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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감옥으로 향하는 오디세이, 오진우 평론가의 <두 검사>

<두 검사>

저번 글(<씨네21> 1549호, ‘영화 바깥의 세계-<차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구로사와 기요시가 21세기 영화의 특징으로 꼽는 ‘외측’은 21세기 영화에만 국한된 특징은 아니다. 그것은 영화의 시원적인 매혹에 관한 이야기다. 구로사와는 강연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을 상영하고 이 영화가 세계 최초의 영화라 불리는 이유에 대해 화면에 비치지 않는 ‘프레임 바깥’까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노엘 버치가 <영화의 실천>에서 적극적으로 펼친 ‘외화면’에 대한 논의와 공명한다. 버치가 꼽는 외화면을 탁월하게 다룬 감독들 중에 로베르 브레송이 있다. 그는 브레송이 등장인물의 입장과 퇴장으로 만들어진 빈 화면과 이로 인해 활성화된 외화면 공간을 핵심적으로 활용했다고 평가한다. <영화의 실천>의 원서 초판이 1969년에 나왔기에 버치가 책에서 브레송이 남긴 최후의 숏을 다룰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의 분석은 그 숏에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된다. 브레송의 마지막 작품인 <돈>(1983)의 엔딩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2008)에서 오마주된다. 두 엔딩은 비슷하지만 차이는 있다. <돈>에서 자수하고 연행되는 이본을 뒤로하고 사람들은 텅 빈 곳을 응시한다. 반면에 <도쿄 소나타>에서 카메라는 음악 학교 오디션 현장을 비추지만 사람들은 그곳을 빠져나가는 가족을 응시한다. 구로사와는 <돈>에서 사람들이 응시하는 빛을 ‘희망의 빛’이라 말한다. 브레송의 엔딩이 오묘한 측면이 있다면, 구로사와의 엔딩은 그에 비해 명확하다. 구로사와는 브레송의 엔딩을 변용했지만, 퇴장하는 가족에게 던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분명 희망의 빛이다. 그것은 구로사와가 한때 품었던 희망이다. 최근 개봉작인 <차임>에서 그러한 시선은 산산이 부서진다. <차임>의 엔딩에서 주인공 또한 빛을 본다. 컴컴한 집 안 커튼에 희미하게 드리운 한 줄기의 빛.

서두를 길게 썼지만, 이는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의 <두 검사>의 엔딩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차임>과 <두 검사> 모두 문이 굳게 닫히며 끝난다. <차임>의 엔딩을 보며 나는 “문은 닫히고 그의 집은 더 이상 내부가 아닌 영원히 알 수 없는 외부가 된다”고 저번 글에 썼다. 그에 비하면 <두 검사>는 공포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미스터리가 해소됐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닫힌 문을 보며 우리는 꺼림직한 공포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검사>는 문을 열고 시작하고, 닫으며 끝난다. ‘문’의 영화를 자처하는 <두 검사>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장 문이 열리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공장노동자들과 달리 <두 검사>에선 문으로 죄수들이 노역을 하기 위해 들어간다. 이 영화의 강력한 힘은 화면 안으로 수렴하는 에너지에 있다. 밖을 상상할 수 없게 단속하면서 안으로 밀어붙이는 힘이 상당하다. 그 힘을 보존하는 장치가 바로 문이다. 내화면에 나오는 문 뒤의 세상 역시 버치의 구분을 따르자면 외화면의 공간이다. ‘피의 대숙청’ 시기에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는 감옥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부화된 공간이다. 그곳에서 자행되는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의 악행을 그리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문은 <두 검사>에서 주제적인 측면을 강화하는 장치다. 이와 더불어 1.37:1의 화면비는 프레임을 강조하며 수많은 문을 주재하는 흔들리지 않는 스탈린 체제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읽히게끔 <두 검사>는 다분히 도식적이며 모범생이 만든 듯한 영화로 비친다.

