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네 번째 키워드는 ‘생태 변이’다.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에 이어 21세기 전후로 영화산업과 비평의 생태계 곳곳에서 나타난 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영화 매체 안팎의 환경이란 시대에 따라 변모하기 마련이고, 종종 모종의 돌연변이를 배출하기도 한다.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영화평론가 에이드리언 마틴이 ‘생태 변이’의 문을 닫는다. 21세기의 고밀도 디지털 사회에서 영화비평이 어떻게 생성되고 소비되며, 그 속의 단어들이 어떠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지 짚었다. 배드 버니의 슈퍼볼 하프타임 쇼부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누벨바그>를 종횡하는 에이드리언 마틴 특유의 비평적 유희가 흥미롭다. AI의 뻔한 낙관과 수사를 지적하는 동시에, 무척이나 긍정적이고 단순한 문장, “함께할 때, 우리는 영화다”로 글을 맺는 방식 역시 그의 장난스러움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후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는 21세기 영화가 20세기로부터 전승, 변주하거나 새로이 생성한 움직임들을 살필 예정이다.
함께할 때, 우리는 영화다
21세기 영화비평의 생태계 속 새로운 단어와 패러다임
의심의 여지없이, 2026년의 가장 중요한 시청각적 이벤트는 2월21일 슈퍼볼에서 펼쳐진 배드 버니의 하프타임 쇼였다. 수백명에 달하는 퍼포머가 가세하여 14분가량의 공연을 이어갔다. 경기장 한가운데에 복잡한 미로처럼 설계된 정글 세트장에서 배드 버니는 걷고, 달리고, 노래하고, 이야기했다. 혼자만의 쇼는 아니었다. 그는 이 행로에 서 있던 수많은 이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했다. 이중 어떤 커플(배드 버니의 푸에르토리코 출신 팬.-편집자)이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했으니 덧붙일 말은 없겠다. 공연 연출가 해미시 해밀턴과 능숙한 기술팀은 수많은 카메라를 무척이나 적확한 타이밍에 움직이고 스위칭하며 무대를 촬영했다. 어떤 카메라는 그라운드 위의 배드 버니를 쫓았고, 어떤 카메라는 소란스러운 현장의 꼭대기에 주둔하며 전체를 조망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관계, 한 구역과 또 다른 구역을 연결하는 통로들의 배치와 매끄러운 연결까지 단 하나의 흠결도 없었다.
공연이 끝나기는커녕 이것이 한창 펼쳐지고 있을 때마저 소셜미디어에선 각종 논평의 해일이 일었다. 페이스북, 엑스(X),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21세기 영화비평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임을 누구도 부정할 순 없다. 이러한 소셜미디어, 또한 서브스택(Substack)이나 미디엄(Medium) 등의 플랫폼에 실린 의견들은 사회학적이거나 사회정치적인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배드 버니는 슈퍼볼 무대에 오른 최초의 라틴계 단독 헤드라이너이자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레이디 가가와 리키 마틴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스타였다. 이 스타가 스페인어권 지역의 문화를 드러내고 존중하면서 오로지 스페인어로만 공연을 채웠다. 이에 트럼프는 개인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을 통해 “아무도 저 친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극도로 끔찍한 일”이라는 불평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그 대척에서 배드 버니는 전세계가 기꺼이 받아들일 법한 한쌍의 메시지로 공연을 끝맺었다. “혐오보다 강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리고 “함께할 때, 우리는 미국이다”(Together, We Are America)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잠시, 이쯤에서 사회정치학적 논의는 잠시 미루려 한다. 대신 이 하프타임 쇼의 스펙터클을 20세기 영화평론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우선 최대한 간단하게 말해보자. 그래, 경이로운 미장센(mise en scène)이었다. 세트, 안무, 시각적 구성, 음향디자인까지 모든 요소가 탁월한 숙련도와 독창성으로 구성되고 조정됐다. 소소한 희극과 비극의 순간들이 뮤지컬적 가무와 곡예, 대사 곳곳에 적절히 배치되었다. 다만 나는 스스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내가 저 경기장에 앉아 있었다면 저 스펙터클의 어느 영역까지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인가. 무성한 인공 수풀 사이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었을까.
