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으로 전달되는 영화의 호흡, 연극무대 위로 체감되는 관객의 리듬을 온전히 즐길 줄 아는 김신록 배우가 ‘2026 프랑스 영화주간’의 홍보대사로 합류했다. 지난 3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을 마친 그는 현재 “MBC 드라마 <오십프로> 막바지 촬영 중”이라는 근황을 전했다. <프리마 파시>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 수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차기작인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제79회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다. 일정이 촘촘히 들어찬 한해를 맞이한 김신록 배우는 국내 미개봉작을 상영하는 프랑스 영화주간에서 관객들과 함께 주목해야 할 감독과 배우를 살펴볼 예정이다.
- 얼마 전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을 마쳤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관객의 반응을 체감하는 순간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듣고 싶다.
첫 장면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사라지고 극장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넘실댄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수조를 채운 물에 잉크를 떨어뜨리고 이 잉크가 전체로 퍼져가는 과정 같다고 할까.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수조 자체를, 그러니까 극장 자체를 포함한 극장 안 모든 존재의 분자구조가 서로 결합되거나 용해되는 일 같다.
- 2026 프랑스 영화주간의 홍보대사를 맡게 된 소감을 들려준다면.
설렌다. 덕분에 올해는 프랑스영화를 부쩍 많이 보게 될 테니 말이다. 마음 같아선 상영작 10편을 모두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극장의 어둠을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프랑스영화의 철학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배우로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 시간이 빌 때 공연, 전시, 영화를 종종 본다고. 프랑스영화도 즐겨 보나.
비주류 영화를 찾아가며 보진 못하고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들 위주로 본다. 최근 재개봉한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남과 여>를 봤는데,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어둠 속에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느슨한 줄거리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재현되는 천진한 전개, 긴 여운과 황당한 압축을 오가는 이상한 시간 감각이 흥미로웠다. 자꾸 쏟아져 내리는 아누크 에메의 풍성한 단발과 깊고 짙은 눈빛도 기억에 남는다. 포스터 문구처럼 이 영화는 내게 ‘모든 멜로영화의 시작’이 됐다. 덕분에 1950~60년대 누벨바그영화들을 더 찾아보고 싶어졌다. 몇년 전 봤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기억난다. 회화처럼 펼쳐지는 풍경과 두 여인의 비밀스러운 로맨스가 밤새워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 혹시 주연으로 참여해보고 싶은 프랑스영화도 있는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2011년 이자벨 위페르 배우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에 출연할 당시 나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이자벨 위페르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온다는 소식이 별세계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영화를 찍고 있으니 반대 상상을 해봄 직도 하겠다. 말이 나온 김에 이자벨 위페르의 필모그래피에서 골라보자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피아니스트>. 그런 도착적이고 비틀린 인물을 연기한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지만, 일생에 한번은 도전해볼 만한 것 같다.
- 이번 상영작 중 궁금하거나 기대하는 영화도 있나.
상영작 리스트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즐거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배우의 마음으로 <파티마가 사랑한 계절>이 가장 궁금하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함과 동시에 칸영화제 여자연기상을 수상한 나디아 멜리티의 연기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인 비주얼 아티스트이면서 조연으로 이름을 올린 박지민 배우도 궁금하다. 인간과 황소가 맞서는 경기에서 22살 네지마가 우승을 꿈꾸는 <아니말>도 보고 싶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존재 증명을 위해 분투하던 네지마가 뜻밖의 실종 사건으로 혼란을 겪는다는 시놉시스도, 네지마가 모래바람을 맞으며 황소 무리 한가운데 선 포스터도 인상적이다. <그랑다르슈의 이름 없는 남자>는 예술가가 정치, 경제, 산업의 일부로 적극 편입될 때 직면하는 혼란과 현실의 벽을 극적으로 세팅하고, 그 가운데서 건축가인 주인공이 예술가로서의 원칙과 비전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조명한다. 주인공이 건축가이니 배우인 나는 거리를 둘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다큐처럼 느껴질 듯해 벌써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사랑의 노래를 불러줘>도 주목하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만난 두 가수가 근 반세기에 걸쳐 사랑하고 배신하고 이별하고 재회한다는 스토리는 사뭇 멜로영화처럼 느껴진다. 반전은 그들의 관계를 대중이 어떻게 소비하며 스타 시스템과 미디어의 생리, 집착적인 팬 문화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는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2055년 근미래의 시점에서 지금의 대중문화예술계를 고찰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밖에도 <환송대, 다섯 번째 샷> <아르토의 땅에서> <여름의 랑데부> <소년 하나 둘 셋> <민들레 오디세이> <그녀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 등 남은 여섯편의 영화도 기대가 된다.
