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긴급한 현실을 다룬 두편의 영화가 한국에 도착했다. 3월 초 개봉한 <노 어더 랜드>(감독 바젤 아드라, 함단 발랄, 유발 아브라함, 레이철 소르, 2024)는 2019년에서 2023년 사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 마을 마사페르 야타에서 벌여온 만행을 따라가고, 4월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힌드의 목소리>(카우타르 벤 하니야, 2025)는 2024년 1월29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으로 차 안에서 구조를 요청하다 살해된 6살 힌드 라잡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전자는 팔레스타인 거주민 활동가와 이스라엘 저널리스트가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이고, 후자는 튀니지인 감독이 힌드 라잡의 마지막 음성이 녹음된 파일을 중심에 두고 픽션과 다큐적 요소를 혼용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 영화다.
이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 2026년 3월16일, 포털 뉴스에서는 가자와 서안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어린이와 임산부를 포함해 16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온다(<연합뉴스>). 기사는 가자 지구 보건부의 말을 인용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협상이 이루어진 2025년 10월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인 670명 이상이 죽었다고 밝힌다. 지난 2월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에서 일으킨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악화일로에 있고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은 이어지고 있다.
쿠바 출신의 영화평론가 질베르토 페레스는 1998년에 펴낸 <영화, 물질적 유령>의 첫 번째 챕터인 ‘다큐멘터리 이미지’라는 글에서 “뉴스릴의 긴박함은 그때 거기의 긴박함이지 지금 여기의 긴박함은 아니”므로 “카메라가 현재 시점으로 말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스크린으로 볼 때 그것은 이제 과거가 된 현재”이며 그 장면들이 전달하는 “죽음의 통절함”은 “현재적 긴급함을 지닌 과거로부터 현재의 우리에게 도달한 통절함일 뿐”이라고 다큐를 성립시키는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필연적인 시간 간극을 명시한다. 그 통찰이 <노 어더 랜드>와 <힌드의 목소리>에도 매끄럽게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페레스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두 작품이 증언하는 “그때 거기의 긴박함”은 현재를 직설적으로 비추며 “지금 여기의 긴박함”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관해서라면, 시간의 경계를 기점으로 삼는 사유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서구 중심 언론이 편파적으로 전하고 은폐하던 팔레스타인의 구체적인 현실을 두 영화가 자신의 존재로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 무슨 이야기를 더할 수 있겠는가. 어떤 ‘영화적’인 분석도 궁색하고 미진하게 들릴 것이다. 그 한계를 우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선택된 파편들의 배열, 그러니까 현실이 아니라 그에 대한 리액션의 지평이다. ‘있는 그대로’는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지키려는 가치일 수는 있어도 성취할 수 있는 고정된 목적지일 수는 없다. 후자를 확신하는 영화를 우리는 신뢰하기 어렵다. 특정 다큐멘터리가 세계에 대한 최선의 정당하고 진실한 리액션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객관적 리액션이라고 강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진짜 삶’이라고 호소하는 두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들이 마사페르 야타에서 겪은 4년을 92분으로 응축해 편집한 <노 어더 랜드>나 힌드 라잡의 신고 전화를 받은 적신월사 내부의 반응을 픽션으로 구축한 <힌드의 목소리>는 순간의 뉴스 정보가 아니라 화법과 태도와 파급력을 고심한 동시대 개별 ‘영화’로서 우리 앞에 현전한다. 더없이 급박한 현실 한가운데에서 이들이 자신의 몸체에 새긴 영화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에 대해, 영화와 세상 사이에서 분투하는 방식에 관해 먼저 응답할 필요를 느낀다.
