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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길을 잇는 빛의 리듬, 김철홍 평론가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동시에 가장 나중에 말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누구나 파더나 마더, 시스터-브러더를 우선 말하느라, 그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이 장면은 나중에 언급되거나 영영 잊힌다. 신이라기보단 토막 영상에 가까운 이 순간은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앞장과 뒷장의 사이를 잇는 막간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배경으로 빨간색, 초록색을 띤 빛 입자들이 깜빡거린다. 묘사부터 어렵기에 더욱 기억하기 힘든 이 트랜지션 토막 자체가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에서 큰 특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만큼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여기서 이 토막들이 독립적인 세개의 이야기를 단절시키기보단 잇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편의 단편을 이어서 볼 때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감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보다 더 크게 감지되는 것은, 이어질 수 없는 n개의 독립적인 세계 사이에 길을 놓아보려는 의지 같은 것이다. 매번 좌절하고 후회하면서도 다시 또 손을 내밀어봤던 모든 순간들이 이 토막 영상에 끈적끈적하게 녹아 있는 것만 같다.

길에서 시작되는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세 챕터는 모두 길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인 집에서, 주요 서사인 가족간의 대화가 이뤄지기 전에 길이 있다. 다시 한번, 이 길은 가족의 만남보다 먼저 등장하지만, 보다 나중에 말하게 된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 자체가 가족영화에서 특별한 장면은 아닐 수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 이야기라면 얘기가 다르다. 별다른 사건과 특별한 대화가 없는 이 영화에서, 길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사건임이 분명하다. 명목상의 도착지인 집은 내러티브가 새롭게 생성되는 장소로 보이지 않는다. 되려 인물들은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탈출을 갈망한다. 탈출하는 것이 그다음 가장 큰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은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물들은 오히려 길에서 서로를 더 생각한다. 이 길에 접어들자, 비로소 서로가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서로의 얼굴 앞보다 길에서 더 서로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더’의 길에서 아버지의 경제 상황과 건강을 걱정했던 남매는, 아버지 앞에선 정작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중 한명이 가끔 창밖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느라 각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할 때, 간신히 약간의 마음을 표현할 뿐이다. 또한 ‘마더’에서 인물들은 각자 다른 이와의 대화로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충분히 알리지만, 정작 테이블 위에서의 대화는 겉돌기만 한다. 장녀가 사온 꽃다발이 계속해서 모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면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짐 자무시는 길과 집이라는 두 장소의 명확한 대조와 그 두곳을 통과하는 얼굴을 통해 함께 나이 들어가는 가족의 초상을 그려낸다.

‘마더’에서 불현듯 잠시 자리를 피한 장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 알 수 없는 표정에서 금방이라도 내러티브가 폭발할 듯하다. 어쩌면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마침내 가족들에게 털어놓을 결심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테이블에 앉은 장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에게 지금 할 말이 있다는 것, 이들이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길에서부터 이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우리뿐이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그러나 이 길의 끝에 감동적인 드라마는 없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오해를 풀거나 미처 몰랐던 진심을 깨닫게 되는 결말로 향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도착지에서 더 멀어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자식들은 부모의 장소에 가긴 가지만, 도착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 속 대화의 지속을 지켜보는 것은 도리 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그저 어색한 침묵을 밀어내기 위해 이상한 말들을 뱉고, 마실 것을 마시다가, 끝내 그것들을 결합시켜 뜬금없는 건배사를 외치기까지 한다. 지금 이들은 이 가족이라는 상태를 계속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제 그만하고 싶은 것일까. 자식들은 부모가 건강한 것에 대한 안도의 말들을 뱉지만, 거기엔 부모의 죽음에 대한 은근한 욕망이 서려 있기도 한다. 그들은 다시는 부모의 집에 오고 싶지 않다는 듯, 떠날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마지막에 보이는 길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시스터 브러더’의 엔딩 또한 뒤를 돌아보지 않는 남매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남매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지만, 부모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커피와 함께 가장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그건 아마 부모의 집에 부모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겐 마주 봐야 할 문제가 없으며, 또 자신들에게 특정한 무언가를 마시라고 권유하는 얼굴이 없다. 마약과 커피라는 중독성 있는 무언가를 소비하는 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이 이끌리는 곳으로 삶의 방향을 틀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이 길 위의 스케이트보더들이 누리는 자유다. 영화는 부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에게 집 안에서의 360도 패닝을 선사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에겐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다. 부모의 유품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창고를 보며 쌍둥이가 말한다. “이걸 다 어떻게 하지?” 그들에게 그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길이 단절됐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이제 정말로 길을 떠날 수 없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그 끝을 상상하는 자들과 실제로 그 끝에 도달한 자들 사이로 우리의 얼굴이 비친다. 이 장면을 마지막에 말할 수밖에 없다. 빛과 온갖 잔상들이 속절없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한숏에 담겨 있어도 관계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영화 속 인물들 때문일까. 마지막 토막 장면 속 굴절되는 주사선들의 조합이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지그재그 길처럼 느껴졌다. 그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모두에게 이 영화가 잠깐의 휴식처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