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꽉 메운 인파를 뚫고 의전 차량 행렬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기어간다. 오늘의 목적지인 뤼미에르 극장 앞에 도착해서도 예정 시간보다 한참 오래 대기하는 차량 뒷좌석에 앉아,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리던 내가 비로소 모기 같은 목소리를 낸다.
“감독님, 덕분에 이렇게 칸영화제에도 와보고 감사합니다.”
(사이)
“다 우연입니다. 별다른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모든 건 다 우연입니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연상호 감독님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고른다. 상대를 향한 말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향하는 것도 같은 짧은 문장.
(침묵)
비로소 차 문이 열리고, 한쪽으로는 통제선 밖에서 손을 내미는 전세계 영화 팬들의 환호성이, 다른 한쪽으로는 뤼미에르 극장으로 향하는 긴 레드카펫이 펼쳐진다. 나는 차에서 내려 쏟아지는 조명쪽으로 몸을 돌리고….
(암전)
“모든 순간이 다 기억에 남으시겠지만 그래도 칸영화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영화 <군체> 무대인사 준비로 네일숍 의자에 앉아 페디큐어를 받으며 회신 기한이 임박한 어느 잡지의 서면 인터뷰 질문을 떠올렸을 때 건져 올려진 장면이다.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프로그램으로 <군체>가 월드프리미어 상영하던 날 극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의 한순간.
인천공항을 출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프랑스 니스로 향하던 비행기 안, 밴을 타고 칸영화제 공식 숙소인 칼튼 칸에 도착한 날 밤, 다음날 일찍부터 밤늦도록 이어지던 각종 인터뷰와 마켓 방문 등 공식 일정들, 레드카펫,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상영, 기립박수. 스치듯 지나가는 수많은 장면 중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단단한 현실감을 줬던 순간을 쉽게 톺을 수가 없다. 사실 영화제 기간 내내 뭔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긴장하고 불편하고 어색했다. 당연히 기쁘고 영광이었지만 많은 순간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만큼 난처하고 어리숙했다. 영화제에 가기 전부터 축하를 많이 받고, 여기저기 인터뷰에서 ‘영화의 본고장인 프랑스’니 ‘전세계 영화인들의 축제’니 ‘세계적인 영화제’니 하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듣고 보고 말해서 그 아우라에 눌렸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정차한 차 안에의 짧은 대화의 순간은 차분하고 소박하게 오롯이 기억난다.
서울에 돌아와서 칸에 간다고 축하해주신 분들, 도움 주신 분들을 두루 만났다. 영화제 기간 중 공식 포토월에서 입은 화이트 자수 베스트 드레스와 레드카펫에서 입은 네이비 투피스 셋업을 제작해준 ‘제이든 초’의 조성민 디자이너와 정경은 자수·공예 작가와도 가벼운 저녁 자리를 함께했다.
“숍을 옮겨 새롭게 오픈하는 기간과 맞물렸는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히려 오랜만에 정말 귀한 마음으로 옷을 만들었어요. 드레스가 접히면 안된다고 퀵 대신 직접 차에 실어 보내고. 시일이 촉박해서 주말에는 저도 작업실 가서 경은이 옆에 앉아 같이 자수를 놨는데 오랜만에 대학 시절 생각도 나고 재밌더라고요. 우리가 언제 또 칸에 옷을 보내보겠냐, 이야기하면서 한땀 한땀 놨어요.”(조성민 디자이너)
“대학교 졸업 패션쇼에서 성민이가 디자인한 옷들을 보면서 ‘성민이랑 일하면 나는 자수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저는 기술적인 작업이 좋거든요. 어떤 자수는 1시간에 3센티미터도 진도가 안 나가요. 달팽이보다 느린 거죠. 어쩌면 이 직업은 시대에 뒤떨어져서 오히려 살아남은 것 같아요.”(정경은 자수·공예 작가)
내가 그다지 상업적으로나 산업적으로 맞춤한 배우는 아닐 것이라는 자격지심과 달리 두 사람이 기쁘고 소박한 마음으로 옷을 지어줬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기뻤다. 예술과 명성이 짝을 이뤄야 비로소 성공한 예술가가 되는 시대에 작업실에 앉아 달팽이보다 느린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의 오롯한 정성이, 그런 가치와 방식을 고집하는 브랜드 오너의 단단한 진심이 칸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휘청이던 나를 지탱해줬다는 감사함이 밀려왔다.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자리를 비웠던 식당 주인이 한참 만에 와인 네병을 안고 돌아왔다.