<노 어더 랜드>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미지는 마을에 침입한 이스라엘군의 불도저가 허허벌판에 자리한 작은 건물을 무참히 밀어버리는 장면이다. “우리 집을 부수고 있어!”라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등장한 이미지는 영화 내내 마을에 남은 다른 집들 장면에서도 계속된다. 끔찍한 건 비탄을 자아내던 극단적 사건의 이미지가 어느덧 영화 안에서 저항할 수 없는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후반부에는 매일 한채씩 불도저에 무너지는 집 이미지들만 이어붙인, 철거 몽타주 시퀀스라고 부를 만한 대목이 나오기에 이른다. 인간의 집이 지닌 맥락과 세부를 모조리 단번에 짓밟아 ‘무’로 되돌리는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절멸의 움직임. 주민들이 이스라엘군의 액션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 순간을 카메라로 쫓아 기록하고 집이 무너지기 직전에 세간살이를 꺼내 바깥으로 옮기고 다시 집 짓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궁핍하고 단순하게 축소된 삶의 선택지와 범위 안에서 수세적인 행동을 지속하면서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견디는 힘이 <노 어더 랜드>의 한축을 이룬다면, 영화에 삽입된 감독 바젤의 과거 영상들이 다른 한축을 버틴다. 저화질의 거친 화면으로 이 마을의 뿌리를 입증하는 그 장면들은 바젤의 개인사이자 마사페르 야타의 집단적 기억이며, 이들이 투쟁을 이어가면서도 포기한 적 없는 삶의 구체적인 경험담으로서 이스라엘군이 거듭 제거하려는 마을의 역사성과 개별성의 복원을 시도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하는 물리적, 정신적 말살 정책에 이 영화가 사후적인 몽타주의 역량으로 맞서는 방식일 것이다.
<노 어더 랜드>는 그러나, 영화의 그러한 역량을 과신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현장의 카메라가 겪는 반복적인 패배와 낙담 또한 이 영화가 부정할 수 없는 현재성이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무기’라는 말은 그것이 일촉즉발의 현장을 기록하는 유일한 저항 수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겠지만, 그 현실을 살지 않는 외부인의 다소 낭만화된 수사이기도 하다. 이 무기는 불도저의 폭력으로부터 집을 지키지 못한다. 이 무기는 사람을 겨누는 적의 총을 이기지 못한다. 이스라엘군에 마을의 발전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던 주민과 마을에 쳐들어온 정착민과 실랑이를 벌이던 바젤의 사촌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 카메라는 불시에 벌어진 학살의 장소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그 순간을 예비하지도 막아서지도 못한 채, 공포와 당혹감에 휩싸여 속수무책으로 요동할 뿐이다. 이 순간의 화면은 편집을 통해 사후적으로 획득될 의미를 기다릴 틈 없이 희생자들을 당장 지켜낼 외부와의 실시간 연결을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지만, 한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카메라는 그 연결의 실패를 예견한다. 발전기를 사수하다 총에 맞은 이가 병원에서 돌아온 후, 카메라는 그의 텅 빈 눈동자와 마비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사람을 죽음에서 구하기에 카메라의 기동력은 더디다. 편집의 활동력은 더더욱 느리다.
마사페르 야타의 주민들과 영화의 감독들에게 흔들리고 초점 잃고 내동댕이쳐지는 핸드헬드카메라의 질감과 움직임은 매일같이 그들이 감내하는 폭력의 예측할 수 없는 경로와 수준, 그들이 속한 세계의 속성과 유사할 것이다. 죽음과 절멸의 장소에 입회한 카메라의 투지는 그 상황에 개입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무력감 또한 동반하고, 그 양가적 상황과 심리가 핸드헬드의 필연성을 낳는다. <노 어더 랜드>의 핸드헬드카메라는 현장감을 극대화하거나 긴장감을 도모하려는 화법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의 잠재성을 시험하는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선택지 같은 게 아니다. 공교롭게도 역시 핸드헬드카메라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힌드의 목소리>에서 그 운동성은 픽션에 적극적으로 기댄 작품답게 <노 어더 랜드>와는 달리 목적과 효과를 의도한다. 이 영화는 실화에 근거해 적신월사 대원들이 힌드가 고립된 장소를 고작 8분 거리에 두고도 봉쇄된 길을 뚫지 못해 소모하는 시간을 다룬다. 영화는 차 안에서 홀로 구조를 기다리던 힌드의 처지, 당시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그 순간을 이미지로 조악하게 재현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대신, 힌드의 어머니와 대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구상한 적신월사 내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데, 핸드헬드카메라는 접근할 수 없는 바깥의 위태로움과 급박함에 반응하는 ‘안’의 감정을 부각하는 데 쓰인다. 바깥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한 채, 핸드폰 너머 아이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는 대원들을 분주히 요란하게 오가며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 그들의 얼굴과 동선을 극대화하면서 아이의 생존 여부를 둘러싼(우리는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서스펜스를 구축하려 드는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러한 설계가 체제의 무능함과 사악함, 감독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죄의식을 건드리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클로즈업된 이들의 얼굴에 흘러넘치는 감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허구가 배우들의 얼굴에 허락한 눈물은 누구를 향한 슬픔인가. 그것은 마치 힌드를 구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이처럼 무자비한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나’를 가여워하는 눈물처럼 보인다.
