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의 정순(염혜란)에겐 매년 돌아오는 제주도의 봄이 버겁다. 8살 이전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바람이 살랑이고 꽃잎이 날릴 때마다 의식을 잃는다. 그 봄날, 정순의 아들 영옥(신우빈)은 ‘민종’ 같은 세련된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다. 서울에서 전학 온 경태(박지빈)가 휘두르는 권력에 부당한 줄 알면서도 매혹되고, 모범생 친구 민수(최준우)는 가까운 듯 멀게 느껴진다. <내 이름은>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세대를 거듭해 통과해온 폭력의 역사를 바라본다. 그중 영화가 가장 공들여 들여다보는 비극은 제주 4·3 사건(이하 4·3)이다. 50년이 넘도록 은폐되기 바빴고, 여전히 이름도 진실 규명도 부재한 이 비극이 ‘대중영화’로 처음 다뤄지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은 시민들과 함께 상처 극복의 뜻을 모아 <내 이름은>을 만들었다. 그의 곁엔 염혜란을 위시한 기라성 같은 한국의 배우들, 그리고 이 작품의 공동 주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신예 신우빈이 함께했다.
-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거행된 4월3일 제주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의미 있는 일자에 의미 있는 장소에서 열린 행사라 현장 반응이 궁금한데.
정지영 제주 도민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영화다. 그래서 베를린, 서울 상영 이상으로 제주 관객들의 평가가 궁금했다. 상영 후 뜨거운 반응을 접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잊을 수 없는 관객도 만났다. 어느 중년 여성이었는데, 자녀가 영화가 그리는 학교폭력과 유사한 피해를 겪고 있다는 감상을 울먹이며 전해왔다.
신우빈 나도 그분을 언급하고 싶다. 상영 후 처음으로 손을 들고 질문을 건넨 관객이다. 고통 속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헤아리며 학교폭력 피해 당사자인 영옥을 연기했다. 내 연기가 아픈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랐다.
- 작품의 원안은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4·3영화시나리오공모전 당선작이었다고.
정지영 원안도 모자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지만 구조는 지금 영화와 많이 달랐다. 이름은 곧 자기 정체성이다. 그래서 자기 이름에 맞는 정체성을 찾는 일은 누구에게든 영원한 숙제다. 그 점에 우선 매력을 느꼈다. 한데 4·3이 상징하는 바에 보다 주목했다. 4·3엔 이름이 없다. '사건' 정도를 제외하면 3·1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이 비극을 명명할 개념이 부재하다. 이름 없는 비극이 어떤 사건인지 모르는 관객을 위해, 다시 4·3을 바라보고 이름까지 찾아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유독 젊은 관객들의 평이 궁금하다. 중장년 관객과 젊은 관객들이 체감하는 4·3의 양상이 다를 텐데, 이념이 배태한 비극이 지닌 무게를 달리 인지하는 것 같다.
- 텀블벅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모금 규모로는 극영화 최고 기록을 플랫폼에서 세웠는데.
정지영 누군가는 만들었어야 하고, 언젠가는 만들어졌어야 할 영화다. 물론 4·3을 다룬 예술영화 몇편이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지만 4·3을 다룬 대중영화가 필요했다. 제주 도민들 또한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규모가 큰 영화가 나오길 바랐다. 그간 4·3 대중영화가 왜 못 나왔겠나. 투자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름은>의 경우 처음부터 크라우드펀딩을 염두에 두었다. 이후 제주와 전국의 오피니언 리더 32명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감사하게도 그 누구도 시나리오 검수를 요구하지 않고 정지영이라는 감독 이름을 향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덕망 있는 분들의 신뢰, 무엇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 모여 만들어진 영화라 내게도 의미가 크다. 수많은 서포터가 작품 뒤에 존재하니 감사하고 든든했다.
- 처음부터 염혜란 배우를 정순의 얼굴로 상정하고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나. 한 차례 같이 작업한 경험이 있는 배우의 속성으로부터 정순이 탄생했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리고자 했던 정순의 특성에서 자연스럽게 염혜란 배우를 떠올렸는지 궁금하다.
정지영 두 갈래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소년들>을 찍으며 염혜란 배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별다른 디렉션을 건넨 것도 아닌데, 고집불통 형사를 배우자로 두었을 법한 여성의 얼굴을 이미 체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자기가 연구해온 배역을 순발력 있게 표현해내는 점에 놀랐다. 염혜란 배우로부터 다음 작품도 같이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자마자 그를 떠올리며 정순을 써내려갔다. 배역에 비해 염혜란 배우의 나이가 젊지만 워낙 이전에도 다양한 나이대를 오간 배우라 큰 문제가 없었다.
- 공동 주연으로 영화 경험이 없는 신우빈 배우를 발탁했다. 어디서 어떻게 찾은 배우인가.
정지영 처음엔 민수로 고려했던 배우다. 우빈이가 오디션에서 민수도 곧잘 연기했거든. 그런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묘하게 착한 눈빛이 어른거렸다. 그래서 우빈이에게 혹시 영옥 역은 어떨지 제안해봤다. 영옥이 주인공이니 당연히 좋았겠지. (웃음)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공부도 잘하는 민수에 비해 영옥은 소극적이다. 이 친구의 착한 얼굴을 감독으로서 이용해보고 싶었다.