이 와인은 버터리하고…
이 와인은 미네랄의 짠맛이…
이 와인은 상큼한 과일 향과…
이 와인은 견과류의…
가격은 비싼 것부터 버터리, 과일 향, 견과류, 짠맛… 이런 순서였는데,
“가격을 떠나서 짠맛 나는 와인이 궁금한데요?”
“저도요!”
“어머! 사실 저도 그랬는데, 밥 사는 사람 입장에서 ‘원하는 거 뭐든 시키세요, 난 짜장!’ 이런 느낌 날까 봐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어요!”
“크핫! 난 짜장이라니!”
“핫! 이제 와인에서 짜장 맛 날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 그럼 짜장으로 주세요.”
식당 주인이 “그것도 좋은 와인이긴 한데, 그렇게 깊이가 있지는 않을 거예요”라며 음식과 어울리는 베스트 페어링이 선택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우리는 식사 내내 짜고 가끔 짜장이 떠오르는 깊이 없는 와인을 마시며 많이 웃고 간간이 깊은 대화도 나눴다.
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흰색 블라우스에 벙벙한 멜빵바지를 입고 머리를 길게 풀어 늘어뜨린 배우가 긴 사각형 테이블에 걸터앉아 등산 중에 꺾은 듯한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허리춤 옆 허공을 휘젓는다. 노에 바닷물이 젖혀지듯 리듬감 있게 출렁이는 물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밤바다 건너기>(Nightsea Crossing, 1981~87)를 설명 중인 장면이었던가? 배우는 노 젓기를 제대로 재현해보려는 대단한 노력이나 그럴듯한 방법론이 없고, ‘이렇게 노를 저었답니다’라고 제시하려는 의지도 없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노 젓기처럼 보이는 것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배우의 막대기질은 노 젓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우리를 밤바다로 데려가기도 하고 여기에 두기도 하고, 나로 하여금 <밤바다 건너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눈앞의 공연을 보고 있게도 한다. 이 공연은 온통 이런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엄청난 아우라를 가진 행위예술의 대가이자 포스트 드라마계의 대모이자 수행성의 신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그 어마어마한 신화 속에 있기도 하고 동시에 이 하찮은 공연장의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여기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배우 덕에 나는, 휘황한 아우라가 눈부셔 한번도 제대로 만난 적 없었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비로소 잠깐이라도 스친 기분이 들었다.
노박스댄스필름페스트벌의 일환으로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지하 공연장인 팡타개러지(Panta Garage)에서 공연한 <마리나는 여기에>(정진새, 윤서준 연출· 한정임 출연)라는 공연의 한 장면이다. 이 공연은 단행본 <마리나의 눈>(김지연 지음, 그레파이트온핑크 펴냄, 2020)을 원작 삼아 한명의 배우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생애와 예술을 따라가보는 연극이다. 작가이자 연출가는 배우의 입을 빌려 “마리나는 리허설 없는 진실한 즉흥 상황이 퍼포먼스의 핵심이라고 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리허설과 반복을 통해 찾아냈다. 마리나는 퍼포머와 관객 사이에 몸만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이 자잘하고 다양한 소품들에 기대어 공연을 꾸리겠다”라는 취향 혹은 의도를 시원하게 드러낸다. 배우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신화화된 예술가를 추앙하고 동경하는 대신 간단하고 선명하고 만화적인 제스처들과 캠핑용 조명, 마네킹 팔, 카우보이 모자 등 아우라라고는 1도 없는 사물들을 돌려 써가며 <예측할 수 없는 것들>(Imporderabilia, 1977), <호흡하기/내쉬기>(Breathing In/Breathing out, 1977), <정지 에너지>(Rest Energy, 1980) 등 그녀의 대표적인 퍼포먼스들과 생애의 중요한 변곡점들을 휙휙 타고 넘는다. 때로는 설명하고, 재현하거나 ‘재현을 패러디’하고, 제시하고, 혹은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관객을 둘러보고 있거나 관객이 장면의 일부에 참여해 아주 간단한 수행을 대행할 것을 요청한다.