답변은 자명하다. 거의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저곳에 있었던 대개의 관중마저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을 응시했을 테다.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봤을지도 모른다. 즉 이것은 우리 시대에 적용되는 ‘이중구조 미장센’의 사례다. 실연인 동시에 TV나 유튜브에 영원히 박제될 송신인 셈이다. 이러한 이중 원리는 매년 개최되는 유로비전송콘테스트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2025년 한국어로 번역된 필자의 저서 <미장센과 영화 스타일>에서도 이 대목을 짚은 바 있다. 하프타임 쇼나 유로비전송콘테스트 등을 여전히 미장센이라는 용어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단어의 개념을 새로 구성해야 할 것이다. 이제 미장센은 무대 위의 배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의미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방대한 규모에서 섬세하고 고도화된 기술력으로 이뤄지는 ‘시각 전환’(vision switching)에 가까워졌다.
우리는 증식하는 스크린들 속에 살고 있다. 매일 접하는 문화의 양상이다. TV 뉴스 하단에 끊임없이 흐르는 자막을 보고, 컴퓨터의 온갖 창들을 여닫으며 웹을 탐험한다. 이 과정에서 아주 많은 ‘스크린 속 스크린’을 경험한다. 한때 영화이론가들이 미장센의 ‘전(前)영화적’(pro-filmic) 양상이라고 언급하던 요소들, 다시 말해 감광성을 지닌 카메라 앞에 배치된 자연주의적 실재성과 인간의 육체성은 이제 본질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 점차 이것들은 알고리듬화된 데이터 은행 속에서 속절없이 변형되고 재배치되는 디지털 원재료에 가까워지고 있다. AI 기술이 영화제작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근래의 불안 역시, 미장센의 통치 체제가 대대적 전환기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다. 예전부터 사운드-이미지의 신호를 조합하고 충돌시켜온 아방가르드 영화감독과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실험으로부터 충분히 예견된 바다.
그중 근래 시청각 문화의 거대한 전환을 누구보다도 단정적으로 예견했던 인물은 2022년 세상을 떠난 장뤼크 고다르다. 그는 <중국여인>(1967) 등을 통해 “두 전선에서의 투쟁”이라는 맥락을 사색했다. 두 전선이란 응당 예술의 전선과 정치의 전선이다. 혹은 1942년의 마오쩌둥을 인용하여 “정치적 내용”과 “예술적 형식에서 가능한 최상의 완벽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의 영화비평가들이 겪고 있는 투쟁의 형국 역시 이와 정확하게 똑같다는 것이다. 다수의 오스카상을 손에 거머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를 예시로 가져와보자. 개인적으로는 무척 사랑하는 영화이며 감독의 최고 성취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평단과 소셜미디어의 기록을 뜯어보면 영화에 대한 무수한 반대 의견을 발견할 수 있다. 비판의 맥락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원작 소설 <바인랜드>(Vineland)가 묘사한 1960년대 좌익의 정치적 액티비즘과 1980년대의 잔여 테러리즘 사이의 분열 양상을 가져와 21세기 어딘가에 뒤죽박죽으로 투사했다는 점이다. 감독도 <사이트 앤드 사운 드>와의 인터뷰에서 일견 동의한 측면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아주 의도적으로 “연속적인 현재”에 배치했으며, 이것이 관객의 시선에서 명확하게 단정지을 수 없는 “액체적”(liquid-y) 시기라고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존 휴스턴이나 베르트랑 보넬로와 같은 감독들 역시 몇몇 작품에서 모호하고 연속적인 시간성을 채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의 핵심을 특정 날짜에 고정되는 사건이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현상으로 통찰했다면, 그의 선택은 전적으로 유효하다.
둘째, 이 영화가 혁명 투쟁에 평생을 헌신해온 이들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라는 주장이 있다. 제발 그만. 이러한 의견을 내는 관객들은 스크린 속 인물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듯하다. 이제 영화가 툭툭 던지는 농담과 풍자를 수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와버렸나 싶다.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적 광신주의의 면모란 스탠리 큐브릭적인 풍자의 논조에서 충분히 다뤄질 수 있는 재료이며, 그래야만 최소한의 가치라도 얻게 되는데 말이다. 동시대적인 ‘정체성 정치’가 아예 영화비평 위에 군림하게 될 때, 비평은 더 경직될 수밖에 없다.
