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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해상도를 높이면] 어른됨을 자랑하는 어른들

<참교육>

<참교육>은 목표도 지향점도 심플하다. 가까운 영화로 비유해보자면 <범죄도시> 시리즈에 가깝다. 누가 봐도 극악무도한 빌런 하나를 내세워 마석도(마동석)의 주먹 하나로 처단하겠다는 영화의 기획 의도는 폭력을 정당화하다 못해 갈망하며 마침내 그 타격을 죄책감 없이 즐기게 한다. <참교육>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교권이 무너진 교실 내 질서를 교권보호국이라는 절대적 공권력을 통해 합법적으로 단죄하겠다는 응징 액션의 구조를 갖는다. 다시 말해 ‘사이다형 복수극’과 ‘자극적인 카타르시스’가 애초 <참교육>의 원형인 셈이다. 드라마가 공개된 이후 공격적인 재현 윤리나 폭력성 등을 문제 삼는 여론이 많지만 <모범택시> <열혈사제> <존 윅> 등 우리 주변부엔 이미 응징 액션을 장르화한, 그것이 하나의 기획 의도이자 마케팅 소구점이 된 작품이 많다. 장르는 곧 취향의 총합이기에 그 자체로 문제 삼긴 어렵다. 그보다 <참교육>의 진짜 문제는 그 숭고하고 통쾌한 ‘참교육’ 끝에 이득을 얻어야 했던 이들이 완전히 제거됐다는 점이다.

과거와 달리 교권이 무너진 오늘날의 교실.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존중은 과거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학생들의 무질서와 학부모의 교권 침해, 교사의 직무 유기를 제재하기 위해 교육부는 교권보호국을 창설한다. 미지의 신고자로부터 고발이 들어오면 감독관은 문제가 제기된 학교를 찾아 참교육을 실천한다. 여기서 참교육이란 교권보호국 감독관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권한을 말한다. 교육 방식에 그 어떠한 제한도 없다는 것. 문제 학생의 뺨을 갈기거나 음식물 쓰레기통 사이를 나뒹굴게 만들어도, 그것이 교육이자 훈련 목적이라면 충분히 허용된다. 거듭 ‘교권’을 수호하겠다는 교권보호국의 말을 곱씹어보면 드라마는 마치 교사의 권리와 권한을 증진시키고 직업적 존엄을 회복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교사들의 죽은 권위를 되살리는 것이 최우선 미션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사가 아닌 학생들을 향해 있다. 드라마 속 교권 보호는 글자 그대로 선생님만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무너진 학교 질서를 재정립하고 학생을 선도하여 교육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까지 포괄한다. 이는 사회 교육의 대상이자 학교의 진정한 주인인 청소년을 지도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을 가로막는 학생이든 교사든, 심지어 학부모까지도 모두 단죄하겠다는 뜻이다. 비행과 탈선에 익숙해진 아이들도, 학교라는 정글의 피해자가 된 아이들도 모두 동등하게 참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이끌어내는 게 <참교육>의 최종 목표다. 실제로 나화진이 피해 학생에게 “어른에게 요청”하라고 반복하거나 여러 장면을 통해 “사회에 진짜 어른이 필요하다”고 설파하는 것도 결국 교권 회복이 청소년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교육>은 소기의 목적대로 어른으로서 청소년의 삶을 존중하고 있을까. <참교육>이 그리는 학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회색 지대에 있는 아이들은 (그게 방관자일지라도) 대부분 배경지처럼 흐릿하게 보이기에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다. 간단하게 두 부류로 나뉜 청소년들은 그 역할도 단순하다.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나화진에게 폭력적인 처단을 받는다. 무한한 폭력 돌려막기. 폭력이 문제가 아니다. 이 세계관엔 저항이 없다. 십대의 미덕이자 생애주기적 핵심 요소인 저항과 반항이 완전히 거세돼 있다. (탈선과 반항은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그 ‘어른다운+구세주로서+학생을 구원하는’ 나화진을 내세우기 위해 학생들은 그저 나쁘거나 선하다.

현실 세계의 청소년은 어떠한가. 10대 청소년들이 정말 흑과 백, 선과 악으로만 나뉘어져 있을까. <참교육>이 모티브 삼은 실제 사건들을 생각하면 일그러진 초상 또한 현실의 모습일 테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 단언하긴 어렵다. 3화에서 한예리가 고영수 선생님을 거짓 성추행으로 몰아세울 때 현실에서 아이들은 스쿨 미투로 자신들의 기울어진 학교생활을 고발했다. 어른들이 10인분 먹방을 찍을 때 학생들은 기후 위기와 채식 생활에 관해 농성했고, 학생들 사이로 딥페이크 영상이 공기처럼 떠돌아다닐 때 피해 학교의 현황 지도를 만든 건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었다. 윤석열 탄핵 시위가 이어진 2024년 겨울, 학교 안팎의 청소년들은 빠르게 광장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릴스·틱톡·쇼츠 등 영상물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주도적으로 게재한다. 실제 현실 세계에 놓인 진짜 청소년들은 자신에게 닿은 한계와 억압, 부조리와 비합리를 딛고 일어서며 대항하고야 만다. <참교육>에서 오직 나화진만이 정의이자 정답이 되기 위해, 무적의 프로타고니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저항도, 반항도 없이 폭력 앞에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의 얼굴이란 정말이지 ‘올드하다’.

드물게 제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도 있다. 선생님을 사이버불링하는 이를 보호국에 신고하는 반 학생들.(3화) 의대 진학을 강요하는 엄마에게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정현민.(8화) 하지만 신고는 폭로보단 위로처럼 활용되었고 현민도 병원 치료 뒤편으로 숨었을 뿐 상황을 정면 돌파하진 않는다. 고발이나 균열, 문제 제기와는 다소 거리가 먼 온화한 성정들. 그게 전부다. 심지어 우등생이 가해자로 몰리는 순간 어른들이 보이는 반응은 요상하기만 하다. “전교 1등이 왜 그런 겁니까? 현웅 학생처럼 머리 좋은 학생이 선생님을 폭행하면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4화) “마약이요? 저 애들, S대 의대 지원하는 애들이에요. 다른 애들이랑 다르다고요.”(8화) 공부 잘하면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어른들의 예단은 너무 느리게 오늘날에 도착했다. 최근 시리즈 내의 트렌드를 기준 삼아도 이상하다. <피라미드 게임> <러닝메이트> <인간수업> <약한영웅 Class 1>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등 이미 너무도 많은 작품이 공부를 잘하는 게 선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경향과 유행처럼 보여줬다. 하지만 그 선입견을 굳이 거슬러 올라가는 <참교육>.

“너네들이 뭔데? 예수야, 부처야?” 모든 악행을 성인군자처럼 참아내는 나화진에게 빌런이 발악하며 묻는다. 그러자 그가 답한다. “어른이야, 임마.” 나화진의 말마따나 좋은 어른이 많아져야 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쩐지 궁색하게만 들린다. 청소년을 위한 세상을 만들자면서 어른들은 정작 청소년 당사자의 다변성과 잠재력을 조용히 제거시켰다. 오직 자신의 어른됨을 자랑하기 위해. 우쭐해지기 위해. 안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