<두 검사>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기 전 영화에서 한 늙은 죄수가 수많은 쪽지가 든 자루를 들고 소각장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노인은 피로 쓴 쪽지를 발견한다.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쪽지를 태워서 생긴 재와 연기뿐이다. 하지만 어느 곳이라도 틈새는 존재한다. 가장 궁금하지만, <두 검사>가 보여주지 않는 것은 그 쪽지가 신임 검사의 책상까지 어떻게 갔는지다.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엄혹한 시대이기에 오프닝 타이틀 이후 펼쳐지는 본격적인 이야기는 늙은 죄수가 불타는 쪽지들을 보며 지어낸 우화 혹은 가정법적인 서사로도 읽힌다. 감옥 밖으로 쪽지가 나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설령 그랬어도 그 쪽지를 들고 누군가가 감옥으로 찾아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의 배경이 ‘피의 대숙청’ 시기임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일말의 가능성이 통하려면 세상 물정에 어리숙한 순진무구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 영화가 작동한다. 다시 말해 영화 속 그 수많은 문이 열린다. 신임 지방 검사 알렉산드르 코르녜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가 그러한 인물이다. 그의 우직함으로 열리는 수많은 문과 그 뒤에 펼쳐지는 세계는 스탈린 체제가 소각하려는 대숙청 시기의 불편한 진실이다.

수많은 철문이 겹겹이 주름진 미로와 같은 감옥. 코르녜프 검사는 그 심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가 만난 사람은 검사 출신 법학자 스테프냐크(알렉산드르 필리펜코)다. 스테프냐크는 코르녜프가 대학 시절 강연을 들을 정도로 존경하던 사람이다. 영화가 지칭하는 두명의 검사가 이 둘을 말하는 것일까. 스테프냐크는 감방 문에 뚫린 감시용 구멍을 피해 사각지대에서 자신의 신체에 각인된 고문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흔적은 단순히 과거가 아니며 코르녜프에겐 예시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른다. 코르녜프가 본 그 이미지는 교도관들이 나누는 농담과 연결된다. 한 교도관은 대숙청 시대에 희생된 카를 라데크에 관한 농담을 던진다. 혁명 전에 뭐 했냐는 질문에 라데크가 “감옥에서 기다렸소”라고 말했고, 혁명 후엔 “감옥이 날 기다렸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에 교도관들은 박장대소한다. 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생각해보면 감옥은 내가 머무는 현재적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는 미래적 장소로 바뀐 것이다.

<두 검사>가 지칭하는 두명은 현재의 코르녜프와 미래의 그 자신이 아닐까.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영화는 그에게 계속해서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그가 통과해야 하는 관문들 사이에 기다려야만 하는 지루한 시간들이 놓여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스테프냐크를 면회 가기 전 교도관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에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페인트 작업을 하다가 죄수 한명이 떨어진 것이다. 사무실에 한 교도관이 들이닥치면서 코르녜프는 그 광경을 이어서 볼 수 없게 된다. 그가 다시 창문 밖을 봤을 때 죄수는 이미 치워졌고, 다른 죄수들은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작업을 이어 나간다. 코르녜프는 이 상황을 본 목격자다. 하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편집된 장면으로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하나의 상황을 둘로 나눠 봤지만, 쪼개진 진실을 잇는 연결점은 미처 치우지 못했다. 바닥에 동그랗게 퍼진 흰색 페인트가 그것이다. 흰 얼룩은 스테프냐크의 혈서와 유사성을 지닌다. 영화에서 코르녜프가 보는 것은 과거의 흔적들이다. 다만 그것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할 뿐이다. 이러한 코르녜프의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아카이브 영상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길어올리는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파운드 푸티지 작업 방식을 떠오르게 만든다.