예를 들면, 배우가 관객 한명의 손을 오므려 가상의 화살대를 잡게 하더니 본인은 가상의 활시위를 당기며 대각선 방향으로 멀어진다. 배우가 손을 펴 가상의 활시위를 놓으면 ‘피용’ 하고 가상의 화살이 날아가 관객의 가슴에 박힐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은 낄낄거리면서도 배우가 손을 펴나 안 펴나, 펴면 어쩌나 긴장하고, 혹은 반대로 저 관객이 가상의 화살대를 잡은 손을 펴고 이 놀이의 규칙을 안 받아주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다. 공연은 마리나가 화살대를 잡고 그녀의 오랜 연인이자 동료인 울라이가 활시위를 당겨 잡은 채 서로 무게 균형을 나눠 버티고 섰던 <정지 에너지>를 경유하는 중이다. 이 공연은 내게, 크핫! 웃게 하고 짜장을 떠올리게 하는 깊이 없는 와인을 마시며 대화하던 그날 밤의 저녁 식사 같았다. 혹은 차창 밖 인파들의 열기를 보며 “모든 것은 우연입니다”를 읊조리던 그날 밤 자동차 안의 침묵 같았다.
다음날 다른 공연장에서 마주친 정진새 연출가는 “힙한 걸 소박하게 해보고 싶었어요. 그냥 납작하게”라고 말했다. 입체적인 연기, 입체적인 인물이야말로 좋은 연기이고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강박처럼 느껴지던 요즘의 나에게 ‘납작하게’라는 말이 얼마나 가볍고 속 시원하던지. ‘이것이 바로 납작하다는 것이로군’ 싶게 납작하게 써진 인물이라도 어떻게든 입체적으로 살려내야 하는 것이 ‘명품 배우’가 되기 위한 숙제라고 생각했는데, 납작한 것을 그냥 납작하게 그리고 싶은 욕망이 인다. 어쩌면 배우와 관객 사이에 그 납작함이 불러들이는 오롯함이 있지 않을까? 언젠가 시각예술을 하는 동료에게 이런저런 작업 설명을 하면서 ‘이건 얄팍한 지식인데’, ‘얄팍한 소리지만’, ‘내가 좀 얄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더니, 내 말을 듣고 있던 그 동료가,
“근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얄팍’이 지금 안 좋은 뜻인 거죠?”
“…그렇죠…?”
“아! 아니, 나는 다양한 물성을 가진 재료들을 만지고 사용하다 보니까, 얇으면 얇은 대로 어떤 특성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신록 말에서 얄팍이 부정적으로만 쓰이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네네, 이해했어요.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아….”
책상 위에 하반기에 연기해야 할 인물들이 놓여 있다. 멋있고 예술적인 것들이 갖는 휘황한 아우라 대신 얄팍하고 납작한 것들도 그것들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으면, 얄팍하고 납작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소박하고 담백하게 그래서 보는 사람이 더 다가갈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는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아우라를 걷어내고, 때로는 납작하게, 멋없이.
이것으로 <씨네21>에 꼭 12편의 글을 실었다. 처음 6개월 계약을 하고 이내 6개월을 연장했으니, 1년 동안 글을 쓰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겨우 지키게 됐다. ‘정화의 순간들’이라는 코너의 제목이 때론 발목을 잡았는데, 정화의 순간이 달마다 찾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달에도 부끄러운 글이라도 어떻게든 썼다. 이 연재의 첫 번째 글 제목이 ‘절뚝거리며 찾아 나설 정화의 순간들’이었는데 마지막 글 제목이 ‘아우라를 걷어내고, 때로는 납작하게’라서 마음이 홀가분하다. 1년간 나와 함께 힘써 ‘정화의 순간들’을 기다리고 맞이하고 편집해준 김소미 기자를 비롯한 <씨네21> 편집진,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12편의 글이 복잡하고 다단한 1년을 가름해줘서, 1년이라는 삶이 이렇게 납작하게라도 기록으로 남아서 다행이다.
고마웠어요!
어디서든 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