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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다시 보는 자의 <현기증>

다섯 번째 키워드 - 전승된 몸짓들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다섯 번째 키워드는 ‘전승된 몸짓들’이었다. 숏과 리버스숏이라는 오래된 영화적 문제의 계보, 깨어난다는 영화의 모더니즘적 특질, 포스트-시네마 이론을 중심으로 한 ‘촬영하기’의 현황을 살피며 21세기가 20세기에서 전승하거나 변주한 것들을 불러냈다. 마지막 순서는 영화사에서 가장 오래 논의되어온 몸짓 중 하나, 바라보기에 관한 이야기다. 관하여 <현기증>과 <환송대>의 정평난 애호가이자 연구자인 백종관 영화감독이 글을 보내왔다. 20세기에 <현기증><환 송대>가 작동시킨 시선의 향방이 어떻게 <멀홀랜드 드라이브> <피닉스> <퍼스널 쇼퍼> 등 21세기 영화들로 이어졌는지다. 이로써 영화 속의 몇몇 움직임으로부터 세기 전환의 신호를 감지하려 했던 ‘전승된 몸짓들’은 마무리된다.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지막으로 영화의 ‘이야기’에 관해 논하려 한다. 귀한 해외 필자가 그 문을 열어줄 계획이니 고대해주길 바란다.

다시 보는 자의 <현기증>

시선의 형식과 감각의 전이

<현기증>

프랑스의 영화 비평지 <Vertigo>는, ‘현기증’을 뜻하는 그 제호에서부터 하나의 비평적 선언처럼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현기증의 예술이었다. 멈춘 사진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이미 지나간 시간이 현재처럼 되돌아오며,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이 현재의 사건인지 과거의 흔적인지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 채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다. 영화는 늘 보는 일과 믿는 일 사이의 간격 위에서 작동해왔다. 이 제호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이 단지 한편의 고전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경험 자체를 사유하게 만드는 제목이자 증상으로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46호가 크리스 마커를 다루며 그의 영화 <환송대>를 <현기증>과 함께 읽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두 영화가 공유하는 몇몇 모티프를 확인하는 일만이 아니라, <현기증>이 바라보기와 시간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묶어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먼저 경유해야 할 것은 크리스 마커의 관점이다. 그는 1994년 <포지티프>에 발표한 ‘A Free Replay: <현기증>에 관한 노트’에서 <현기증>의 현기증을 공간적 추락의 감각이 아니라 ‘시간의 현기증’으로 파악한다. 이 관점이 설득력을 얻는 곳은 영화의 후반부다. 매들린을 잃은 뒤 병원에 머물던 스코티는 거리에서 주디를 발견하고,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믿는 여자의 형상을 하나씩 덧입히기 시작한다. 회색 정장, 금발 머리, 올려 묶은 머리 모양, 녹색 빛 속에서의 출현.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변장이나 외양의 교정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된 시간을 현재의 몸 위에 조립하려는 절차다. 그러므로 <현기증>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사라진 시간을 되살리려는 광기다. 스코티가 매들린/주디를 바라볼 때, 그는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 죽은 이미지, 반복 가능한 이미지를 본다. 미술관에서 매들린은 한 여인의 초상 앞에 앉아 있고, 스코티의 시선은 살아 있는 여인과 죽은 여인의 초상을 겹쳐본다. 이때 시선은 인물의 감정만이 아니라, 여인을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하고 재배치하는 영화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전적 영화문법에서 시선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누군가가 보고, 다른 누군가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그 왕복 안에서 감정과 서사가 생겨난다. 그러나 <현기증>에서 스코티와 매들린/주디 사이의 시선은 제대로 왕복하지 않는다. 스코티는 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조작된 이미지를 보고 있다. 주디는 스코티의 시선 속에 놓이지만, 그 안에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기증>은 시선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시선 장치의 실패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시선은 상호적 관계의 형식이 아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이미지로 만들고, 그 이미지가 결국 바라보는 자를 파괴하는 비대칭적 순환에 가깝다. 스코티의 시선은 대상에게 가닿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형상 안에서 되돌아온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타자의 현존이 아니라 자기 욕망이 만들어낸 환영인 것이다.

마커가 <현기증>에서 포착한 것이 바로 이 반복의 구조였다. 스코티에게 사랑은 타자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된다. 그러나 이 재구성은 성공할 수 없다. 그가 되살리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상실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현기증>에서 핵심이 되는 행위는 ‘본다’가 아니라 ‘다시 본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이미 본 것을 다시 보고, 이미 잃은 것을 다시 만들고, 이미 죽은 이미지를 살아 있는 몸 위에 덧씌우려는 욕망의 작동이다. 이 욕망은 한 인물의 심리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움직이는 형식적 원리가 된다. 추적, 응시, 초상, 거울, 나선, 녹색 빛은 모두 그 원리 안에서 배열된다. 영화는 스코티가 매들린을 쫓는 이야기인 동시에, 영화 자신이 어떻게 시선을 조직하고 관객을 그 시선 안으로 끌어들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환송대>

