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상흔은 어떤 식으로 가시화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지난 12월 개봉한 <사운드 오브 폴링>과 <바늘을 든 소녀>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질문이다. 80년대생인 <바늘을 든 소녀>의 마그누스 본 호른 감독, <사운드 오브 폴링>의 마샤 실린슈키 감독은 각각 자신의 세 번째, 두 번째 장편으로 제77회, 제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사운드 오브 폴링>은 네 세대에 걸쳐 한집에 거주해온 독일 여성들의 역사를 중첩하는 작업을 시도하며 <바늘 을 든 소녀>는 1910년대에 발생한 다그마르 오베르뷔의 영아 연쇄살인사건에 주목한 작품이다.
두 영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주도국이었던 독일과 같은 시기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분할 지배를 받았던 폴란드의 혼란한 전시, 종전 이후의 상황이 담겨 있다. 독일 출신의 마샤 실린슈키 감독, 폴란드 출신의 마그누스 본 호른 감독은 각자의 영화에서 자국의 역사를 되짚고 여성들을 피해자이자 목격자로 등장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운드 오브 폴링>의 알마(하마 헤크)와 <바늘을 든 소녀>의 카롤리네(빅 카르멘 손)에게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알마를 위시한 <사운드 오브 폴링>의 소녀들과 <바늘을 든 소녀>의 카롤리네는 시대의 피해자로 주류 역사에서 밀려난 채 발언권을 박탈당한 자들이다. 비슷한 시기 세상에 공개된 두 영화에서 젊은 신인감독들은 여성의 시선을 경유해 1910년대의 시대상을 묘사하고 이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과거와 현대가 어떻게 공명하는지 살핀다.
가해자의 의도, 피해자의 감정
<사운드 오브 폴링>의 네 주인공은 20세기 독일 역사를 대표한다. 알마와 에리카(레아 드린다)는 1, 2차 세계대전의 생존자이며 앙겔리카(레나 우르첸도브슈키)는 독일 분단기의 동독 거주자다. 그중 렌카만이 유일하게 2010년대의 현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운드 오브 폴링>은 시기를 명확히 표기하거나 구분 짓지 않는다. 대사와 배경을 통해 시대상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사건도 연대기로 나열하는 대신 네 시대가 교차편집되며 매 장면이 현실인지 환상인지도 명확히 인지하기 어렵다. 마샤 실린슈키 감독은 의도적으로 현실, 기억, 환상을 구분 짓지 않았다고 밝힌다. 기억과 상상을 성기게 얽고 이를 바탕으로 인물의 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게끔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과 상상의 주체는 전부 어린 소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샤 실린슈키 감독의 첫 장편 <다크 블루 걸>(2017) 역시 소녀들의 서사를 다룬다. 다만 <다크 블루 걸>에선 다큐멘터리의 접근법을 택했다면 <사운드 오브 폴링>에선 소녀의 입장에서 경험한 기억과 꿈의 이미지를 결합하는 방식을 시도했다는 차이가 있다.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설명 불가한 세상의 일부를 지각할 수 있다”고 믿는 감독이 소녀들을 독일사의 증언자로서 영화에 등장시킨 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알마가 처음 등장하는 ‘위령의 날’ 신은 영화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 중 하나다. 알마가 자매들과 장난을 치며 집 내부를 한 바퀴 돌자 갑작스레 시간대가 바뀌고, 위령의 날을 기리기 위해 구성원 전부가 모인 상황이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검은색 제복을 갖춰 입고 식사하는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군집 같기도 하다. 이날 알마는 죽음이란 개념을 처음 접한다.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관해 덤덤히 말하는 할머니, 자신과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알마’가 사망한 채 찍힌 사진을 보며 알마는 “눈을 감으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 죽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식사 자리엔 알마의 오빠 프리츠와 언니 리아도 동석했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프리츠의 부모는 사고로 위장하고 그의 한쪽 다리를 절단시킨다. 어떻게든 프리츠의 생존을 도모한 반면 전쟁으로 가세가 기울자 이들은 객식구를 줄일 목적으로 딸 리아를 다른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다른 집으로 보내진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 리아는 결국 달리는 마차에서 스스로 추락해 생을 마감한다. 그런 리아가 위령의 날, 하인 트루디가 집안 남성들의 성적 전유물로 전락하는 상황의 목격자임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위령의 날 장면엔 알마 외에도 집을 둘러보는, 주체를 알 수 없는 시점숏이 등장한다. 그리고 오직 알마만이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다.
