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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 바깥의 세계, 오진우 평론가의 <차임>

차임벨은 도대체 언제 울릴까. <차임>을 보는 내내 궁금했던 점이다. 벨이 울린 뒤 주인공이 미치는 인과관계는 이 영화에는 없다. 벨이 울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미쳐버린 후이기 때문이다. 청각적으로 의식하게 만드는 <차임>에서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열차다. 악은 열차를 타고 이미 도착했는지도 모른다. 요리 교실 강사인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쓰오)는 차임벨 소리가 자신을 조종한다고 말하는 이상한 수강생을 마주한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수강생을 대한다. 자신을 외면한 강사를 원망하며 열변을 토한 수강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프라이팬에 양파가 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숏은 원테이크로 찍었다. 얼빠진 수강생에서 정신이 든 모습으로 그리고 다시 영혼 없는 기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숏을 ‘지속’한다. 이 변화만큼이나 숏의 마지막에 수강생의 모습을 길게 담는 것이 흥미롭다. 수강생은 부동자세로 서 있다. 건물 밖에서 열차가 지나가며 빛의 흐름을 바꾸고 강의실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열차의 간격 때문에 언뜻언뜻 생기는 수강생의 그림자. 다음 장면에서 마츠오카는 수업이 끝난 뒤 강의실에 남아 있다. 열차가 또 지나가는지 건물 밖에서 강의실로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보고 놀란다. 당연하게도 그의 시점숏은 없다. 이렇듯 구로사와 기요시가 말하는 ‘외측’(外側)에 존재하는 무언가는 영화 시작부터 내부를 자극하며 스며든다.

폭력이 만연한 외측으로부터

<차임>

외측, 다시 말해 건물 밖 세계는 이미 파국이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마츠오카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전과 동일하게 그는 무언가를 본다. 후경에 때마침 열차가 지나간다. 열차가 내는 특유의 마찰음이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열차만큼이나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도로에 난 이상한 자국이다. 이 자국은 마츠오카의 동선을 예측한 듯 나 있다. 마츠오카는 그 위에서 무언가를 목격했고, 시체를 날랐으며, 형사를 보고 당황하며 물러나기도 한다. 마츠오카는 그림자와 도로에 난 흔적 등 검은 형상에 서서히 잠식당하며 빛을 점점 잃어간다. 그렇게 그의 세계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변한다. 그러한 지옥의 입구가 아마도 마츠오카의 집이 아닐까. 여기서 문은 “공간을 열고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라, 공간을 막고 공간을 부수고 공간을 영원히 닫아버린다.”(<장소의 연인들>, 이광호)

실내극을 표방하는 구로사와의 영화가 그렇듯이 <차임>이 설정한 첫 번째 안팎은 강의실 내부와 열차가 지나가는 건물 밖이다. 두 번째 안팎은 마츠오카의 집 안과 집 밖의 세계다. 그 경계를 가르는 지점에 차임벨이 있다.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마츠오카는 벨 소리를 듣고 절규했을까? 마츠오카는 이미 수강생을 살해했고, 시체까지 유기했다.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해서 살인을 저지른 뒤라면 그는 제정신을 차렸을 때 당황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질 않았다. 그는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칼끝이 애먼 수강생에게로 향한 것이다. 왜 그의 칼끝이 면접관인 비스트로 주인에게 향하지 않았을까? 영화가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형상화하는 ‘악’보다 더 잔인한 악은 자본(가)처럼 느껴진다. 차임벨에 의해 수강생이 인간과 영혼이 없는 기계의 상태를 오갔듯이, 마츠오카는 면접관에 의해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하고 자신의 주관을 쉽게 꺾는다. 그렇게 그의 영혼은 깎여나간다. (이는 사소해 보여도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는 2024년에 구로사와 기요시가 내놓은 세편의 영화에 관류한다.) 살인과 면접 낙방으로 그는 집에 고립된다. 그때 벨이 울린다. 모니터에 비친 눈처럼 껌뻑거리는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차임>의 백미는 마츠오카가 집 문을 열었을 때다. 이상한 굉음이 한꺼번에 마츠오카에게 밀려든다. 집 밖의 세계는 전과는 다른 질감의 잿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는 이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악의 대리인이 된 것일까?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집이다. 그렇게 문은 닫히고 그의 집은 더 이상 내부가 아닌 영원히 알 수 없는 외부가 된다.

