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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호크스가 만끽했고 구로사와가 선망하는 것

다섯 번째 키워드 - 전승된 몸짓들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다섯 번째 키워드는 ‘전승된 몸짓들’이다.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 ‘생태 변이’에 이어 21세기 영화가 20세기로부터 전승하거나 변주하거나, 혹은 새로이 만든 영화 속의 움직임들이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물려주는 이미지와 숏들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두 세기의 사이를 메꾸려 했다. 이번엔 이우빈 기자가 하워드 호크스구로사와 기요시를 통과하며 영화 매체가 ‘깨어나기’의 특권을 어떻게 유지했고, 소유하고자 하는지를 짚었다. 이후 연재에선 세상을 촬영하는 영화적 동작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하려 한다. 더하여 20세기풍의 시선 교환이 지금까지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현기증>을 중심으로 하여 논할 계획이다. 영화 속의 몇몇 움직임으로부터 감지된 세기 전환의 신호들은 21세기의 영화를 어떻게 독해해야 할지에 의미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호크스가 만끽했고 구로사와가 선망하는 것

‘깨어나기’라는 영화의 특권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

21세기 영화를 논하며 구로사와 기요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내놓은 작품 전반, 개중에 21세기 전환기 무렵에 만들어진 <카리스마>(1999), <밝은 미래>(2003), <로프트>(2005), <절규>(2006),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이하 <수장룡>, 2013)은 20세기 영화가 누렸던 몇개의 시각적 주제를 전승하고 변주한다. 그것은 첫째, 뼈에 대한 집착이다. 둘째, 수풀의 미혹과 안개의 방해다. 풀어 말하면 과거라는 시계열적 지표에 대한 집착, 다양한 기후의 풍경을 화면에 포섭하고자 하는 미혹이다. 이 두개의 주제는 하나의 양가적 원류를 가리킨다. ‘깨어난다’라는 행위를 사로잡고자 하는 영화적 갈망이자, 20세기만큼 강렬하게 깨어날 수 없음에 대한 21세기 영화의 한계 절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선망한 영화 속의 깨어나기란 매체 역사의 시작부터, 그 황금기인 고전기 할리우드에서도 명백히 드러난 운명적 몸짓이었다.

‘깨어나기’는 영화의 특권이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환상에서 깨어나기, 무지에서 깨어나기, 자신으로부터 깨어나기, 과거에서 깨어나기. 요컨대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순간적으로 발생할 때 우리는 이를 깨어난다고 폭넓게 칭한다. 깨어남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란 대체로 진보적이고 계몽적이며 더 낫거나 새로운 것을 향해갈 수 있다는 동력의 응원과도 같았다. 영화가 20세기 대중매체, 예술 분야의 총아로 자리할 수 있던 이유는 연속적 깨어남을 원한 근현대의 직선적 진보 지향성이 영화라는 매체의 성질과도 면밀히 결부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어디로 전환된다는 깨어남의 의미적 총체를 한눈에 보여주며, 이를 공간적인 이동의 문제로 종합하는 것으로서 영화(사)는 시작했다. 뤼미에르, 공장에서 나가는 이들은 근대식 건물의 안에서 밖으로 혹은 어둠에서 빛으로 노동에서 일상으로, 기차가 후경에서 전경으로, 스크린 밖에서 안으로 또는 그 반대(관객)로 향했다. 이외에도 인간이 지구에서 달로, 열차 강도를 쫓는 이들의 교차적 편집까지, 영화가 보여주는 공간 변화란 거꾸로 말해 보는 이의 수없는 시지각적 깨어남이었다. 한 세기 가까이 지나도 유효한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또는 지가 베르토프의 원념처럼 영화는 끝없이 관객을 산만하게 만들고 교란하며 각성시키는 지위에 있었다. 영화가 스마트폰이든, 랩톱이든, 슈퍼볼 하프타임 쇼의 중계 스크린이든 그 어딘가에서 아직 영화로 인지되는 이유란 재현적 리얼리즘이나 물리적 환경의 조건보다도 ‘깨어난다’라는 영화의 특권적 감각 덕분일 것이다.

공간의 도약은 시간과 관념의 변화조차 빨아들였다. (무엇으로부터든) 깨어난 이후의 풍경은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변화를 가시화하여 압축적이고 동시적으로 추체험하게 만드는 권능으로써, 모든 영화 이미지의 전환 체계는 (어딘가에서) 물리·인지·매체적으로 깨어났다는 관객의 공간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민호 영화연구자가 언급한 것처럼, D. W. 그리피스를 비롯해 초기 영화사가 발명한 영화의 힘이란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방식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현실을 총체화하고자 하는 몸짓”(<씨네21> 1514호,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과거라는 현재 -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와 모더니즘’)이었다. 표상이 흘러간 것에 대한 학습적 상(象)이라면, 깨어난다는 몸짓의 총체성은 관객이 스크린을 보며 즉자적으로 두개의 현실(스크린 안과 밖)을 서로 교환하게 만드는 현상적 상(相)에 가까웠다.