이 지점에서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는 <현기증>의 중요한 후예가 된다. <환송대>의 남자 역시 한번 본 여성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파리 오를리 공항의 환송대, 한 여자의 얼굴, 한 남자의 죽음. 어린 시절 보았던 이 장면은 이후 그의 삶 전체를 조직한다. <현기증>에서 스코티가 매들린이라는 이미지를 좇는다면, <환송대>의 남자는 기억 속 여자의 얼굴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두 영화 모두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사랑의 대상이기 전에 시간의 상처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재의 얼굴이라기보다, 죽음과 결부된 기억의 표면이다. 다만 두 영화의 방식은 다르다. <현기증>이 움직이는 이미지 안에서 여성을 정지된 이미지로 만들려는 시선의 형식을 보여준다면, <환송대>는 거의 전적으로 정지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 속에서 하나의 기억이 어떻게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환송대>는 <현기증>의 시선 구조를 기억의 구조로 변형한다.

이 변형은 단지 인용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세쿼이아의 나이테 앞에서 시간의 위치를 묻는 장면, 여인의 옆얼굴, 죽음과 사랑의 결합, 과거를 다시 살고자 하는 욕망은 분명 <현기증>과 연결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환송대>가 <현기증>의 바라보기를 영화적 기억의 원리로 바꾼다는 점이다. 스코티는 여자를 다시 만들려 하고, <환송대>의 남자는 한 이미지를 통해 시간을 다시 살아보려 한다. 두 경우 모두 바라보기는 단순한 지각이 아니라 운명이다. 한번 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중에 돌아와 삶 전체의 궤적을 결정한다. <환송대>의 정지 이미지들 사이에서 여자의 눈꺼풀이 잠시 움직이는 순간은 그래서 단순한 영화적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고정된 기억이 살아 있는 현재처럼 되돌아오는 순간이며, 시선 장치가 기억의 감각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이 계보는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계속 변주된다. 다만 그 방식은 더 이상 추적이나 관음의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시선의 문제는 살아 있는 몸, 역사적 증언, 여성들 사이의 응시, 디지털 접속, 보이지 않는 감각의 문제로 옮겨간다.