<차임>이 구로사와 영화 중에서 남다르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구로사와 영화의 반복되는 테마를 응축한 엑기스 같다. <필름 코멘트>는 <차임>이 “<큐어>의 정신적 후속작”이라 평했다. 두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마미야와 같은 악을 형상화한 존재가 <차임>에는 없다는 것이다. <큐어>가 옴진리교 테러 사건에 대한 진단으로 볼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어느 한 골목을 담은 엔딩 장면에 칼로 찢긴 듯한 효과를 낸 것은 영화 밖 세계를, 다시 말해 구로사와 자신이 21세기 영화의 특징으로 꼽은 외측을 의식한다고 볼 수 있다. <차임>은 외측을 적극 활용하지만, 영화 내에서 장르적 효과를 만드는 데서 그친다. 모든 감독이 영화 밖 세계를 꼭 의식하며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다. 구로사와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그는 분명 영화 밖 세계를 의식하는 작가임은 분명하다. 정지연 평론가는 구로사와와의 대화에서 그가 말한 ‘부채의식’이란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구로사와는 시대를 향한 시선이 영화에 필연적으로 투영할 수밖에 작가다. <구로사와 기요 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하다>에서도 구로사와가 말한 부채의식이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영화의 외측으로 세계가 펼쳐져 있고 거기서는 폭력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영화는 원리적으로 거기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실은 이미 100년도 전에 영화가 탄생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요.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책임을 지금에야말로 져야만 합니다. 그러한 인식 위에 선 영화를 저는 21세기의 영화라 부르고 싶습니다.” 구로사와는 이 말을 한 강연에서 다른 감독의 영화들을 예시로 들었지만, 실은 그는 스스로 21세기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차임> 이전에 <큐어>를 소환하는 작품이 있다. 정지연 평론가는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이 <큐어>와 닮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반복’의 세계를 재현하는 작가라고 말하며 중요한 질문을 그에게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지금 또다시?” 그녀는 “<크리피>는 일본 사회를 인식했던 감독의 시선이 20여년 전보다 더욱 처참해졌음을 보여준다”라고 평했다. 대략 10년 정도의 텀을 두고 20세기 말의 무드를 장착한 구로사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가 왜 절망적인 영화적 세계를 다시 들고 왔는지 궁금하다.