신우빈 3차 오디션에서 민수로 함께하자는 확답을 듣고 집에 갔는데, 감독님에게서 혹시 영옥을 연기해볼 생각은 없느냐는 전화가 왔다. 감독님 말씀처럼 기분이 좋았다. (웃음) 바로 영옥의 대사 몇줄을 연기한 영상을 보냈다. 이 작품에 영옥으로 함께할 수 있어 좋다. 민수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지금처럼 4·3의 무게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영옥 입장에서 <내 이름은>을 읽으니 어머니 정순의 존재에 힘입어 이 이야기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 신우빈 배우는 아직 공개된 정보가 많지 않다. 직접 자기소개를 해달라.
신우빈 2006년생이고, 중3 때 배우의 꿈을 꿨다. 이후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지난해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주로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했다. 이후 학부 수업을 본격적으로 듣기 전에 <내 이름은>의 오디션을 봤다. 생애 처음 본 오디션이고, 생애 처음 도전한 매체 연기인데 감사하게 주연을 맡게 됐다.
정지영 내가 봤을 때 우빈이는 타고난 배우다. 염혜란 배우와 별다른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현장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내더라.
신우빈 운이 좋았다. 돌아보면 감독님과 선배 배우들, 현장의 수많은 어른들이 나를 많이 받아주셨다. 가령 감독님의 디렉션에 이견이 있을 땐 적극적으로 감독님에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중 너무 과하다 싶은 건 감독님이 빼라고 하셨지만. (웃음) 염혜란 선배도 언제든 본인이 다 받아줄 테니 하고 싶은 연기를 원 없이 펼치라며 배려해주셨다.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자주 해봤다. 영화에 나온 정순과 영옥의 대사 중엔 애드리브가 꽤 많다. 편집 단계에서 많이 잘리지 않아 좋았다.
- 감독님은 그간 한국전쟁(<남부군>), 군사독재 정권하의 인권탄압(<남영동1985>), 사법부의 졸속 재판(<부러진 화살>) 등 한국 현대사에서 자행된 폭력의 일면을 영화를 통해 응시해왔다. 이번 작품에선 4·3 당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과 1990년대의 학교폭력, 두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정지영 제주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취재하다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제주 도민이 인지하는 폭력의 양태는 통상적인 시각과 조금은 다르다. 제주도의 학교폭력 또한 타 시도와 양상이 일부 상이하다. 감독으로서 이걸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를 본 관객이 그 의미를 찾아 나서야지. 다만 폭력이 세대를 건너 어떻게 세습되는지를 학교폭력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고자 했다. 아마 제주 분들은 영화가 그리는 학교폭력에 좀더 면밀히 반응하지 않을까 싶다. 두 시점 모두에 따귀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에서도 묘사되는 폭력이다.
- 정순은 4·3이 남긴 비극의 잔재를 안고 살아가고, 영옥은 부당한 헤게모니를 쟁취해 부조리를 행사하는 경태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한다. 두 세대의 인물이 각기 다른 폭력에 노출된 셈인데 이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얼마간 폭력에 동조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까지 들여다보는 영화다.
정지영 4·3이 본격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지점이다. 4·3은 대다수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집단학살의 참극을 겪은 유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선 같은 동네 주민을 고발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은폐한 진짜 가해자는 누군지, 우리는 4·3을 통해서라도 똑바로 주시해야 한다.
신우빈 감독님이 촬영 전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책을 추천해주셨다. 시나리오를 읽고 영상을 찾아보고, 다시 시나리오를 읽은 뒤 관련 책을 읽는 과정을 반복했다. 4·3을 공부할수록 더 혼란이 가중됐다. 저 시대에 존재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확신할 수 없어 마음이 더 아프고 복잡했다.
- 정순과 영옥 모자는 각자 결정적 하루를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의 비극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장면 대신 자신의 슬픔을 홀로 감내하는 숏으로 감정을 고조한다.
정지영 관객이 아는 정보를 굳이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정순과 영옥은 같은 날 일생일대의 사건에 휘말린다. 영옥은 정순이 간밤에 비운 술잔을 보고 엄마의 아픔을 짐작하고, 정순은 잠든 영옥이 머리에 두른 붕대를 보고 가슴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이들은 상대방의 사정까지는 묻지 않은 채 아픔을 삭인다. 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통을 알아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신우빈 사실 촬영 10분 전에 완성된 장면이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이 신을 구상한 경위를 들려주셨고, 대본에 없던 감정을 염혜란 선배와 만들어갔다.
- 매일같이 국제 뉴스 속보가 쏟아지는 2026년 4월에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가닿길 바라나.
정지영 한국의 4월은 왜 그리 잔인한지. 그래도 조금씩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내 이름은>이 말하는 내용처럼 함께 연대해 비극을 극복하고,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반성을 통해 해묵은 상처를 화해했으면 한다.
신우빈 4·3 못지않게 우리 영화는 학교폭력의 비참함을 다룬다. 영옥을 연기한 입장에선 이 슬픔 역시 좌시할 수 없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지는 폭력이 단절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