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가 3천을 넘네, 마네 하던 때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는데 지난 6월에 9천을 돌파했다. 주변인들의 근황은 ‘삼전닉스’ 주식을 보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양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주가가 워낙 빠른 속도로 상승하다 보니 마치 주식 투자도 암호화폐처럼 하루아침에 고수익을 노리는 무리한 베팅의 장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얼마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학교 숙제로 주식을 매수했던 일화를 들었다. 경제 공부는 그래야지, 하며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젠 고등학생까지도 투기에 가담하는 것이냐’고 호통치는 아내에게 아이가 아주 크게 혼났다고 했다. 어쨌거나 숙제는 해야 했으므로 아들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1주씩 샀고 ‘투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은 아들로부터 모든 주식을 처분했다는 고지를 들었는데 ‘숫자’와 ‘화면’에 지나치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게 싫어서라고 했다. 나는 크게 감탄했으나 진정한 ‘킬링 포인트’는 그 후에 등장했다. 전체 수익 1만5천원 중 5천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는 것이다. 지인의 아들은 자신의 성취가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개인의 역량으로 얻은 이득이 근본적으로 사회의 공동 자산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근래 들은 것 중 가장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다.
동시대의 여러 비극을 추동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와 손잡은 가속주의다. 실익과 효율을 목표로 내달리는 빠른 속도는 한탕주의라는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더 큰 ‘위험’은 더 높은 수익을 위해 감수해야 할 것으로 정당화되고, 이에 따른 불안은 더 빠른 결과를 확보해야만 하는 조급함으로 이어진다. 오롯이 나라는 개인이 위험을 감수했으니, 그로 얻는 높은 이윤 또한 배타적으로 개인의 소유여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각자도생의 논리를 심화한다. 이러한 태도는 돈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성공과 삶에 관한 자세로 확장되어 미래를 오직 손익계산서의 최하단, 순이익을 확인하는 창구로 배치한다.
디지털 및 플랫폼 경제의 추상성과 결부된 한탕주의는 누적된 시간으로서의 과정을 경시하도록 부추긴다. 점점 더 저평가되는 실물 노동과 그 가치는 ‘스크린’ 밖 실제 현실의 존엄성을 위기로 이끈다. 노동은 단지 소득 창출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자기효능감의 원천이자 그를 통해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통로다. 지인의 아내가 가장 크게 우려한 부분은 이 지점이었다. 단지 가공 자본과 가상화폐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영화 <트루먼 쇼>의 충격은 트루먼의 세계가 가상이 아닌 실제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좋은’ 현실은 ‘보이지 않는 손’이 판매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할 수 있다. 트루먼이 추구하던 ‘좋은 삶’은 크리스토프가 목표한 높은 시청률을 위해 통제되는 변인일 뿐이었다.
<트루먼 쇼>의 공포가 세계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한탕주의의 공포는 출구가 명백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우스는 항상 이긴다. 게임을 설계한 하우스(카지노)는 플레이어의 승패와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늘 우위에 선다. 플레이어가 정말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하우스가 설계하지 않은 테이블에 앉는 것이다. 제4의 벽 너머로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문 뒤로 사라지는 트루먼의 이후가 열린 결말에 부쳐지는 것은 그가 하우스의 판을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토록 사나운 삶에 맞서 진실로 승리하고자 한다면 확실한 수익을 믿는 위험이 아니라 삶 자체의 불확실성을 껴안는 위험을 택해야 한다. 권태로운 일상을 구성하는 일분, 일초가 소중하고 유의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