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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가까운, 너무도 가까운 - 김소희 평론가의 <고독의 오후>

<고독의 오후>

“과거로 온 것 같아.” <고독의 오후> 오프닝 시퀀스에서 밴을 타고 경기장 근처에 도착한 투우사가 열린 문틈으로 새어든 음악을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투우사와 동료들은 ‘과거’로 묘사된 시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다. 투우의 형식은 과거를 작동시키는 매개다. 투우가 지닌 시대착오적 속성은 지나간 시간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관중의 목소리는 들리되, 모습은 생략하는 영화의 방식은 관객을 투우 경기장 가까이로 끌어들인다. 이는 과거 TV 쇼의 물성을 구현하는 몇몇 영화의 방식을 상기시킨다. 웃음과 탄식, 야유 등의 얼굴 없는 음성은 시청자의 반응을 매개하며, TV 쇼의 시대로 오늘날의 관객을 소환한다.

소는 죽어야 한다. 투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말이 정해져 있는, 반전 없는 드라마다. 소는 야생의 불가해한 존재지만, 투우라는 잘 짜인 형식 안에 포섭된다. 일단 경기가 시작되고 나면, 경기장의 관중을 대리한 영화관의 관객은 소의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투우에서 소의 승리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때의 기다림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적이다. 소가 버틸수록 그의 죽음은 유예되지만, 그가 더 많은 고통을 당한다는 말도 된다. 유예된 시간만큼 투우사에게 죽음의 위험이 옮겨갈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이것은 누군가가 승리하거나 지는 게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다. 투우의 핵심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있으며, 폐쇄된 경기장 안에 축소된, 축적된 시간에 있다. 투우의 맥락에서 반복된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긴장의 영속으로 변형된다.

<고독의 오후>에서 강조된 투우의 엄격한 형식은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를 어느 정도는 무마시키는 측면이 있다. 영화는 투우 경기를 둘러싼 모종의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에 담긴 주요 무대는 경기장과 경기장을 오가는 차량 내부다. 둘은 한계가 그어진 폐쇄된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장소는 영화가 확장된 무언가가 아니라 수축되고 폐쇄된 시선에 몰두함을 드러낸다. 카메라 운용 방식은 마치 소의 시야에 탐닉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베르트 세라는 움직이는 대상을 향해 돌진하는 폐쇄적이고 단절된 시선을 제시한다. 관중의 생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소에게 보이는 것은 관중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상대, 가까이에서 움직이며 자신을 자극하는 것뿐이므로, 카메라 역시 관중의 모습 대신 소가 마주하는 눈앞의 상대인 마타도르만을 집요하게 구한다.

투우라는 형식 안에서 죽음은 가장 선명하고 구체적인 행위이며, 삶은 가장 불가해한 대상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마리의 소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카메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소를 가두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에 자동 반응하는 카메라를 보는 것 같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자동차의 좌석에 고정된 채로 주인공 안드레스 로카 레이를 마주 본다. 그는 마치 거울을 보듯 렌즈에 자신을 비춰본다. 안드레스가 마주하는 것은 어떤 불가해함이다. 경기장 안에서 소의 불가해함에 대응하듯, 밴 안에서는 카메라의 침묵에 대응한다. 그는 카메라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며, 무엇을 보여줄 지도 미처 선택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고독의 오후>