<클라우드>

구로사와 기요시는 2024년에 무려 3편의 영화, <차임><뱀의 길><클라우드>를 공개했다. 국내엔 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되고 몇몇 기획전을 통해 3편의 영화가 최근까지 상영된 바 있다. 이 세 작품은 구로사와의 또 다른 절망 3부작처럼 보인다. 1997년 작품인 <큐어>를 연상시키는 <차임>은 짧은 러닝타임 안에 장르적 쾌감을 추구한 호러영화다. 소품처럼 느껴지는 <차임>에서도 중요한 장면이 있다. 마츠오카는 강의실에서 무언가를 보고 기겁하고 건물을 빠져나오기 전에 거울을 들여다본다. 비슷한 장면이 구로사와가 1998년 작품인 <뱀의 길>을 스스로 리메이크한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차이점이라면 손에 든 권총이다. 복수를 향한 총구는 결국 자신을 향한다.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숏이다. 아쉽게도 <뱀의 길>(2024)은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이유는 모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작 <뱀의 길>(1998)은 시작부터 구로사와의 시그니처인 스크린 프로세스 방식으로 찍은 자동차 신을 보여준다.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자동차 안의 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바로 파악할 수 없다. 이미 진행 중인 상황에 우리를 내던지는 식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중간에 니지마(아이카와 쇼)가 학생들에게 수업하는 장면에서 배가된다. 칠판에 알 수 없는 수식들을 적으며 문제를 푸는 학생에게 니지마는 그렇게 풀면 공간이 뒤집히고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세계가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여전히 아리송하고 매력적인 이 장면은 <뱀의 길>(1998)을 특별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리메이크작에서 구체화한 것이 아마도 앞서 언급한 거울 앞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장면일 것이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구조. 알베르(다미앵 보나르)와 니지마(시바사키 고)는 자신의 자식을 납치한 용의자를 추적하여 납치하고 외딴 창고에 감금한다. 납치 이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스너프 비디오의 촬영, 생산, 판매 등 일련의 유통과정이 드러난다. 이 연결망에서 알베르는 판매를 맡았었고,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파는지 몰랐다. 니지마가 알베르의 세계를 뒤엎어버린 설계자다. 그녀가 알베르에게 스너프 비디오를 강제로 보게 한다. 이를 통해 그를 연결망의 끝에 존재하는 소비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뱀의 길>(1998)에서 미야시타(가가와 데루유키)가 귀를 막고 외면하다가 결국 스너프 비디오에 매료돼가는 특유의 몸짓과 표정을 훌륭하게 선보인다. 하지만 리메이크작에선 그런 것들이 전혀 표현되지 못했다. 그나마 리메이크를 통해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은 1998년보다 지금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러 행위자들간의 연결망이다. 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신의 행위의 무게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자의 최후는 <클라우드>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다. 요시이(스다 마사키)는 물건을 싸게 매입해서 온라인에서 비싸게 되파는 리셀러다. 그가 웹페이지에 상품을 등록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모니터를 응시하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모니터를 비추다 패닝하여 상품이 들어 있는 상자를 보여주고 그 끝에 요시이의 얼굴을 담아내며 클로즈업한다. 품절된 상품이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화면과 요시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여준다. 모니터와 안심하는 요시이의 얼굴 사이에는 아무것도 매개된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단순하게 판매라는 행위를 통해 이득을 취할 때, 울며 겨자 먹기로 싼 가격에 물건을 판 사람들을 포함해 소비자까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요시이의 행위는 영화 제목처럼 먹구름을 몰고 오는 것이며, 종국엔 연관된 모든 인물이 한 장소에 모여 파멸로 향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단순해 보이지만 요시이에게 불어닥칠 후폭풍을 예견한다.

요시이가 마주할 불행은 정면에서 다가오지 않는다. 느닷없이 뒤에서 다가온다. 요시이가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면서 애인과 장밋빛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버스 안에서 뒷좌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내리는 장면이 있다. 순간 음소거를 시키며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이와 동시에 요시이가 전혀 눈치챌 수 없는 방식으로 절망은 정면에서도 다가온다. 요시이의 조수로 입사한 사노(오쿠다이라 다이켄)가 그러한 인물이다. 사노는 친절하고 요시이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준다. 하지만 컴퓨터를 봤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하지만 사노는 요시이를 떠나지 않는다. 이런 점이 그가 이해할 수 없고 무서운 이유다. 영화에서 그의 전사는 그려지지 않는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집사 같은 사람과 접선하여 총을 받고 납치된 요시이를 구하러 간다. 그에겐 광적이고 맹목적인 충성만이 존재한다.

파국은 게임처럼

<뱀의 길>(2024)

영화 마지막에 벌어지는 한바탕 난리극은 게임과 같다. 인터넷에서 요시이를 죽이겠다고 사람들이 팀을 짜서 출동한다. 게임처럼 요시이를 죽이러 사냥을 시작한다. 결국 모두가 죽고, 승리자는 사노다. 사노는 요시이를 죽이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게임을 진행시킬 수 있는 자본을 지닌 사람이다. 사노는 요시이를 구해서 차를 타고 이동한다. 스크린 프로세스 방식으로 찍은 자동차 신에서 배경은 먹구름으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노는 요시이에게 돈 벌 궁리만 하라고 말하고, 요시이는 자신이 지옥의 입구에 와 있다고 깨닫는다. <클라우드>를 보고 나면 <크리피>의 엔딩에서 보여준 각성과 절규는 어쩌면 희망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클라우드>의 엔딩에서 사노는 요시이를 서포트하는 쪽이지만 운전대를 쥐고 있다. 요시이는 조수석에 앉아 자신의 상황을 체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2024년에 내놓은 세 작품을 통해 그린 주인공 모두 삶의 주도권을 잃고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인물이다. 바깥에서 희망의 빛이 들어갈 틈새가 존재할까. 구로사와의 시선은 한층 더 깊어진 절망의 끝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