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릴리안 스타이너(조디 포스터)는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다. 미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와 부르주아 계층에 성공적으로 편입했지만, 난감한 문화를 접할 때면 어김없이 ”프랑스인들이란!”을 외치며 혀를 찬다. 그 프랑스인들엔 릴리안의 환자들이 포함된다. 9년간 상담한 폴라(비르지니 에피라)는 사전 통보 없이 세 차례나 내원 약속을 어기고, 마찬가지로 오랜 환자인 줄리앙은 그간 거액의 상담료를 내도 실패했던 금연이 최면 치료 한번에 성공했다며 릴리안을 몰아세운다. 타인도 릴리안을 치료하지 못한다. 안과의사이자 전남편인 가브리엘(다니엘 오테유)은 이유 없이 매일 눈물을 흘리는 릴리안의 안구 상태를 그저 원인불명이라고 진단할 뿐이다.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릴리안에게 더 큰 충격이 닥친다. 폴라가 자살한 것이다. 폴라의 딸 발레리는 모친의 죽음 이후 릴리안에게 매달리고, 남편 시몽(마티외 아말리크)은 아내의 자살이 릴리안의 과다 처방 때문이라며 분노를 퍼붓는다. 이때 릴리안은 자신이 직접 폴라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나선다.
도시의 사생활이 대개 그렇듯, 하나의 스캔들엔 온갖 원인이 나뒹군다. <파리의 사생활> 또한 폴라의 단일한 비밀 위로 여러 장르를 겹치는데, 마냥 제정신일 수 없는 릴리안의 시점숏까지 투과하며 영화는 복잡한 길을 걷는다. 이를테면 릴리안은 눈 치료에 차도가 없자 자신이 무시하던 최면치료소로 향한다. 오컬트적 분위기 속에 전생 여행을 떠난 릴리안은 환영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폴라의 죽음에 동화하는 이유와 반유대주의의 망령을 얽어 의심한다. 현실 세계에서 유대인인 자신과 폴라의 정체성 탐구와 근현대사에서 유대인이 바꾼 세계 정치 지형에 대한 코멘트가 영화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릴리안은 최면 중 마주한 전생의 잔상을 현실에 일대일 대응하며 스스로 설정한 미스터리의 비밀을 추리해간다. 여기에 전남편 가브리엘이 파트너로서 릴리안을 보조하는 순간, <파리의 사생활>은 후더닛 추리의 규칙까지 따른다.
이같은 장르 결합이 균질했다면, 혹은 플롯이 던지는 미끼를 잘 회수했다면, <파리의 사생활>은 보다 말끔한 완성도를 자랑했을 터다. 하지만 연출자 레베카 즐로토프스키는 정갈한 영화를 만드는 데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그는 릴리안이 되어보라는 듯 관객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 선택은 예측 불가능한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각 장르의 파편들이 의미하는 맥락이 끝내 모호해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제 의식에 좀처럼 쉽게 가닿지 못한다. 결국 <파리의 사생활>은 흥미로운 착점에도 불구하고 장황한 디테일에 비해 응집력이 약한 영화로 남는다. 이 혼돈 안에서도 영화를 갈무리하는 존재가 조디 포스터다. 여전히 미니디스크에 환자와의 상담을 녹음하고, 그 자신도 신경증과 회피성 성격장애에 시달리는 의사. 설정이 성격을 앞서기 쉬운 배역이지만 조디 포스터의 연기가 릴리안의 행동 및 습관에 타당성 그리고 생동감을 부여한다.
CLOSE-UP
릴리안은 멈춰서는 법이 없다. 영화 내내 걷고, 달리고, 운전하며 따지고 설득하고 조언한다. 공사가 다망한 그의 일상을 그대로 구현한 듯 보이는 장치가 나선형 계단이다. 나선형 계단은 릴리안의 현재 계급을 짐작하게 하는 인테리어인 동시에 릴리안의 복잡한 머릿속을 외현하는 장치다. 릴리안이 계단을 오를 때와 내려갈 때, 현실의 차원과 릴리안의 심리가 어떻게 유동하는지 집중하면 릴리안의 추리극장에 보다 즐겁게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CHECK THIS MOVIE
<트루 디텍티브> 시즌4(쇼러너) 이사 로페스, 2024
조디 포스터의 캐스팅은 영화 전체를 떠받드는 유머이기도 하다. 수사를 하겠다며 분주한 조디 포스터를 보는 순간, 관객은 <양들의 침묵> 속 명민한 FBI 수사관 클라리스 스털링을 떠올릴 것이다.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조디 포스터는 근래 <트루 디텍티브> 시즌4 속 또 한번의 수사관 연기로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파리의 사생활>이 파리의 고즈넉한 가을 낮을 담는다면, <트루 디텍티브> 시즌4는 알래스카의 초자연적 겨울 극야를 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