셋째, 영화가 흑인 여성 캐릭터(퍼피디아)를 ‘문란한 혁명가’로 터무니없이 소모했으며, 그녀를 마조히즘적 파시스트 스티븐 J. 록조의 ‘일차원적’ 인물상과 비슷하게 연결했다는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어떠한 종류의 유형(types)을, 혹은 내가 즐겨 쓰는 표현에 따라 어떠한 형상(figures)을 캐릭터에 적용하고 있는지 따지고 싶은가. 당연히 그렇다! 수천명의 훌륭한 이야기꾼과 감독들도 그리하고 있다. 우리가 영화 속의 모든 인물에게 완전히 개별화된 ‘3차원적’ 심리적 사실주의를 요구한다면, 정체성 정치의 전형적 부작용인 유아적 거울 단계에 매몰될 뿐이다. 현실의 자신이 아주 복잡한 인간이니만큼 스크린 속의 또 다른 자아 역시 똑같이 그래야만 한다는 논리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캐릭터를 향한 저 두 가지의 가정이 항상 옳지는 않다. 특히 예술문화를 대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더욱더 유용하지 않은 방법론이다. 오히려 고정관념이란 온갖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특질들을 역동적인 방식으로 압축하는 기호적 표현의 중요한 형태다. 적어도 나에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훌륭한 영화다. 잘 다듬어지고, 잘 편집되고, 잘 촬영했고, 잘 연기했다는 뜻만은 아니다. ‘전문적’ 상찬은 이미 오스카상으로 적절히 보상받은 자명함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영화비평이 되기 위한 노력은 진부하고 너드적인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려는 자기 고양과 같다. 유사한 맥락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 또한 필름 메이커로서의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로 ‘가족’이라는 테마를 관철해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가족이란 “결국 누구라도 진정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차원에서 정리될 문제 따위가 아니다. 비평가에게 중요한 문제란, 폴 토머스 앤더슨이 그의 영화를 형성하는 힘과 영향력의 복합적 흐름 속에 어떻게 연출자의 자아를 쏟아붓고 있는지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그는 정치와 가족이라는 공사의 문제를 동등한 차원에서 다루려 노력한다. 영화의 요소들이 매시간 생동하고 끝없이 이동하며 혼돈의 양태로까지 나아가는 동안에도 이 수행은 계속된다. 이러한 혼란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고찰해야 할 현대적 실재의 분명한 일부다.
앞서 AI가 초래하는 ‘공포’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관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개인적 경험 하나를 공유하며 지금까지의 숙고를 잠정적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지금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는 동시에, 최근 호평받았던 한 영화를 다운로드해 감상했다. 이 두 행위 사이를 오고 가며 느낀 바는 다음과 같다.
AI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초 수천, 수만 군데에서 정보성 산문을 생성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 문장들이 드러내는 특정한 톤이나 수사를 대부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집요하리만치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통해 문화의 모든 측면을 납작하게 일반화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AI에게 프랑스 누벨바그 시대 속 안나 카리나의 위상을 물어본다고 치자. AI는 그때의 안나 카리나가 너무나 아름다웠고, 당대 파리의 활기는 놀라웠으며, 고다르가 영화의 혁신을 도모했다고 답할 것이다. 안나 카리나와 고다르가 실로 대단한 부부였던 데다가 1960년대가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으로 떠들썩했던 때였음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겉으론 그럴듯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계의 현실성, 복잡다단함, 난점을 조금도 담아내지 않은 클리셰들의 단순한 나열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토록 텅 빈 클리셰의 선율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에서 거의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 제작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누벨바그>는 방대한 문헌조사를 선행하여 당대의 파리를 재현했다. 그 결과, 영화는 지나치게 나긋한 향수와 낭만주의적 신화라는 거름망을 통과하며 중요한 것들을 여과해버리거나 희석해버리고 말았다. 고다르는 어떠한 복잡함도 없는 즉흥적 천재로 묘사되기만 한다! 검정 선글라스 뒤에서 장난만 치는 이다. 촬영장이란 마법의 장소에서 몇개의 현실적 위험을 감수하기만 하면 영화가 알아서 재발명되는 듯 보인다. 귀여운 카페들을 자랑하는 파리의 공기 중엔 사랑의 기운만 감돌 뿐이다. <타임>의 올리비아 B. 왁스먼이 쓴 <누벨바그>의 제작기 기사를 읽으면 똑같은 방식으로 재탕한 클리셰의 진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얻어낼 핵심은 아주 간명하다. 우리의 호오와 무관하게 우리의 뇌는, 지금의 디지털문화가 규정한 사유의 방식에 완전히 뒤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성이 가장 창조적인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AI의 정보성 문체가 영화의 언어가 되어버릴 지경인 셈이다. 현실의 모든 저변에 스며든 이 뒤엉킴에서 영화비평 역시 탈출하긴 어렵다. 그러니 비평은 과거와 현재, 어느 세기의 통찰력이든 찾아내고 총동원해 자신의 길을 밝혀야 한다. 더 긍정적인 쪽으로 뒤집어 말하자면 함께할 때, 우리는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