그중에서도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현기증>의 직접적인 재연이라기보다, 히치콕이 열어놓은 시선과 이중화의 문제를 할리우드라는 이미지 공장 내부로 옮겨놓았다. 여성의 이중화,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 사랑과 질투와 죽음이 뒤엉킨 구조, 그리고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이미지 안에서 분열되는 방식은 모두 <현기증>의 후예로서 그 사후적 문제를 다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는 스코티 같은 남성 주체가 중심에 있지 않다. 대신 이미지 산업 자체가 욕망을 만들고, 그 욕망이 다시 인물의 정체성을 분해한다. <현기증>에서 한 남자가 한 여성을 이미지로 만들었다면, 린치의 영화에서는 할리우드라는 장치 전체가 여성들을 꿈의 형상과 실패의 잔해로 분열시킨다. 사랑의 대상은 배우의 얼굴과 영화적 환상, 캐스팅의 욕망과 실패한 자아의 투사 속에서 계속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현기증>의 유산이 21세기 초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내면화되고 악몽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경유지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는 이 계보를 더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영화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넬리는 얼굴이 바뀐 채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남편 조니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죽은 아내 넬리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넬리처럼 꾸며 상속금을 받아내려 한다. 이 설정은 <현기증>의 후반부를 거의 거울처럼 반사한다. 스코티가 주디를 매들린으로 만들려 하듯, 조니는 넬리를 ‘넬리의 이미지’로 만든다. 그는 살아 돌아온 여자를 보지 못한다. 그가 보는 것은 죽은 아내의 재현 가능성, 다시 조립될 수 있는 외양,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이미지뿐이다. 그러므로 <피닉스>에서 바라보기는 인식의 행위가 아니라 오인의 행위다. 조니는 너무 늦게 본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대체물이 아니라 과거를 통과해 살아남은 자이지만, 그는 그녀를 현재의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피닉스>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현기증>을 뒤집는다. <현기증>에서 주디는 스코티가 만든 이미지 안에서 다시 죽는다. 반면 <피닉스>에서 넬리는 조니가 요구하는 재연을 수행하면서도, 마지막 순간 그 이미지를 증언의 몸으로 바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넬리가 를 부를 때, 조니는 뒤늦게 그녀가 진짜 넬리임을 알아본다. 손목의 숫자, 목소리, 노래, 시선. 조니가 만든 이미지는 그를 위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심판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넬리는 더이상 남성의 기억 속 죽은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살아 돌아온 자이며, 자신을 보지 못했던 시선을 무너뜨리는 자다. 여기서 목소리는 결정적인 감각의 전이를 일으킨다. 조니가 끝까지 눈으로 알아보지 못했던 진실은 노래를 통해, 몸에 남은 숫자를 통해,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적 증거들을 통해 도착한다. <피닉스>는 <현기증>의 “여성을 이미지로 만드는 시선”을 상속하지만, 그 시선을 생존자의 증언으로 전환한다.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같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다시 쓴다. 여기서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이미지로 만들어야 한다. 화가 마리안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를 관찰한다. 처음에 이 관찰은 몰래 이루어진다. 마리안은 산책 중 엘로이즈의 얼굴, 손, 귀, 자세를 기억해두었다가 밤에 그림으로 옮긴다. 이 구조만 보면 <현기증>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 바라봄을 통해 이미지를 구성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시선은 곧 일방성을 잃는다. 엘로이즈는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마리안에게 묻는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죠?” 이 질문은 <현기증>의 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던 질문이다. 스코티는 주디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엘로이즈의 질문은 시선의 구조를 노출시킨다. 보는 자 역시 보이고 있으며, 그가 그리는 대상 역시 그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아마의 영화에서 바라보기는 점차 상호적인 행위가 된다. 마리안이 엘로이즈를 보는 동안, 엘로이즈도 마리안을 본다. 초상화는 소유의 결과가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 시간의 흔적이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현기증>과 <환송대>의 ‘다시 보기’를 여성적 기억의 형식으로 바꾼다. 마리안은 음악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엘로이즈를 본다. 비발디의 음악이 연주되고, 엘로이즈는 마리안을 보지 못한 채 감정에 휩싸인다. 이 장면은 일방적 시선처럼 보이지만, <현기증>의 일방성과는 다르다.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녀를 다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다만 본다. 그리고 그 바라봄 속에서 사랑이 소유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방식을 받아들인다. 이때 시선은 더이상 대상을 재구성하는 힘이 아니라, 상실을 견디는 감각의 형식이 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현기증>의 이미지 제작 방식을 상호 응시와 애도의 윤리로 바꿔놓는다.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는 <현기증>의 유산을 또 다른 매체 환경으로 옮긴다. 이 영화에서 모린은 죽은 쌍둥이 오빠의 신호를 기다린다. 그녀는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누군가의 옷을 사고, 빈집에 머물고,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감지한다. <현기증>에서 스코티는 도시 속에서 매들린의 몸을 따라간다. 그의 시선은 육체적이고 공간적이다. 그는 자동차로 뒤쫓고, 미술관에서 바라보고, 호텔과 묘지와 숲을 통과한다. 반면 <퍼스널 쇼퍼>에서 시선은 더 이상 눈앞의 몸에 붙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스마트폰 메시지, 빈 곳, 문소리, 유리잔의 움직임, 보이지 않는 신호들로 흩어진다. 여기서 <현기증>의 시선 형식은 감각의 형식으로 전이된다. 보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 응시하는 것보다 감지하는 것, 대상을 포착하는 것보다 도착할지도 모르는 신호에 노출되는 것이 중요해진다. 스코티가 어떤 얼굴을 따라간다면, 모린은 어떤 기척의 가능성을 따라간다.

영화 중반의 긴 문자메시지 장면은 이러한 전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린은 기차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상대는 그녀를 보고 있는가? 죽은 오빠인가? 낯선 남자인가? 혹은 단지 매체 자체가 만들어낸 유령적 접속인가? 여기서 바라보기는 더이상 눈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접속되어 있다는 감각,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보이지 않는 타자의 호출에 반응하는 몸의 긴장이다. <현기증>의 스코티가 매들린을 보면서 유령적 이미지에 사로잡혔다면, <퍼스널 쇼퍼>의 모린은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읽으며 유령적 시선에 사로잡힌다. 20세기 중반의 영화에서 시선이 도시 속 추적의 형태를 띠었다면, 여기서 시선은 알림음과 진동, 화면 위의 문장, 비어 있는 방의 기척으로 바뀐다. 중요한 것은 더이상 무엇이 보이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데도 나를 향해 도착하는가이다. 이 점에서 <퍼스널 쇼퍼>는 <현기증>의 유산을 시각의 문제에서 접속과 감응의 문제로 확장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현기증> 이후에 놓고 읽는다는 것은, 각 작품을 히치콕의 직접적 영향 아래 두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현기증>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아, 영화가 바라보기의 문제를 어떻게 다른 시대의 조건 속에서 다시 배치해왔는지를 생각하려는 것이다. <현기증>에서 시선은 대상을 붙잡고, 특정한 형상으로 구성하며, 마침내 그 형상이 보는 자의 자리를 흔드는 힘으로 되돌아온다. 이후의 영화들은 이 힘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옮겨놓는다. 그것은 한 여자의 옆얼굴에서, 정지 이미지 속 눈꺼풀의 떨림으로, 폐허 속 생존자의 노래로, 음악회장에서의 먼 응시로, 스마트폰 화면의 짧은 문장들로 모습을 바꾼다. 시선은 더 이상 눈의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목소리와 노래, 기척과 진동, 기억과 접속의 형식으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