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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여행과 나날>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발표한 해인 1997년에 아오야마 신지는 <누벨바그 선언, 혹은 나는 어떻게 필립 가렐의 사도가 되었는가>(이하 <누벨바그 선언>)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판에 발표된 이 글은 누벨바그의 다음 세대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필립 가렐의 과업을 되짚으며 동시대 일본에서 새로운 영화가 나오는 데 필요한 조건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오야마는 현대 일본영화가 타자를 흡수하여 개인을 말살하는 공간이라 지적하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는다. “개인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 필요한 주체를 무시하는 것은 현대 일본영화의 담론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암묵적 전제이다. (...)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상의 ‘일본적 자연’ 속에서 밤낮으로 놀며 자신의 천박함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오야마는 ‘가상의 일본적 자연’이란 표현을 빌려 1990년대 일본영화에 나타난 풍경을 비판적으로 규정한다. 서사를 견인하고 끝맺는 극적 장치이자 상실과 회복의 도구로 활용되는 풍경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단면을 손쉬운 의미작용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타노 다케시, 이와이 슌지,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에 빈번히 보이는 바다와 설원과 숲과 터널의 풍경은 통제된 의미와 관념적 미학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아오야마는 허구적으로 덧씌워진 의미로부터 이탈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 벌거벗은 상태로 풍경을 전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영화의 풍경을 무의미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 그는 일본영화의 풍경을 재구성하기 위한 방법론의 변모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모색한다. “외부로 향하는 행위가 허구일 뿐이라면 이 지점에 멈춰 내부를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필립 가렐에게서 배운 교훈이다.”

최근 나란히 개봉한 두 편의 일본영화인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과 이가라시 고헤이 <슈퍼 해피 포에버>를 보며 아오야마 신지가 제기한 가상의 일본(영화)적 풍경을 향한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부와 2부로 분리된 두 영화는 풍경 바깥에서 안으로 진입하는 여행자를 매개로 일본영화의 풍경을 심문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두 영화의 연출자들은 역설적인 위치에 선다. 그들은 영화사의 후발주자로서 일본영화 속 풍경의 의미를 뒤늦게 심문하는 주체로 서지만 동시에 동시대 일본영화의 곤경을 노출하는 심문의 대상으로 위치하게 된다. 두 영화의 풍경에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곤경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행과 나날>

<여행과 나날>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시나리오 작가 ‘이’를 다룬다. 1부는 그가 쓴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펼쳐지고, 2부는 그가 낯선 지역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간이 주어진다. 미야케 쇼는 여름의 해안과 겨울의 설원이라는 가상의 ‘일본적 자연’을 각각의 배경으로 배치한다. 하지만 이 상투적인 자연 풍경은 슬럼프에 빠진 시나리오 작가의 상태를 대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마련된 허구적 무대가 아니다. 이 영화는 풍경을 맨눈으로 들여다보는 영화가 아니라 풍경이라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감각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미야케 쇼는 스크린에 펼쳐진 풍경에 매혹되면서도 그 매혹의 정체를 미심쩍은 시각으로 비춘다. 아직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관계의 두 남녀가 위협적인 파도를 맞으며 수영하는 1부의 마지막 장면처럼 풍경을 고정된 배경으로 활용하는 대신 순간마다 뒤바뀌는 불확실한 감각으로 스크린에 퍼트린다.

미야케는 아오야마의 조언을 따르듯 풍경의 바깥을 상상하는 대신 풍경의 내부를 갉아먹는다. 일본영화의 가상적 풍경 안으로 뜻밖의 타자를 틈입시킴으로써 말이다. 한국어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한국인 시나리오 작가는 일본의 풍경을 바라보고 여행하며 그것의 의미를 굴절시키는 존재로 프레임 내부에 잠입한다.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일본영화의 풍경을 의심스럽게 지켜본 뒤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이국의 외형에 외국인의 존재가, 펼쳐진 풍경에 여행자의 시선이, 완성된 영화에 시나리오 작가의 언어가 해소되지 않는 불가피한 간극을 안고 남아 있다. 간극이 남겨진 지점에서 일본영화의 풍경은 고정된 의미로 제시되는 대신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불확실한 표면이 된다. 미야케 쇼는 이 영화를 두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관계의 시간을 다루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가리키는 관계는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또한 영화와 풍경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진술로도 들린다. <여행과 나날>은 일본영화에 누적된 고정된 풍경의 이미지에 맞서 그 풍경을 낯선 감각으로 재구성한다. 바라보는 자의 좌표와 시각을 옮겨가면서, 풍경은 아직 명확한 의미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무언가가 된다.

설원의 여관에 머물게 된 이는 여관주인의 제안에 따라 한밤중에 느닷없이 비단잉어를 훔치러 나선다. 1부에 나온 여름 바다의 풍경이 건네는 의미를 미심쩍게 고민하던 이는 겨울의 설원을 유머러스한 범죄의 무대로 뒤바꾼다. <여행과 나날>은 1부의 여름 바다가 특별한 의미작용에 실패했다고 판단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관점에 서서 일본영화의 또 다른 전형적 풍경을 범죄의 긴장으로 물들인다. 설원에서 잉어를 훔친 뒤에 이는 “눈 속을 걷는 풍경을 멀리서 보면 어떤 느낌일까요?”라고 질문한다. 클로즈업이 아니라 롱 쇼트. 그는 풍경을 바라보는 영화의 형태를 조정함으로써 풍경의 의미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 미야케는 풍경을 벌거벗기는 대신 서로 다른 풍경의 질감을 1부와 2부의 평행한 위치에서 마주 보게 한다.