핸드폰으로 구조를 요청하다 살해된 힌드의 실제 목소리를 별 망설임 없이 허구로 불러들인 감독의 선택은 물론 비판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지적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힌드의 오디오파일이 픽션 속 인물들의 반응과 접속할수록 영화 초입에서 그 음성의 실재성이 안기던 충격과 각성은 점차 사그라든다. 어느덧 서사의 일부로 흡수되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 속에서 진실은 거짓에 의해 방해받는다”라고 로베르 브레송은 말했던가(<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힌드의 목소리>도 이 점을 염려한 것 같다. 이를테면 힌드와 대화하던 과거 구조대원의 음성이 그를 연기하는 배우의 목소리로 디졸브되듯 이행하는 대목들은 현실과 허구의 교차점을 굳이 인위적으로 노출한다. 영화 후반, 적신월사의 직원들이 가자에 파견된 요원들과 힌드의 생사에 촉각을 기울이는 장면에서는 이들을 촬영하는 핸드폰이 불쑥 끼어드는데, 작은 화면 속 주인공들은 놀랍게도 배우가 아니라, 그들과 꼭 닮은 실제 인물들이다. 실존 인물들이 하던 행동과 말을 배우들이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프레임 안에서 배우와 그들의 원 모델이 공존하는 어색하고 기괴한 광경으로 재차 명시된다.
일련의 장면들에는 사건의 감정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진짜’의 속성이 퇴색될지 모른다는 감독의 조바심이 묻어난다. 허구를 욕망하면서도 다큐를 추구하려는 시도의 난망함, 두 양상을 고르게 분배해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착각도 엿보인다.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덜컹대던 영화는 결국 실제 영상을 덧붙여 현실로 빠져나오는 결말을 택한다. 딸의 죽음을 언급하는 힌드의 어머니나 사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요원들의 모습은 이야기 안에서 감정을 토해내던 배우들의 초상과 달리 건조하고 묵묵하다.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힌드의 목소리>가 감행한 형식적 시도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가는 죽음의 일상이란 허구 속 죽음의 드라마가 가공한 정념으로 닿을 수 없는 지대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힌드의 목소리>와 달리 <노 어더 랜드>는 눈물을 찍지 않는다. 전신마비가 된 아들의 운명에 흐느끼는 어머니나 철거당하는 집 앞에서 울부짖는 여인을 응시할 때도 영화가 눈물에 호소하거나 심취한다는 인상은 들지 않는다. <노 어더 랜드>가 주시하는 것은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땅 마사페르 야타를 지탱해온 내적 질서다. 이스라엘군이 철거를 반복하는 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집 짓기를 반복한다. 이 질서는 이들이 굳세게 고수해온 마사페르 야타의 역사성이지만, 그건 매번 원점으로 돌아가 잔해 위에서, 빈 땅에서 새로 시작하는 고달픔과 공허감을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장면이 있다. 푸른 셔츠를 입은 한 소년이 불도저에 파괴되는 집 앞에서 격렬하게 항의하자,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이 그를 위협하고 겁에 질린 아버지가 아들을 말린다. 원망과 분노,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로 들끓는 소년의 얼굴을 지나면 철거 현장의 소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침묵 속에 자리한 바젤의 모습이 보인다. 그도 푸른색 상의를 입고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을 마치 서로의 과거와 미래인 듯 연결한다. 그러나 여기서 과거와 미래라는 시제의 방향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대목의 연속성은 마사페르 야타의 폐쇄된 시간을 가리킬 뿐이다. 