위령의 날 신엔 다른 시기에 발생한 죽음의 이미지가 수시로 틈입한다. 여러 시간대의 이미지를 복잡하게 충돌시키면서도 웅웅대는 특정 사운드를 반복해 활용하는 식으로 이들을 통합하려 시도한다. 이러한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은 <사운드 오브 폴링>의 두드러진 특징인데 반드시 함께 거론되어야 할 것이 바로 내레이션이다. 대사가 많지 않은 대신 알마, 에리카, 앙겔리카, 렌카의 내레이션이 중간중간 덧붙여진다. 중후반부에 이르러 이들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가 네 사람이 각자의 과거를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 토대로 보면 주체가 모호하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다른 시간대의 시점숏의 주인을 알마, 에리카, 앙겔리카, 렌카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과거를 상기할 때 기억이 시간순대로 떠오르지 않으며 주체적인 경험일지라도 1인칭 시점, 전지적 시점을 오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한 사건을 다각도로 인지할 수 있게 만든다. 집 마당에서 렌카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속옷만 입고 있던 렌카는 부모님의 친구가 자신의 몸을 여러 차례 훑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긴장한 채 웅크린 렌카의 뒷모습을 천천히 줌인할 때, 그 시선의 주체는 렌카가 언급한 부모님의 친구일 것이다. 이 장면은 가해자의 불온한 시선과 피해자의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소녀들의 증언으로 인해 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식을 함께 자각하는 경험이 <사운드 오브 폴링>전반에 걸쳐 발생 한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한다는 것
한편 <바늘을 든 소녀>는 카롤리네의 서사를 시간순대로 보여준다. 종전 이후에도 남편 피터(베시르 제시리)가 돌아오지 않자 카롤리네는 공장 사장 예르겐(요아힘 펠스트룹)과 새 삶을 시작하려 한다. 예르겐의 어머니는 카롤리네를 인정하지 않아 둘의 관계는 끊어지고 카롤리네는 예르겐의 아이를 임신한 채 홀로 남겨진다. 새 가족을 돌볼 여력이 없었기에 카롤리네는 비밀리에 입양을 중개하는 다그마르(트란 디어홀름)에게 아기를 맡긴다.
카롤리네는 <사운드 오브 폴링>속 하녀들의 모습을 공유한다는 인상을 준다. 트루디와 에리카, 카롤리네가 사물처럼 다뤄지는 상황이 당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새삼 일깨운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 여성들의 삶이 묘사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사운드 오브 폴링>의 근간이 개인의 기억과 상상에 기반해 불안, 수치심 등 감정을 채집하는 데에 있다면 <바늘을 든 소녀>는 생존을 위해 모든 요소를 도구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을 강조한다. 카롤리네가 예르겐과 가정을 이루길 꿈꾼 것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제 삶 하나 건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죽음을 감수하고 자신의 몸에 큰 바늘을 찔러넣어 낙태까지 시도한다. 아기를 다그마르에게 보낸 뒤 일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카롤리네는 그의 일을 돕고, 다그마르가 영아들을 살해하는 현장까지 마주한다. 살기 위해 행한 일련의 선택으로 인해 영아 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최초의 목격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롤리네가 극 중 고발자가 되진 않는다. 다그마르가 법정 앞에 섰을 때, 속은 것을 알고 분노한 여성들 틈 사이에서 다그마르를 바라볼 뿐이다. 요컨대 <사운드 오브 폴링>이 여러 세대 소녀들의 삶을 아우르면서도 특정 개인의 경험을 파고든다면, <바늘을 든 소녀>는 카롤리네를 사지로 내몬 시대적 상황, 제약을 직접적으로 극에 끌어들이며 당대 보편의 여성의 삶으로 확장해나간다.
