물 신은 어떤 상황에 대한 냉정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미학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구겨지는 얼굴을 어떤 식으로든 숨기고 맺힌 눈물만 옜다 던져주고 싶을 테니까요.

신생아 시절, 그러니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약 몇년간의 세월 동안 저는 거의 온종일 소리를 지르듯이 울어서 엄마를 무척 괴롭혔다고 합니다. 주변의 가족, 친구들도 악마처럼 울어대는 저를 곤란해하며 엄마를 몹시 가엾게 여겼다고 하네요. 어린 시절 울보였다고 하면 가수가 되려고 그러나보다 같은 느낌의 설이 있는데 민망하게도 그 정도로 대단한 성량이나 에너지를 가진 가수로 자라나진 못했군요. 이제 와서 변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오죽 분했으면 종일 울어댔을까요. 도로 들어가고 싶은데 별 방법이 없었겠지요. 그 상황을 생각하면 짠하면서도 이상하게 좀 자랑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전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삶이 불길하다는 것을….

언젠가 <마주하고 마주하니>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검은 블랙박스형 극장 공간에 의자들이 밖을 향한 방향으로 둥글게 놓여 있습니다. 관객은 입장해서 원하는 자리에 앉습니다. 극이 시작되면 관객수만큼 배우가 나와서 그들 앞에 섭니다. 국적과 젠더와 나이와 몸의 상태가 다양한 인물들은 우리 앞에 두손을 내밉니다. 관객들은 그 손을 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렇게 관객과 배우는 손을 잡고 몇분간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합니다. 먼 곳에서 시간을 알리는 기척이 울리면 배우는 옆으로 한칸씩 이동합니다. 그렇게 관객은 극이 진행되는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모든 배우와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소 간단해 보이는 이 극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뿐인데 그 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리게 되는 거지요. 그건 비슷한 생김새로 기억해둔 타인의 자취일 때도 있고, 그 사람이라는 모르는 존재가 내뿜는 느낌일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몇분간의 교감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진 만남은 자연스레 삶과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그날 공연에서 손을 잡았던 우리가 이후에 다시 만날 일은 희박하기도 해서 이 관계의 짧은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는거지요. 그건 미소를 띠게도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저는 다소 엉엉 울면서 체험하는 쪽이었는데요, 특히 중년의 인물들을 만나면 쉽게 눈물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납작하게 느끼는 관객이 되는 것 같아서 분하지만 그들을 보고 나의 가족들이 떠올라버렸거든요.

상대 배우들도 어쩐지 제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울음이 나려 할 때 보통 사람들은 고개를 조금 돌리거나 시선을 떨구거나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눈물을 삼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얼굴에서 감정이 떠오르고, 피부가 흔들리며 눈물이 맺히고 결국 울음에까지 가닿는 과정을 이렇게 자세하게는 처음 본 것 같습니다. 무대조명을 받아 숨을 곳이 없는 눈물의 시작점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낯설었습니다. 눈 밑이 떨리며 입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이상하지만 혹시 나에게 화가 난 걸까,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기어코 눈이 빨개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이 사람이 지금 울음이 나고 있구나 알았습니다. 우는 얼굴은 약간 무섭고도 안쓰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얼굴에서 뭘 떠올렸길래 그 사람은 울었을까요. 언젠가 싸운 친구와 닮아 보였거나 당신의 딸처럼 느껴진 걸까요.

그래도 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눈물이 많습니다. 뭔가 일이 안 풀리면 분해서 남몰래 울곤 합니다. 기원을 떠올려보면 유년 시절의 아파트 복도로 갑니다. 줄넘기 줄이 넘어가지 않고 종아리를 내리쳐서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거나, 돌아가지 않아 바닥에 떨어진 훌라후프를 다리 아프게 줍고 있자면 이쁨 받는 세살 터울의 오빠는 언제나 옆에서 그걸 신나게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잘하지 못하는 자신이 속상하고 잘해내는 타인이 부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표독스러운 아이였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그게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의사 표현의 방식이었습니다. 저의 눈물에 이미 노이로제가 걸렸을 엄마는 저를 혼내고 달래며 이런 대사를 했었지요. “거봐, 울고 나니까 잘하네.” 억울하지만 정말 그렇긴 했습니다. 눈물로 감정 표출을 하고 나면 약간 차분해져서 다시 해낼 힘이 생겼던 것인지도요. 그 사실을 떠올리면서 지금도 버스 안에서 울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티어 스틱을 선물받았습니다. 불안함이 가득 찬 자동 센서 수전에 누군가 손을 가져다대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옵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 묻은 턱을 닦아내는 이건 또르르 눈물 미학의 코믹 버전입니다. 지금은 웃기고 약해 보여도 울고 나서 생긴 힘은 결국 줄넘기도 넘어가게 하고 훌라후프도 돌아가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울고 나면 잘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