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의도하지 않아도 서사가 되는, <만약에 우리> 배우 구교환

<만약에 우리>의 주인공 은호는 근래 구교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범상한 풍경 속에 놓인 남자가 아닐까. 좀비 아포칼립스(<반도>), 내전으로 고립된 도시(<모가디슈>), 휴전선 인근 부대(<탈주>), 킬러들(<길복순>)과 기생동물(<기생수: 더 그레이>)의 난장을 휘젓던 배우가 2000년대 서울 대학가로 뚝 떨어졌으니 말이다. 언덕배기 자취방을 오르내리며 청운의 꿈을 꾸는 생기만큼이나 반가운 건 비로소 로맨스의 시작과 끝을 면밀히 통과하는 구교환의 얼굴이다. 짝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곤두선 감각이 권태기의 피로로 무뎌지기까지, 그는 오래 숙성한 감정의 결을 살려 정원(문가영) 앞에 섰다. 젊은 날의 서툰 진심을 복기하며 연기하는 와중에도 유머 한 꼬집을 흩뿌렸다. 긴박한 장르물의 무대에서 간과되었을 뿐 “내 캐릭터 안에는 언제나 멜로가 있었다”고 자신한 배우는 그렇게 이 영화를 결말을 알아도 귀 기울이게 되는 친구의 연애담처럼 만들었다.

- <탈주> 개봉 당시 <만약에 우리> 촬영 중이었다. 그때 신작에서 양조위 분위기를 노리고 있다고 인터뷰한 걸 기억하나.

농담처럼 한 이야기였다! 양조위 선배님은 멜로의 대명사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장국영 선배, 여명 선배가 섭섭해할 것 같고…. (웃음) 사실 특정한 레퍼런스는 없었다. 내 시선은 항상 나를 향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내가 첫사랑에게 느낀 설렘을 잘 담아보려 했다.

- 혹자는 구교환의 멜로 연기가 새롭다고 하지만 태초에 단편 <4학년 보경이> <서울생활> <연애다큐>가 있었다.

<꿈의 제인>에서 제인도 정호(이학주)를 계속 그리워했고….

- <길복순>과 <탈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지. <길복순>에서 (전)도연 선배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내 캐릭터 안에는 언제나 멜로가 있었다. 마음의 노출도가 달랐을 뿐. 조금 신기하기는 하다. <반도>를 기점으로 장르적으로 또렷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시기를 겪었고, 지금은 내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좀더 궁금해하는 시기 같거든. 작품 선택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

- 마치 한 사이클을 돌 듯하는 건가.

그건 아니다. 계획형 인간은 아니라서. (웃음) 그냥 그때그때 궁금한 것에 반응하는 게 아닐까? <만약에 우리>촬영 후에는 배우이자 연출자로서 <너의 나라>를 찍었지만, 그다음으로 참여한 작품은 <군체>다. 늘 내가 궁금한 인물과 상황을 우선순위에 둘 뿐이다.

- <만약에 우리>는 무엇이 호기심을 자극했나.

멜로를 원래 좋아한다. 문가영 배우, 김도영 감독에 대한 팬심도 컸다. 여러 요소가 호기심을 키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내가 잘 아는 감정을 다룬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두, 어쩌면 전 세계인이 다 알고 있을 이 감정을 잘 표현해보고 싶었다.

- 그 보편성 내지는 전형성을 어떻게 다룰지가 관건이었다는 뜻일까.

그렇게 접근하지는 않았으나 흥미롭게도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영화에는 관객이 경험한 적 있는 감정이 들어 있다. <만약에 우리>가 주는 영화적 쾌감은 이별한 인연이 우연처럼 다시 만난다는 건데, 이것만큼은 대부분의 관객이 경험하지 못한 순간일 것이다. 그게 이 영화의 순기능이다. 재밌는 거짓말 하나를 해서 관객에게도 누군가와 잘 헤어질 수 있는 기적을 선물하니까.

- <만약에 우리>에서 비로소 한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며 연애의 생애를 전부 통과한 소회는.

은호와 정원의 과거를 먼저 촬영했고, 흑백으로 된 현재를 나중에 촬영했다. 이 순서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진짜 은호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정원을 마주할 때 전 회차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문)가영씨 도움도 정말 많이 받았다. 그는 프레임 안에서 항상 정원으로 존재하며 매 테이크 처음 연기하는 것처럼 에너지를 줬다. 멜로야말로 형사 버디물만큼이나 투톱 주인공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데, 은호가 등장하지 않는 신에서조차 정원의 시선에서 관객이 은호라는 캐릭터를 알아갈 수 있게 해줬다. 각자의 연기가 서로의 캐릭터를 만들어준 거다.

- 차기작에 배우로 캐스팅한 김도영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감독님은 첫 테이크는 지켜보는 스타일이다. 리허설할 때도 배우가 편하게 느끼는 호흡과 동선을 기본에 둔다. 배우가 편하게 여기는 방법으로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준비한 콘티나 앵글을 바꾸기도 한다. 그와 인간 대 인간으로 친밀해졌다고 느낄 때부터 서로 합이 더 잘 맞아들어갔고, 어느 순간 우리가 이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프로젝트성 그룹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 관객으로서 은호와 친해졌다고 느낀 시점은 그가 정원 앞에서 짝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어색한 몸짓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타고난 장난기 덕에 자주 능청스러워질 때부터였다. 술자리에서 홍합 껍데기를 씹어먹는다든지, 세차장에서 빙빙 돌며 거대한 수건을 짜낸다든지 할 때 말이다.

굉장한 슬랩스틱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다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다 고장날 때가 있지 않나. 거기에 많이들 공감해주신 것 같다. 특히나 은호 같은 인물은 관객과 친밀해져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너무 깊게 빠지기보다 유머를 장착하고 있기를 바랐다. 도영 감독님도 그렇게 디렉션을 주셨고.

- 은호와 정원의 대화만으로 이뤄진 현재 신에서도 마찬가지였나.

그때도 순간순간 은호의 과거 모습이 튀어나온다. 외형적으로는 변할 수 있어도 은호다움을 잊지 말자고 했다. 억지로 어른스럽게 굴면서 굉장한 시간이 흘렀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

- 은호가 어떤 시간을 살다가 이국에서 정원을 대면했을지는 염두에 뒀나.

그 서사를 의도적으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영화도 거기에 포커스를 두지 않으니까.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은호에 관한 디테일한 정보들이 있지만, 공개하기 꺼려지기도 한다. 이 영화만큼은 관객이 그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말을 아끼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모두의 은호, 모두의 정원이 될 수 있도록.

- 분명한 건 두 사람이 한때 서로를 사랑했기에 성장하고 휴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바쁜 와중에 보는 동안 푹 쉴 수 있게 해준 영화 한편을 꼽는다면.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가끔 꺼내 보는 영화 중 하난데, 엔타운이라는 가상 세계를 경험하는 일 자체가 너무 재밌다. 영화는 만든 이의 세계 안으로 보는 이를 들어가게 해주는 매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오랜만에 이와이 슌지의 세계에 다녀온 것 자체로 힐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