<두 검사>

<두 검사>에 둘로 분열된 것은 또 있다. 배우 알렉산드르 필리펜코는 1인2역을 소화한다. 그는 억울하게 옥살이 중인 원로 당원이자 법학자인 스테프냐크와 기차 칸에서 등장하는 행색이 초라한 이름 모를 노인을 연기한다. 그가 연기하는 것은 역사의 이미지다. 다시 말해 실패한 혁명의 흔적이다. 코르녜프는 스테프냐크의 쪽지를 들고 NKVD의 악행을 보고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검찰청으로 향한다. 기차 안의 한 노인은 코벨 전투에서 팔과 다리를 잃었고 선처받기 위해 레닌을 찾아갔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레닌을 직접 만나 약속받았지만 말뿐이었다는 것이다. 레닌은 죽었고, 지금은 스탈린을 만나러 간다는 그의 이야기의 교훈이라면 반성 없이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르녜프는 그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계속 존다. 코르녜프는 자신이 역사라는 커다란 톱니바퀴를 제동할 수 있다는 사명감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그 기운에 취해 잠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혁명에 여전히 희망을 거는 코르녜프. 노인은 그 미몽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듯 자신의 의족으로 그를 계속해서 깨운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약속 없이 간 검찰청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코르녜프는 검찰총장을 만나 NKVD의 악행을 보고한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검찰 조직이 이미 NKVD에 포섭됐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코르녜프에게 검찰총장은 거울처럼 그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보고를 들어준다. 그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코르녜프의 편을 들어주는 척한다. 겉과 속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스탈린 체제의 분열된 얼굴인 것이다. 검찰총장과의 면담 장면보다 그곳으로 가기 전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서 선보인 몇몇 장면들이 눈길이 간다. 하나는 여자 직원이 계단에서 서류를 쏟았을 때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일제히 멈춘다. 코르녜프는 그녀를 도와 서류를 같이 주워준다. 다른 사람들은 방관자처럼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빤히 쳐다본다. 위에서 언급한 창밖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봤던 코르녜프는 이제 그러한 상황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상황은 역전됐지만, 그는 아직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결의에 차 있다.

다른 하나는 코르녜프가 카프적인 순간을 표현한 인물을 마주칠 때다. 코르녜프가 지어야 할 표정을 그 사람이 대신 하고 있다. 계단에서 마주친 남자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코르녜프에게 출구를 물어본다. 이들 뒤로 레닌 흉상이 있다. 반면에 검찰총장 사무실 뒤편엔 스탈린 흉상이 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흐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코르녜프는 정의감에 불타 스스로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결국 역사라는 커다란 강물에 떠밀려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코르녜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숙청뿐이다. 그가 스테프냐크의 쪽지를 받은 순간부터 출구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동선의 종착지는 감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코르녜프는 두 사람을 마주한다.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들이지만, 코르녜프만 그 사실을 모른다. 이들이 베푸는 호의에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낀다. 이들은 음식과 술을 내주고 노래도 부르며 흥을 돋운다. 이들은 코르녜프를 체포하는 비밀경찰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코르녜프는 잠을 청한다. 노인의 허풍 같은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외면한 채 잠을 청했던 것과 달리, 그는 거짓으로 위장한 사람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평온하게 잠을 청한다. 그렇게 감옥으로 향하는 그의 오디세이는 막을 내린다.

<두 검사>는 분명 훌륭하지만, 색다른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2023년에 개봉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이미 이 시기를 다뤘고 많은 점들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밖으로 반출되는 문서와 문은 중요한 서사 장치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도 문이 열리고 실제 역사라면 숙청당했을 피해자 유가족들이 풀려난다. 이러한 상상력은 <두 검사>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코르녜프는 감옥을 나갈 수 없다. 우리는 닫힌 문 뒤의 세계를 보았다. 그곳에서 과거의 형태로, 죄수 몸에 새겨진 흔적으로 통해 악랄한 이면을 봤을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문 뒤에서 자행될 고문이라는 행위 그 자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사실 코르녜프의 ‘코’다. 배우 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는 권투를 하다가 코가 부러졌다고 한다. 글을 쓰면서 궁금해서 찾아본 정보다. 앞서 영화를 보면서는 그의 코가 특수분장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여긴다면 그의 코에 피의 대숙청의 흔적이 미리 새겨진 것은 아닐까. 예견된 파국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