깨어나기의 원리를 아주 영민하게 만끽했던 20세기의 인물은 하워드 호크스였다. 그와 자주 비견되는 존 포드가 특정한 공간(서부와 아일랜드 등)에 스스로 갇히기를 원하는 우울한 성정의 폐쇄적 고립자였다면, 호크스는 다양한 곳으로 나아가 그곳을 지배하려는 쾌활한 성정의 진취적인 개척자였다. 더 미국적이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천재성을 찬양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와 1956년에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파라오>(Land of the Pharaohs, 1955)의 비화를 전한다. 중일전쟁 당시 미군이 8개월은 걸릴 것이라 했던 비행장 건설을 중국이 국민 2만명을 동원해 3주 만에 완공한 역사가 있으며, 이 실화를 바탕으로 각본까지 완성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비협조로 인해 제작이 좌초됐다는 것이다. 20세기 미국영화의 공간적 지배력이 미학적 욕망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역학에도 맞물려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다.

대신 호크스는 파라오와 피라미드로 눈을 돌렸다. 1만명의 이집트인이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되어 끝내 노예들이 분노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는 20세기 미국 영화산업의 노동력으로 현재화한 것이다. 시간의 비약을 표면화한 결과로서의 공간적 도약,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20세기 미국영화의 경제 규모와 개척 패러다임이었다. 더불어 차기작으로 고민 중이라던 아프리카 배경의 영화는 존 웨인이 사냥꾼으로 등장한 호크스의 무척이나 느긋한 사적 에세이 <하타리>(1962)로 완성된다. 아프리카의 동물을 사냥해 가져가는 미국인들의 제국주의적 풍습을 담아내어 비판받아온 사실은 자명하다. 미국을 포함한 20세기 주류 영화가 제작 환경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공간 이동을 통한 깨어나기의 특권을 얼마나 수월하게 활용했는지 보여준다.

<베이비 길들이기>

호크스의 정복욕이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베이비 길들이기>(1938)다. 동물학자 데이비드 헉슬리(케리 그랜트)가 거대한 공룡(브론토사우루스) 뼈와 함께 등장하며 영화가 시작한다. 그는 공룡 뼈 복원본을 지탱 중인 철제 구조물에 앉아 사색 중이다. 쇄골만 있으면 복원이 완료되기 직전인 상황, 어찌저찌 데이비드가 수잔(캐서린 헵번)을 만나 마지막 뼛조각을 얻고 사랑에 빠진다는 스크루볼코미디다. 여기서 몰두할 사안은 두개, 하나는 수잔의 강아지인 조지가 그 쇄골을 집 마당 어딘가에 묻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와 수잔은 마당의 여기저기를 파내며 이를 찾는데, 썩은 장화 같은 물건이나 나올 뿐이다. 공룡의 뼛조각을 모아 그 이미지를 소생시킨다는 것은 영화가 또 다른 과거를 스크린이라는 현재적 공간에 복속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둘째는 영화의 결말이다. 어찌저찌 브론토사우루스의 쇄골을 찾아내어 드러낸 수잔이 데이비드의 작업실을 찾아가는데, 천방지축인 그녀의 움직임 탓에 4년을 공들였던 복원본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철제 프레임만이 남은 인위의 뼈대에서, 데이비드와 수잔은 포옹하며 사랑을 증빙한다. 과거가 완전히 무너진 ‘뼈 없음’의 상태 위에서 현재의 사랑이 피어난 것이다. 깨어나기를 향한 연출자의 지독한 집착을 등장인물들이 상쾌하게 부숴버렸을 때 느껴지는 극한의 개운함 역시 20세기 미국영화 특유의 긴장감이었다.

비슷하게 동물과 유아의 쾌활함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영생 욕망을 드러냈던 <몽키 비즈니스>(1952)보다 <베이비 길들이기>를 더 좋아했다는 호크스의 회고를 보노라면, 확실히 그의 욕구는 스크린 표면의 동물적 활력에 그치지 않았다. 한쪽엔 영화가 최대 다수의 시공간에서 깨어나려는 체계적 열병이 있다. 다른 쪽엔 영화 속 존재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지가 있다. 이 사이에 발생하는 즐거운 모순에 호크스는 매료됐던 듯하다. 많은 시공간을 의도대로 호출할 수 있었던 시대였기에, 강박적 의도성이 무너질 때의 해방감도 컸을 것이다. <환송대>(1962)를 두고 “사랑은 시간에 대한 유일한 승리”라던 크리스 마커의 말을 호크스식으로 확장하자면, “사랑은 감독에 대한 유일한 승리”였던 셈이다.