소년의 장면이 철거 현장을 등지고 누워버린 바젤의 체념 어린 형상으로 이어질 때, 영화는 마을 내부에 고인 시간이 과연 그 영토를 초월해 공동의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 씁쓸히 반문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군에 맞서다 전신이 마비된 남자와 그의 어머니를 취재하러 마을을 방문한 백인 저널리스트들은 모자의 현실에 조금도 접속하지 못하는 얕은 동정심, 무의미한 연민의 언어를 남기고 금세 떠난다. 이들을 쳐다보는 카메라의 눈길은 어떤 호기심이나 기대도 없이 무감하기만 하다. 바젤의 말대로 “바깥에서 왔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유발 아브라함은 아무리 이 영화의 공동 감독이라고 해도 바젤이 살아온 ‘안’의 시간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군과 싸우던 유발이 이스라엘로 향하는 차에 올라 “나는 집에 갈 거야”라고 바젤에게 던지는 태연한 말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가혹한 대사로 들리고, 유발이 사라진 화면 안에서 엉거주춤하는 바젤의 형상은 가장 처연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영화에서는 볼 수 없으나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유발의 안온한 집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철거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위태로운 집과 불가분의 관계에 존재한다고, 바깥의 자유는 안의 희생과 착취를 대가로 삼는다고 이 장면은 고요히 주장한다.
영화 속 한 인물은 한탄했다. “삶이 집에 저당 잡혔어.” 이들의 집은 시간을 제대로 겪고 살아낼 기회를 박탈당한다. 언젠가 또 부서질 걸 알면서도 터전을 세우고 또 세우는 일로 팔레스타인의 연속성을 지키는 삶의 연대기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군이 집을 무너뜨리는 장면 안에는 언제나 노인과 아이가 서 있다. 불도저가 쓸어버린 집, 과거의 세부가 모조리 짓뭉개진 집은 어떤 기억을 보존할 수 있을까. 다시 지었으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집에서는 어떤 서사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시간이 누적될 수 없는 집에서는 어떤 상상력이 태동할 수 있을까. 노인은 아이에게, 바젤은 푸른 셔츠를 입은 자신과 닮은 소년에게 총과 불도저와 군인 이외에 집과 관련된 다른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이 물음들을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삶, 그것이 <노 어더 랜드> 속 팔레스타인의 현실이다.
<노 어더 랜드> 결말에는 2023년 10월에 영화를 마무리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바젤이 마을에서 찍은 마지막 영상”이라는 자막과 함께 그의 사촌이 정착민이 쏜 총에 쓰러지는 영상이 이어진다. 이 사건은 하마스가 분리 장벽을 넘어 이스라엘인들을 납치하고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보복을 약속하며 가자 지구에 무차별 공격을 시작한 10월 7일 이후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말에 이르기 전, 영화 후반부에 삽입된 한 장면의 시제가 뒤늦게 의아함을 안긴다. 차창에서 바라본 눈 내리는 풍경에는 ‘2023년 겨울’이라는 자막이 달린다. 시간상으로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마지막에 위치할 장면이 아닌가. <노 어더 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할 만한 이 대목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이 그 어느 때보다 극악해지던 시기 아닌가. 더욱이 다음 장면에서 눈은 오간 데 없고, 마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스라엘군의 철거 위협에 시달리며 황량한 공기 위로 바젤의 음성이 흐른다. “떠나지 않는 게 가장 힘든 투쟁이다.” 영화가 끝난 뒤, 생각해본다. 철거된 집의 잔해들이 하얀 눈에 뒤덮이고 신이 난 동네 아이들이 카메라를 향해 눈덩이를 던지던 ‘2023년 겨울’ 장면은 수많은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이 이내 몰아닥칠 그 땅에 영화가 미래 어딘가에서 데려온 꿈결 같은 평온함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