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 에리카 코후트(이자벨 위페르)는 제자가 연주하는 동안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 타고난 학대자인 그는 손 하나 대지 않고도 사람을 부술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밤이 되면 포르노 부스의 휴지통에서 앞사람이 버린 휴지를 건져 코에 갖다대고, 욕실에서는 면도날로 제 성기를 긋는다. 한 침대를 쓰는 늙은 어머니의 감시 아래 평생을 저당잡혔던 중년 여성은 곧 젊은 제자 발터(브누아 마지멜)와 은밀한 관계를 시작한다. 발터가 그녀에게 고백하자 에리카는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묶고 때리고 모욕해야 하는지를 빼곡히 적은 편지를 건넨다. 1983년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쓰고, 2001년 미하엘 하네케가 영화화한 이야기가 2026년에 한국 극장에 다시 걸렸다. 무삭제판은 제한상영가 판정으로 재심의를 받아 문제의 화면을 삭제하지 않는 대신 블러 처리한 판본으로 상영되었다. 비약을 보태 에리카 코후트는 여전히 직시하기 힘든 여자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성을 탐구하는 영화의 급진성을 기대하고 온 관객조차도 배반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리카를 묘사하는 말들은 곧잘 진단이 된다. 억압된 노처녀, 변태, 신경증 환자. 하네케의 차갑고 정연한 카메라가 실로 거리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임상적 병리에 봉인하는 순간 에리카는 이해하기 쉽게 분류된 표본으로 안전하게 치워진다. 진단은 종종 이해의 형식을 빌린 추방이므로. 그렇다면 이 뒤틀린 여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설은 구체적인 정치성을 띤다. 옐리네크의 언어 속에서 에리카의 가학과 자해는 한 개인의 히스테리가 아니라, 전후 화려하게 재건된 도시 빈의 융단 아래 한꺼번에 쓸어넣은 과거의 복잡한 흉터였다. 영화는 에리카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실을 지나가듯 발설하는데, 실제로 옐리네크의 아버지가 나치 학살이 자행되었던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사실과 겹친다. 프랑스어로 제작된 하네케의 우아한 버전은 옐리네크 소설의 정치성을 증류했다. 형식에 통달한 감독이 한 여자의 내면을 응시하는 숭고하고 모호한 영화가 된 것을 두고 “세련된 유럽 예술영화화”를 비꼬는 평자들도 더러 있다. 소설 바깥에서 영화만의 영점을 조정하는 가운데 희석되지 않고 한층 강렬해진 지점도 있다. 육체성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2004년 옐리네크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옐리네크가 “제 육체라는 침묵의 왕국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여자들”을 그린다고 수식했다. 이를 <피아니스트>에 적용하면, 우리는 한 여자가 침묵하는 자기 왕국의 통치자인 동시에 수인(囚人)이기에 겪는 파탄의 응시자이다.
수전 손택은 포르노그래피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한 비평 에세이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중)에서 성이란 본래 의식의 한계를 부수고 자기 소멸을 향해 치닫는 악마적 충동이며, 위선적으로 억압된 사회일수록 포르노그래피를 그 사회의 논리적 표현이자 전복적 해독제로 불가피하게 생산한다고 썼다. 손택을 빌리면 에리카의 기벽은 변태성의 발현이 아니라 일종의 인식이고 실천이다. 그녀는 죽음에 인접한 극단에서만 겨우 무언가를 느낀다. 에리카 자신이 스스로의 왕이자 죄수로서 자기를 벌하고 치유하므로 그녀는 본래 역할극에 익숙하다. 그래서 에리카는 자신을 묶고 때리는 역할을 발터에게도 지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비극은 발터가 그 각본을 연기하지 못한다는 데서 온다. 그는 편지를 읽고 심히 역겨워하다가, 그녀를 찾아와 각본에 없던 진짜 폭력을 휘두른다. 여성이 자기 욕망의 저자가 되려 하자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남성이 각본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에리카는 여성주인공이고, 영화는 여성의 시점으로 전개되며, 인물이 기성의 질서를 심문하는 전복적 행위가 주를 이루지만 <피아니스트>는 훌륭한 ‘여성영화’로 불리기 어렵다. <피아니스트>는 오히려 여성이 겪는 폭력과 손상을 구원 없이 복잡하게 그려낸 영화일수록 페미니즘 영화의 모범적인 격자를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영화다. <피아니스트> 이후 25년이 흐를 동안 현대 관객은 이미 ‘이상하거나 미운 여자’를 향한 허기를 채웠고 웬만큼의 내성도 생겼다. 이자벨 위페르가 <피아니스트> 이후 연기한 또 다른 포식자적 여성이 등장하는 <엘르>와 같은 해에 시리즈 <플리백>의 피비 월러브리지가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시험하기도 했다. 비도덕적인 여성 주체는 이제 하나의 장르다. 현시점에서 돌아보건대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는 여전히 이 모든 범주에서의 소비를 거부한다. 그는 일면 통쾌하지도, 끝내 치유되지도, 우리와 닮아 안심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영영 손상되는 한순간만을 남긴다.
영화의 마지막, 음악회장 로비에서 칼을 꺼낸 에리카가 자기 어깨를 찌르고 밤거리로 걸어 나간다. 표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찾기 어려운 가면 같은 얼굴 위로 잠깐 무언가가 스친다.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리카가 한 일은 자기 처벌이 아니라 상연이다. 하네케 역시 참조했다고 밝힌 들뢰즈의 마조히즘 연구 <자허마조흐의 소개>에 따르면 마조히스트는 희생자가 아니라 저자여서, 가해자를 찾아내 교육하고 설득해 동맹을 맺어야만 정체성을 상연할 수 있다. 발터가 떠나 더 이상 연기할 사람이 남지 않았기에 에리카는 영화의 마지막에 직접 무대에 오른 것이다. 우리의 해석은 언제나 한쪽의 처벌을 바라지만, 때리고 찌르는 왕과 맞고 찔리는 수인은 육체라는 자기만의 왕국에서 언제나 쌍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석을 거절하는 것은 에리카 코호트의 마지막 주권이다. 닿을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고통에 관하여, 하네케의 카메라는 멀리서 걸음을 멈춘다.