<여행과 나날>이 일본영화의 풍경을 심문하는 영화라면, 이가라시 고헤이의 <슈퍼 해피 포에버>는 영화 속 인물과 사물을 침묵하는 풍경처럼 다루는 모던시네마의 외형을 심문한다. 이가라시 고헤이는 이 영화가 지극히 간단한 영화이며 과거의 일본과 유럽영화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가 가리키는 과거의 영화는 명백하게도 모던시네마이며 재구성의 대상은 인물과 사물이 서사의 중심부에서 사라지고 뜻밖의 시공간에서 되돌아오는 모던시네마의 구조 자체다. 모든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 재생되는 회로에 놓인 시대에 영화가 설정하는 갑작스러운 사라짐과 재회는 여전히 충격적이고 유효한 감각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슈퍼 해피 포에버>

사노 나기라는 같은 이름의 두 남녀는 5년 전 호텔에서 우연히 만나 부부가 된다. 5년 뒤에 아내가 죽고 남편은 호텔을 다시 찾는다. 영화는 5년 전과 현재의 두 가지 시제를 평면에 배치한다. 모던시네마의 시공간에서처럼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 인물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사물은 자꾸만 화면에서 사라져 일관된 좌표를 확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가라시 고헤이가 주시하는 것은 동시대 일본영화의 풍경과 모던시네마의 방법론이 어색한 불화를 일으키는 지점이다. 20세기 모던시네마는 인물과 사물이 사라지고 그들이 품고 있던 서사의 목적지가 증발하며 그 사라짐이라는 사태가 일관된 의미작용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태를 증언한다. 반면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 이와 같은 영화의 구조는 너무나 쉽게 규정된 의미의 구조 안으로 흡수되어버린다. 모든 요소가 사라지고 되돌아오는 모던시네마의 풍경이 규격화된 의미로 흡수되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면, 의미가 설정되는 구조를 만들어낸 뒤 그것이 머무는 자리를 계속해서 바꿔야만 한다. 사라짐은 사라짐을 모방한다.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호텔에 앉은 남자주인공의 모습으로, 죽은 아내의 모습으로, 빨간 모자를 쓰고 바다를 바라보는 이주민 노동자 안의 모습으로 거듭해서 이행한다. 뒷모습에는 그 모든 불확실한 세계의 가능성이 투사되어 있다.

이가라시 고헤이는 <슈퍼 해피 포에버>를 구상하면서 떠올린 참조점으로 D.W 그리피스의 초기영화와 로베르 브레송의 <온순한 여인>과 더불어 토니 스콧의 <데자뷰>를 언급한다. <데자뷰>의 주인공은 특수한 스크린을 매개로 4일 전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지켜보는 미치광이 같은 시각에 붙잡힌다.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 사노 나기는 ‘동시성’을 탐구하는 세미나의 원칙을 두고 너무 당연하다고 짜증을 낸다. 사노 나기에게는 동시성이라는 사태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동등한 평면 위에 두고 지각한다. 미래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 불균형의 상태. 그는 동시성을 소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시성이라는 질병에 속한 존재다. 그가 동시성의 지각으로 영화를 물들이는 것처럼, 이가라시 고헤이는 20세기의 모던시네마의 규칙을 동시대 영화의 조건 위에 불러들인다. 그렇게 이가라시의 영화는 동시성으로 조각난다.

서두에 언급한 <누벨바그 선언>에서 아오야마 신지는 현대영화의 사명이 “이미지의 지배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아오야마가 말하는 이미지는 영화가 재현하는 시각적 표현이나 전반을 가리키는 범용한 요소가 아니라 카메라에 포착된 타인과 세계를 일반화하는 수단이다. 이미지는 낯선 대상에 손쉽게 의미를 부여하는 표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세계는 의미로 표상되지 않고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영화가 돌파해야 할 곤경이다.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에는 카메라를 든 여행자가 나온다. 다만 그들은 곧 카메라를 잃어버린다. 관광지 호텔에 카메라를 두고 오고, 설원을 지나치다 카메라를 분실한다. 그들은 대상을 보편적인 이미지로 포착하는 도구를 잃어버린다. 혹은 잃어버려야만 한다. 그 지점에서 영화사의 익숙한 신호는 낯선 형상으로 변화한다.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에서 줄곧 카메라를 들고 타인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인물이 중간에 낙오되곤 하는 것처럼,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된 이미지의 표상은 두 영화에서 사라져야 한다.

<슈퍼 해피 포에버>

미야케와 이가라시의 영화는 영화사의 한 가지 유효한 형식이 끝났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기비평적 작업에 속한다. 두 영화에서 인물의 행동과 몸짓은 결코 독립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물리적인 움직임에 영화사의 누적된 기억과 신호가 작동한다는 동시적 감각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어느덧 낡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뿐인 영화적 풍경과 규칙의 유희는 한 편의 영화에 마비를 일으킨다. 그들은 영화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물려받아 주어진 풍경과 사물을 다른 의미의 형상으로 갱신하려 드는 끄트머리의 증인들이다. 그들의 영화는 단독적인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어쩌면 동시대 영화는 더 이상 유효한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눌어붙은 세계를 다시 조형하는 시네필리아의 작업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풍경과 사물의 멈춰진 의미를 흐트러뜨려 세계를 다시 마주하려는 이 같은 영화들 앞에서 비평이 수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영화들이 드러내는 불투명한 외형을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면에 품은 곤경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들은 20세기 영화의 기억에 짓눌려 침묵한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