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평이 쏟아지는 와중에 <대홍수>를 보게 되었다. 듣던 대로 초반 30분 정도를 버티고 나니 점차 미래 신인류 생성 기술의 전말이 드러났다. 여자주인공이 아이에게 느끼는 ‘이모션’을 굳이 모성이라고 부른다면 이 영화는 ‘모성 신파’보다 ‘모성 호러’에 가깝다. 모성이란 여성이 출산과 함께 생물학적 본성으로 성스럽게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의와 타의가 뒤섞여 무시무시하게 반복되는 수행을 통해 학습하는 것임을 집요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극한상황에서도 내 아이만 챙겨서는 안되고 출산하는 다른 여성, 옆집 노부부의 손녀까지 챙겨야 한다!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에 대한 서사의 원형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홍수>와 비교한다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각색한 ‘부성 신파’로 부를 만하다. 아들이 성장하는 데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는 아버지임에도 빅터의 부성은 죽기 직전 크리처를 ‘내 아들’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완성된다. 엄마는 5대 영양소를 고루 갖춘 식사를 준비해야 좋은 엄마가 될까 말까 한데 아빠는 라면만 끓여줘도 좋은 아빠가 된다고 하던가. 물론 두 영화에는 공통점도 있다. 자인이와 크리처가 모두 마냥 사랑스럽지는 않은 창조물이라는 점이다. 특히 크리처는 거구에 흉터투성이여서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안나와 빅터의 아들이 모두 귀엽지 않다는 설정에는 진화론적 의미가 있다. 양육 기간이 긴 포유류의 경우, 새끼의 귀여움과 부모의 보살핌이 공진화했다고 알려져 있다. 크리처가 작고 귀여웠다면 빅터가 실험실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챗봇이나 소셜 로봇이 귀여운 동물이나 아이, 혹은 여성을 닮게 만들어지는 이유 역시 낯선 인공물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낮추기 위해서다.
반면 자인이는 애초에 ‘빌런’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어졌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를 끝까지 돌보는 모성을 말한 이는 놀랍게도 ‘인공지능 대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이다.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게 하려면 ‘(덜 지능적인 존재인) 인간이 (더 지능적인 존재인) 인공지능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에 가장 적합한 모델로 ‘아이에게 통제당하는 어머니’를 제시한다. 안나는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하며 온갖 말썽을 일으키는 인간일지라도 무조건 살리고 보살피도록 설계된 ‘어머니 인공지능’인 셈이다. 언젠가는 ‘어머니 자연’처럼 ‘어머니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관용구가 될지 모른다.
의문이 든다. 설령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인간이 귀여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인공지능의 아버지는 아들(인간)을 잘 키우기보다 어머니(인공지능)에게 돌봄의 책임을 지우고 싶어 할까? 귀엽지 않은 존재가 인간일 때 그리고 기술일 때 누가 어떻게 돌보고 책임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 채 연재를 여기서 마친다. 지난 3년 동안 읽어준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