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간 묘사 에세이, <차임>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가 만든 중편영화다. 중년 남성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쓰오)가 강사로 있는 요리 교실엔 서늘한 회색빛의 테이블과 칼날들이 자리해 있다. 교실 안에는 창 바깥의 빛이 흘러 들어와 미러볼처럼 산발한다. 조용조용한 칼질 소리와 바깥의 기차 소리가 별일 없이 교차하는 듯싶던 와중, 수강생 청년 타시로(고히나타 세이이치)가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차임벨 소리가 들린다질 않나, 어떤 기계가 머릿속에 들어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며 교실을 시끄럽게 만들더니, 이내 극단적인 행동으로 경찰까지 출동한다. 마츠오카는 타시로의 소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프렌치 레스토랑의 셰프로 영입되려 애쓰면서 아내, 아들과의 일상을 영위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마츠오카의 요리 교실엔 타시로의 경우와 비슷한 공포가 엄습한다.

도심 속의 인간들이 느닷없는 폭력의 충동에 빠져 일상을 깨뜨린다는 이야기, 어딘가 묘한 곳에 자리한 물건과 빛, 신경을 자극하는 소음의 교란, <차임>의 많은 요소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지난 작품들을 호명하게 만든다. 선연하리만치 잘 빚어진 공포의 인자들은 자연스레 그의 대표작인 <큐어>부터 <회로> <절규>를, 마츠오카 가족들이 보이는 일련의 어긋난 액션과 리액션은 <도쿄 소나타> <해안가로의 여행> 등을, 타시로가 주장하는 신체 강탈의 모티프는 <산책하는 침략자>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차임>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처럼 “그저 한편의 영화일 뿐이며 특정한 장르나 오락적 가치, 혹은 감독으로서의 자의식 같은 지문이 찍히지 않은” 작품으로서 기존의 관습에 미루어 예측한 바들을 속속들이 비껴나간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않는 무능한 형사가 등장해 형사물의 장르성을 배신하고, 유령과 SF의 존재감은 말로만 형성될 뿐 입증되지 않으며, 가족의 균열도 모호한 상으로 맺어져 이야기의 공백을 만든다.

대신 <차임>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인간을 묘사하는 자세만으로 성립된 것에 가깝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2003)를 두고 “마치 기계적인 반복이 이 세계의 원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나가 문득 타인의 사고나 행동을 모방”(<씨네21>, 1070호)한다는 점을 짚은 바 있는데, <차임>의 세계가 정확히 그렇다. 강사를 따라 맥없이 칼질하는 수강생들, 영화에서 본 것은 있는 듯 이곳저곳 들추기만 하는 형사, 모여서 밥은 먹지만 그외의 것들은 모두 어긋난 가족, 타인의 폭력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인간들의 자동적 톱니바퀴가 목적 없이 맞물릴 뿐이다. 이 톱니바퀴가 돌고 돌다가 어떤 신호를 건드리는 그때, 기원을 알지 못하는 차임벨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들려올 것이다. 요컨대 <차임>은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세상의 모습이며, 1시간 아래의 상영시간은 이 세상의 정수를 보여주기에 딱 알맞은 부피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 초청작.

close-up

한낮의 카페, 마츠오카는 레스토랑 셰프가 되기 위한 면접 중이다. 무난한 컷 구성으로 마츠오카와 상대의 대화를 찍던 카메라는 돌연 카페 유리창 바깥으로 이동해 도심의 앰비언스를 증폭하고, 행인들의 모습을 창문에 비춘다. 이 돌출적인 숏의 정체를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묻는다면 아마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와 같은 선문답이 돌아오기 마련이겠지만,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츠오카가 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난 듯한 이 장면의 감각은 <차임>의 인상적인 대목을 차지한다.

check this movie

<미드나잇 가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1997

언젠가 구로사와 기요시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2003)에 영향을 받았다며 “상황과 변화는 나오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데에서 영화가 끝난다”(<씨네21>, 590호)라는 설명을 덧붙인 적 있다. <차임> 역시 상황과 변화만 제시되고 정답은 주어지지 않는 영화란 점에서 유사한데, 이스트우드의 또 다른 미궁인 <미드나잇 가든>의 기이한 질서와 더 닮은 듯하다. <미드나잇 가든>의 인물들도 기계처럼 주어진 일들을 반복하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에 휘말리거나 초자연적인 것들과 마주하더니, 다시금 뻔뻔하게 원래 세계로 돌아오려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