이제 21세기다. 21세기 영화는 <하타리>처럼 아날로그적인 범대륙의 공간 침범을 가할 수도, <파라오>처럼 자본으로 물리적 시공간을 역행할 수도 없다. 하지만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끝내 복원되지 못한 공룡을 그래픽으로 보여줄 수는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수장룡>은 대놓고 영화의 ‘깨어나기’를 시각적 중추로 삼는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첫째, 뼈에 대한 집착. <베이비 길들이기>의 호크스가 그랬듯이 구로사와는 수장룡(플레시오사우루스)에 집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코이치의 연인이자 만화가인 아츠미가 자살 미수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코이치는 ‘센싱’이라는 기계장치의 힘을 빌려 아츠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코이치는 문자 그대로 아츠미 속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현실에서 눈뜨며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현실과 센싱 세계의 경계가 희박해지는 도중, 코이치는 합리적 서사에서 이탈한 어떠한 영화적 필요에 따라 한 박물관을 찾는다. 센싱에 접속한 이후 자꾸만 눈에 보이는 소년의 유령을 쫓던 그는 수장룡의 거대한 뼈 복원본을 마주한 뒤 계단을 내려오며 현기증을 느낀다.

아츠미는 어린 시절 코이치가 그려줬던 수장룡 그림을 원한다. 빈틈없이 완벽했던 그 그림을 봐야만 제대로 된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공간의 도약을 감행하게 한다. 센싱 속 세계에서 두 사람은 아츠미의 무의식이라 칭해지는 안개 속으로 모험하는데, 그 끝엔 두 사람이 예전에 살던 히코네 섬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파헤치던 둘은 CGI를 통해 살을 회복한 수장룡과 마주하고, 수장룡은 거침없이 유영하고 고개를 휘저으며 이들을 공격한다. 어설픈 SF를 거쳐 느닷없이 크리처물로 횡단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결단은 장르적으로 뛰어나지도, 서사적으로 절묘하지도 않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수히 깨어나겠다는 영화적 쾌감뿐이다. '센싱'이라는 가상 공간, 히코네 섬이라는 과거, 뼈로부터 완전히 살아난 수장룡까지 모두 깨어남의 재료로 기능한다. 20세기 영화가 누렸던 특권을 전유하겠다는 연출자의 야심이 가득하다.

비밀스러운 물건을 얻게 된 수장룡은 두 사람을 떠나 바다로 돌아간다. 조지가 땅속에 숨긴 쇄골처럼 더는 보이지 않는다. <베이비 길들이기>의 연인은 ‘뼈 없음’의 상태로 무너진 공룡 위에 서 있었지만, 수장룡은 인간으로부터 탈출하여 그들에게 ‘뼈 없음’의 결론을 앗아간다. 사랑이 뼈에 승리할 가능성이 소거됐다. 이후, 병실에 누워 있던 코이치가 살포시 눈을 뜨며 깨어난다. 뒤따르는 코이치의 시점숏 없이 영화가 끝나버린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깨어났지만, 그의 시선은 또 다른 이행으로의 목적지를 잃었다. 옆에 있는 아츠미와 포옹하기는커녕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깨어남은 급속히 중단된다. 뼈를 잃은 세계에서 더 이상의 깨어남을 기대할 순 없는 듯하다. 즉 이것은 <베이비 길들이기>의 마지막을 본뜨고 싶으나 변질된 반쪽짜리 해피 엔딩이자, 20세기 영화를 탐닉하던 시네필 구로사와 기요시에겐 더없이 비극적인 21세기 영화의 불능이다.

<절규>의 마지막, 형사 요시오카(야쿠쇼 고지)는 2차 세계대전 무렵 정신병원으로 사용됐던 요양소에서 사망한 어떤 여성,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죽은 또 다른 여인의 원혼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사건을 겪는다. 이어 그녀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어디론가 떠나는 결말로 이행한다. 21세기 전환기의 구로사와 기요시는 뼈의 이미지에 천착하면서도, 그 뼈를 어떻게 소유할지에 골몰하며 20세기의 유령들을 마주하다가, 더는 영화의 깨어나기가 작동할 수 없는 21세기의 황무지로 떠나버리고야 만다. 자조적이다. <밝은 미래>는 어떠한가. 애초부터 뼈를 지니고 있지 않은 해파리가 인간의 품을 떠나 자생하고 번식한 뒤 도쿄의 바깥 바다로 떠나는 이야기다. <밝은 미래>의 청춘인 니무라(오다기리 조)에겐 새로운 현재의 시작일 수도 있는 이 낙관적 장면이란 뼈의 영화, 즉 시공간 위에 섰던 20세기의 역량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비관의 조각이기도 하다.