- 특별히 좋아하는 프랑스 배우도 있나.
상반된 연기 스타일의 이자벨 위페르와 이자벨 아자니를 좋아한다. 어떤 방향으로든 끝까지 가보는 배우를 사랑한다. 이제 70대에 접어든 두 배우의 지난 클라이맥스 시절을 좋아해왔지만 현재의 행보를 보며 평생을 배우로 산 그들의 삶을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중이다. 얼마 전 이자벨 위페르와 이혜영 배우가 오는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낭독 공연으로 선보인다는 기사를 접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이번 기회에 이제 막 클라이맥스를 맞고 있는, 프랑스영화의 새로운 얼굴들도 사랑해보고 싶다.
- 곧 프랑스를 방문할 예정이다. <군체>의 칸영화제 초청 소식이 들려왔는데.
<군체> 외에도 <호프>와 <도라> 역시 초청됐다는 소식을 연이어 들었다. 한국영화가 세 작품이나 초청됐다니 든든하고 으쓱하다. 그 유명한 칸영화제에 가본다는 관광객의 마음과 영화의 본고장에 초청받았다는 영화인으로서의 기쁨과 영광, 영화를 사랑해온 전세계 사람들과 만나겠다는 생각에 황홀하다. 영화에 대한 나만의 역사와 사랑을 마음에 품고 거기 모인 많은 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다.
- <군체>와 ‘현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체감된다.
현희는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로 폐쇄된 건물 안에 갇힌 생존자 그룹의 일원으로, 현석(지창욱)의 누나이자 IT업계 종사자다. <군체>는 각자 다른 성격과 조건을 가진 생존자들이 서로 갈등하고 협력하면서 어떤 선택을 해나가는지가 관람 포인트다. 각 인물은 생존에 불리한 직업적, 성격적, 신체적, 관계적 취약성을 나눠 가지는데 현희는 하반신 장애를 지닌 동시에 명석한 판단력과 실행력, 따뜻한 용기를 가진 인물이다.
- <배우와 배우가>라는 인터뷰집을 냈고 지난해부턴 <씨네21>에 원고를 기고하고 있다. 연기할 때와 글을 쓸 때의 감각은 서로 다를 듯한데, 글쓰기가 어떤 신선한 감각을 일깨운다고 느끼나.
연기에 비해 글은 실시간의 수행이라기보다는 시간차를 두고 생각하고 쓰고 퇴고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글쓰기는 지금보다 더 진지하고 고양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엔 더 가벼운 마음으로 써보려고 노력 중이다. 어쩌면 글도 실시간의 수행성 안에서 탄생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길어 올린 글이 좀더 몸에 가까운 현재성을 갖지 않을까, 더듬어보는 중이다. 연기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읽는 일, 쓰는 일, 연기하는 일이 아주 가까운, 어떤 면에서는 아주 비슷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점이 잘 조준된 읽기, 쓰기, 연기하기는 어느 순간 훌쩍 서로를 넘나들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랄까? 언젠간 에세이가 아니라 상상의 이야기도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
- 2026 프랑스 영화주간을 찾을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한다면.
홍보대사가 된 요 며칠 사이 프랑스영화와 갑자기 친해진 기분이다. 늘 호감은 있었지만 약간은 거리감이 있던 오랜 지인과 갑자기 친구가 된 기분이랄까? 프랑스 영화주간이 관객들에게도 그런 기분 좋은 며칠이 됐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친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