소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곧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는 불가해한 대상이 구체적이며 단순한 존재로 이행하는 순간을 반복해서 마주하는 것과 같다. 경기장 장면에서 투우사나 소가 입장하는 장면은 종종 생략되더라도, 소의 퇴장 장면만큼은 생략되지 않는다. 죽음에 이른 소는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투우 경기장에서 소의 죽음은 옆으로 쓰러진 채 허공에 뜬 발로 표시된다. 그는 뿔을 통해 말에 연결된 채, 다리가 들린 상태로 실려 나간다. 삶과 죽음은 선 자세와 누운 자세로 갈린다. 투우사의 위기 역시 땅에서 떨어진 발로 표현된다. 돌진하는 소에 받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한 안드레스는 동료들이 달려올 때까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버틴다. 공포를 넘긴 안드레스는 자신이 땅을 밟고 있음을 강조하는 듯한 자세로 꼿꼿이 선 채 다시 소를 마주한다. 경기장이라는 무대에서 그는 늘 가슴을 곧게 펴고 상체를 활처럼 젖힌 상태로 발을 딛고 선다. 하지만 투우사가 의상을 착용하는 순간만큼은 쓰러진 소와 비슷한 자세를 하게 된다. 투우를 위한 의상은 그의 몸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맞붙을 것처럼 타이트하다. 그러므로 그가 옷을 입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바지를 착용할 때, 그를 밀착해서 돕는 수행자가 두 다리를 넣을 수 있도록 자세를 잡으면, 안드레스는 두 다리를 허공에 띄워 구멍에 다리를 끼워넣는다. 그가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강인한 존재로 변신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취약함을 노출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포박된 소가 아닌, 풀어놓은 소를 상대하는 투우 경기에서 소와 투우사를 약자와 강자의 구도로 간단히 가르기란 어렵다. 도구를 사용하여 처음 마주한 소를 길들이는 투우사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것처럼 보일지라도 물리적으로 투우사는 소가 조금만 각도를 틀어 돌진하거나 해 밟히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다. 투우사의 얇은 종아리를 드러내는 화려한 색상의 타이츠와 작은 리본으로 장식된 검은색 단화는 거친 스포츠에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을 표시한다. 과거 로마군이 신던 가죽 샌들의 야생성이나 현대식 군화의 강인함과 거리가 먼 구두는 차라리 얇은 덧버선의 대용품 같으며, 흙으로 뒤덮인 경기장이 아니라 실내에 적합해 보인다. 투우사들이 맞춰 입는 화려한 의복은 이들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몰락한 귀족처럼 보이게 만든다. 투우사가 등장하는 첫 번째 장소는 이들이 이동하는 밴이며, 이후 투우 장면은 생략되고 호텔에서 피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는 모습으로 넘어간다. 우아한 몸짓과 화려한 의상은 그가 투우를 끝낸 투우사라기보다는 사냥이나 펜싱 같은 고급 스포츠를 마친 귀족처럼 보이게 한다.

<고독의 오후>

안드레스의 화려한 의상은 그가 대중 앞에 서는 존재라는 스타임을 드러내면서, 그가 무대에서 마주하는 소를 자극하기 위한 의상이기도 하다. 그 의상은 보존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찢기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옷이 너덜거리는 누더기로 순식간에 타락할 때, 투우의 본질이 대조적인 것을 접붙이는 작업이기도 함을 인식하게 된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종교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죽음과 엔터테인먼트, 귀족적인 것과 천한 것, 소를 잡는 육체적인 노동의 신성한 의식화. 봉인된 야만의 시대의 영속을 확인하는 것이자, 육식의 시대에 밀쳐진 산업이 예술로 승화하는 장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무대극 배우들이 무성영화 시기의 배우처럼 어느 정도 과장된 표정을 지어야 했던 것과 유사하게 소를 마주한 안드레스의 표정은 과장되어 보인다. 그의 표정은 소를 향한 것이지만,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관중들을 향해서도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을 지어 보인다. 투우사의 표정은 그가 마주하는 소를 도발하거나 제압하려는 표면인 동시에 소의 표정을 매개한다. 소의 뒷모습과 안드레스의 얼굴을 함께 잡을 때, 안드레스의 부릅뜬 눈과 내민 입술로 요약되는 특유의 표정이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는 소의 표정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가 특정한 표정을 짓는다고 할 수 없지만, 한껏 자극되고 상기된 동물의 내면을 인간화한 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해함으로 가득 찬 소의 얼굴을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것으로 만들려는 안간힘이라고나 할까.

관중들이 가장 큰 환호를 보내는 순간은 투우사가 위험에 빠졌을 때다. 그가 소의 머리에 받히고 밟히는 위험한 상황에서 구조되어 다시 소와 마주했을 때, 관중은 큰 소리로 환호하며 함께 구호를 외친다. 옷이 찢기고 군데군데 피로 얼룩진 모습은 그가 마주한 소의 형상과 비슷해 보인다. 투우사와 소가 스치듯 가까이 섰을 때처럼, 둘의 모습이 비슷해질 때 환호가 터진다. 물론 영화관의 관객인 우리는 관중과 같지 않다. 알베르트 세라의 카메라를 통해 그들보다 대상과 밀착한 상태에서 투우를 관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중의 욕망은 그들만의 것으로 소외되진 않는다. 영화는 자신의 거울로서 투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죽음을 무릅쓴 투우사의 용맹함이나 반복된 죽음을 그린 투우의 폭력성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대상에 밀착하고자 하는 예술의 욕망이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