이제야 둘째, 안개와 수풀의 문제다. 아열대의 수풀은 서부극의 황야처럼 별세계의 기후를 대표하는 영화적 징표다.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처럼 20세기 영화의 풍토를 상기시키는 대표적 공간이다. 그러나 구로사와의 숲에는 자꾸만 안개라는 장해물이 끼어들어 또 다른 기후-공간으로의 이행을 지연시킨다. <수장룡> 속 아츠미의 의식 바깥, 히코네 섬으로 향하는 무의식의 공간에는 안개가 가득하다. 이 안개 사이엔 ‘철학적 좀비’라 칭해지며 여러모로 깨어나지 못하는 비물리적 관념들이 스산하게 공존한다. 아열대 지방의 무수한 수풀에 싸인 히코네섬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카리스마>에서도 도시의 규칙에서 쫓겨난 형사 야부이케(야쿠쇼 고지)는 어느 숲과 한 그루의 나무(카리스마)에 매혹되어 각성하는데, 그 길은 온통 안개에 휩싸여 있다. 이 맥락에서 가장 직관적인 사례는 <로프트>다. 소설가 레이코(나카타니 미키)는 여느 사정으로 시골로 이사하고 이곳 역시 불투명한 안개와 창문의 먼지, 수풀로 가득하다. 여기서 만난 고고학자 요시오카(도요카와 에쓰시)는 1천년 전 죽어 미라가 된 어떤 여인의 뼈에 집착하고, 1920년대(20세기 미국영화의 황금기가 태동하던 시기)에 다큐멘터리로 기록된 그 뼈에 미쳐 있다.

레이코와 요시오카는 미라에 대한 혼란과 공포로 배회하다가, 어느 순간 정말 갑작스럽게 포옹하며 사랑을 증명한다. 이 순간 공간의 시각적 조건은 매서운 바람과 흩날리는 수풀로 주어져 있다.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모린 오하라가 아일랜드에서 겪었던 이 기후의 광풍이란 사랑을 초래하는 20세기 영화의 핵심적 정동인 것이다. 미국뿐 아니다. 일찍이 나루세 미키오가 <부운>에 새긴 것처럼,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이 탐했던 사이공의 열대기후와 마지막 야쿠시마 섬의 비바람은 다카미네 히데코와 모리 마사유키의 금기된 사랑을 추동했다. 21세기 일본, 구로사와 기요시는 20세기적 기후의 정취를 최대한 모방하려 하지만, 모든 것을 가리려는 안개의 개입이 그 모작을 수락하지 않는다.

<로프트>

광적인 바람 속에서 사랑을 맹약했던 <로프트>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찾던 미라(뼈)가 환상이었다고 믿은 채 결말의 대화를 나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어요. 우리 어딘가로 갈까요? 그래요. 지금 여행을 떠나요. 그래요. 어디든지, 먼 곳으로, 어쩌면 지구의 끝까지.” 새로운 곳을 향한 깨어남을 기약한다. 그러나 물밑에서 시신이 등장하여 요시오카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약속은 급속히 중단되고, 영화는 다시금 뼈의 이미지에 매혹된 무구의 지연으로 회귀한다. 이처럼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베이비 길들이기>의 결말은 불가하다. 그가 알던 20세기 영화, 호크스의 자유로운 깨어나기와 그 반대급부로의 쾌감은 완전히 갖지 못해 선망할 수밖에 없는 특권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저주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뼈와 기후를 찾아 안개를 더듬으면서, 또는 CGI(수장룡)와 SF적 기능(센싱)의 힘을 빌려 20세기식의 깨어나기를 좇을 것인가. 혹은 <밝은 미래>나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택한 결말처럼 과거를 덤덤하게 흘려보낸 채 21세기를 수용하며 적당히 눈감을 것인가. 최근의 <차임>은 후자를 택한 구로사와의 탈영화사적, 탈장르적 답변이었지만 그가 21세기 초엽에 미치도록 갈망했던 20세기의 풀숲과 바람, 뼈의 미혹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순 없다. 억울하지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