상상에 불과할지라도
<사운드 오브 폴링>과 <바늘을 든 소녀>의 여성들은 죽음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거나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실용성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고 일종의 부산물로 판단될 경우 “종이를 구기듯” 쉽게 바스러진다. 관련 사건이 부각되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수반될 때마다 여성들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한다. 네 세대를 교차편집한 <사운드 오브 폴링>의 거칠고 과감한 시도가 수용될 수 있었던 건 시대가 달라도 오버랩되는 여성들의 경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배제된 여성들의 역사는 결국 그 자신 혹은 공통의 기억을 지닌 여성의 존재로 인해 가시화된다. 마샤 실린슈키 감독이 <사운드 오브 폴링>을 처음 기획할 때 초점을 맞춘 것은 여성 서사가 아닌 세대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나 조사를 거듭하며 미시사에서조차 드러나지 않거나 폭력적으로 기록된 여성들의 삶을 반복해 접하면서 영화의 방향성을 바꿨다. 사회의 폭력성에 관심이 있던 마그누스 본 호른 감독은 자국의 낙태금지법과 연관된 논란이 <바늘을 든 소녀>의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한다.
두 영화의 결말은 다른 듯 닮았다. <사운드 오브 폴링>은 제목처럼 하강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영화인데, 여기서 유일한 상승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극의 결말부다. 1910년대, 추수가 끝난 밭에 거대한 모래바람이 몰아친다. 하녀로 보이는 여성들은 바람을 피해 짚더미에 몸을 숨기고 있지만 오직 알마만이 힘겹게 앞으로 나아간다. 알마의 발걸음 끝엔 공중에 뜬 채 하늘을 바라보는 한 여성이 있다. 뒷모습만 보일 뿐이지만 리아가 마차에서 떨어질 때와 의상이 일치하고 장소 역시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의 정체를 예상해볼 수 있다. 앞서 장례까지 치른 리아의 재등장은 드물게도 이 신이 알마의 상상임을 명확히 한다. 리아의 옆에 선 알마의 발 역시 공중에 떠오르고 화면엔 이들의 표정이 아닌, 공중에 떠오른 둘의 발만이 드러날 뿐이다. <사운드 오브 폴링>의 원제는 ‘태양을 바라보다’(In die Sonne schauen)이다. 여기엔 비유적으로 ‘눈이 멀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해를 응시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직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원제와 달리 <사운드 오브 폴링>에서 인물들이 해를 바라보는 신은 전무하다. 이 결말 장면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과거 리아의 죽음을 목격했던 알마는 모래바람으로부터 몸을 피하거나 숨는 대신 언니 옆에서 그와 함께 태양을 바라보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자신의 상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바늘을 든 소녀>의 결말부에서 카롤리네는 남편 피터와 함께 남부로 이동하기로 한다. 그의 아기는 사망한 지 오래이지만 대신 카롤리네는 보육원에 맡겨져 있던 다그마르의 딸 에레나(아보 녹스 마틴)를 입양하기로 한다. 앞서 법정 신에서 판사는 다그마르에게 “에레나가 진짜 당신의 아이냐”고 질문하는데 다그마르는 이렇다 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실존 인물인 다그마르는 친자녀까지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는 그가 불임일 가능성을 암시한 바 있다. 어쩌면 에레나는 모종의 이유로 다그마르가 죽이지 않고 키운 유일한 영아일지 모른다. <바늘을 든 소녀>는 (아마도 피해자일) 여성들의 얼굴을 중첩시켜 창조한 기괴한 이미지를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해 작품 곳곳에 삽입한다. 이 이미지는 대부분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등장한다. 동시에 다그마르를 비롯한 위험인물, 위험한 순간이 도래할 때 영화가 활용하는 연출법이다. 그러나 마지막 신에 이르러,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카롤리네가 에레나 앞에 등장해 아이를 껴안게 함으로써 <바늘을 든 소녀>는 암묵적인 극의 문법을 스스로 깨트린다. 다그마르의 진실을 일찍이 알고 있던, 알아챈 후에도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어온 카롤리네와 같은 경험을 한 에레나의 동행. 한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방식으로 두 영화는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짓는다.
<사운드 오브 폴링>을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화면에 잡히지 않은, 태양을 응시하는 알마와 리아의 표정은 어땠을까. 클로즈업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운드 오브 폴링>의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프레임 밖을 떠올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